2019.10.01 14:00
1. '애드 아스트라'
돈이 아깝진 않은데 시간이 아까운 영화였습니다. 오리지널리티가 없습니다. '그라비티', '인터스텔라', '퍼스트맨'에서 조금씩 가져와서 브래드 피트를 입혔어요. '그라비티'는 어떤 영화였죠? 더이상 살아있을 이유가 없을 때, 왜 더 살려고 노력해야하는가에 대한 영화라고 샌드라 블록은 말했습니다. 딸은 죽었고 동료도 죽었고, 우주는 한없이 공허하죠. 나 하나 죽는다고 달라지지 않는 무정한 진공에서 왜 발버둥을 쳐야하죠? '인터스텔라'는 어떤 영화였나요. 스러져가는 문명 속에서 후세대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현 세대에 대한 이야기죠. 후세대인 딸과 현세대인 아버지는 시간의 벽을 뚫고 교감합니다. '퍼스트맨'은 어떤 영화였느냐 하면,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당대의 기술을 모아 되는 대로 밀어붙여서 인류 능력의 한계를 시험하고 오는 이야기죠. 그럼 '애드 아스트라'는 어떤 이야기냐구요?
어중간합니다. 별을 지나갈 때는 '인터스텔라'의 비주얼을 조금씩 떠올리게 하고, 우주공간에서 허우적 거릴 때는 '그라비티'를 연상케합니다. 브래드 피트가 연기하는 로이 맥브라이드가 건조한 말투로 말할 때는 '퍼스트맨'에서 닐 암스트롱의 고독을 보여준 라이언 고슬링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애드 아스트라'가 전달하고 싶은 내용은 '우리 밖에 없다' '만족하라'예요. 아버지가 밖으로 나돌아다니며 외계인을 찾아다니는 동안 아들은 이만큼 컸고, 아버지를 구조하러 올 만큼 훈련을 받았고, 그러나 아버지는 큰 프로젝트, 큰 사상에 사로잡혀서 아들의 작은 생각에는 조금도 관심없죠. 실제로 아버지 클리포드 맥브라이드는 말합니다. 사실을 말하면 나는 너에게도, 네 엄마에게도 관심이 없고, 네 머릿속에 있는 작은 생각에도 관심이 없다. 내 집은 바로 여기다, 라구요.
로이 맥브라이드 같이 재미없는 캐릭터에 촛점을 맞추는 것보다 차라리 클리포드 맥브라이드에게 시선을 줬으면 영화가 그나마 나아졌을 거다 싶네요. 뭐가 인간을 저 한계까지 밀어붙이는지? 내가 가진 걸 다 걸고라도, 혹은 그보다 더 한 걸 하더라도 경계선을 시험하고 싶은 인물은 어떤 인물인지? 하구요. (제가 들은 게 맞다면) 스물아홉에 아버지가 없어져서 상처입은 남자,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남자, 그래서 자기 주변의 여자도 사랑하지 못하는 남자. 도대체 이 캐릭터 어디에 매력이 있단 말이예요? 주인공 로이가 아버지를 만났을 때 하는 말도 그래요. 긴 말 필요없고 기절시켜서 데려오든지, 아니면 손주가 주렁주렁 있으니 그 손주들이 당신의 프로젝트를 완성시켜줄 거라고 거짓말 하든지. 늙은 아들이 더 늙은 아버지를 얼마나 교화할 수 있겠어요?
2. '다운튼 애비'
그냥 드라마를 영화로 옮겨놓은 딱 그 수준입니다. 그래도 '애드 아스트라'보다는 재미있어요. 다운튼 애비에 조지 5세와 메리 왕비가 방문합니다. 다운튼의 하녀, 하인들 뿐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이 들뜹니다. 식료품 점 주인은 "지금이 내 인생의 피크"라면서 자기가 공급한 식료품을 왕과 왕비가 먹는다는 걸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다운튼의 사용인들은 왕과 왕비를 수발할 기회를 잡기 위해서, 왕궁에서 온 사용인들을 방안에 가두고 가짜 전화를 걸어 런던에 보내기까지 합니다.
이 영화를 보는 근대인들은, 20세기의 사람들이 왕과 왕비를 모시는 걸 저렇게 영광으로 생각하고 기뻐할 수 있느냐 싶겠죠. 하지만 저는 정치인 팬덤에 빠진 사람들이, 정치인 머리에서 후광을 봤다고 증언하는 것도 들었어요. 21세기의 정치인들에게도 후광을 보는 게 사람인데, 20세기의 영국인이 왕과 왕비를 면전에 둔다면 과연 황공해 하겠죠.
아일랜드인들이 보면 기분 나빠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아일랜드인이면 기분 나빴을 거예요.
극장에서 꼭 볼 필요는 없었던 영화고, 스트리밍 서비스로 나올 때까지 기다려도 괜찮았을 영화지 싶네요. 시간은 안 아까웠는데 돈은 아까운 영화였습니다.
2019.10.01 14:05
2019.10.01 14:19
보스톤에서 다운튼 애비 영화 나온다고 무슨 전시회를 하더군요. 특히 동부쪽이 유럽에 대한 향수를 못버린 것 같아요.
2019.10.01 15:09
본문에서 아일랜드 인 언급하신 것 보니 미국에서도 아일랜드 인 갖고 농담 많이 하나 봐요. 그런데 보스턴도 아일랜드 인 많은 동네 아닌가요?
2019.10.01 21:24
다운튼 애비 세계관에서 아일랜드인은 문제가 많은, 불만있는, 불령선인으로 묘사됩니다. 그렇지만 같은 가족이기 때문에 툴툴거리면서도 아일랜드인은 영국 귀족을 챙기게 된다는 이야기죠. 그 댓가로 영국 귀족이 주는 건 귀족과의 결혼이구요. 은인인 체하고 생색내면서 아일랜드인을 살짝 자기네 세계에 양념으로 넣습니다. 드라마에서나 영화에서나 이 묘사가 얼마나 부자연한지 보기가 힘듭니다. 드라마에서는 아일랜드 출신 운전수가 셋째 아가씨와 결혼생활을 추억하면서 우리는 동등했다고 애써 설명하죠. 영화에서는 이 아일랜드 인이 IRA로 추정되는 아일랜드인의 테러를 막습니다. 첫째 아가씨의 도움에 힘입어서요. 그라고 국왕의 치하를 받아요.
2019.10.01 15:14
그래도 나름 드라마팬이었던지라 극장에서 보고 싶네요. 옛날에 엑스파일을 극장에서 보면서 주인공들 얼굴만 쳐다봐도 좋았었던 그런 기분이 들겠죠 ㅎㅎㅎ
2019.10.02 15:02
네... 둘째 레이디가 특히 더 예뻐졌더군요... 깜짝...
2019.10.01 16:20
애드 아스트라는 저도 그닥 좋지는 않았습니다.
평소 하드SF 쪽으로 완전히 편향된 취향임에도 이 영화는 보면서 자꾸 눈꺼풀이..ㅠ
마지막 주인공 심경의 변화도 그다지 와닿지 않더군요..
2019.10.02 15:02
연기 잘하는 어르신들을 그렇게 모아놓고 저 정도의 이야기밖에 못하다니 다소 안타깝네요. 아버지 역할을 한 사람 사진 왼쪽에 버즈 알드린 사진을 놓는데 그건 약간의 조크로 보였습니다. 버즈 알드린은 달에서 뭔가 봤다느니 하는 말을 슬쩍 흘리곤 하거든요. "우리 말고 뭔가가 있다"는 사람 옆에 "없다"는 사람 사진을 놓은 셈이죠.
2019.10.02 08:19
다운튼 애비는 꼭 봐야겠네요. 근데 우리나라 영화관에서는 개봉하나요? 지금은 북미에서 개봉했다는 얘기죠?
다운튼 애비 자체가 영국 귀족 얘기고 이 집 아버지가 엄청 왕실을 챙기는 사람인걸요. 안사려던 라디오도 국왕 연설때문에
사서 온 집안 사람들이 모여서 경청하고, 왕실의 스캔들을 막으려고 잠입해서 편지도 훔치던 에피가 기억나네요.
2019.10.02 15:00
예, 북미에서 개봉했습니다. 이 집 아버지는 본인이 군주제 주의자라고 스스로를 밝힙니다. 레이디 메리는 우리나라로 치면 박경리씨의 '토지'에 나오는 서희인데, 일제시대를 겪어야해서 신산한 삶을 살아야했던 서희와는 달리 레이디 메리는 온갖 패션과 사치를 즐기며 조금씩 쇠락해가는 세계의 마지막 여왕이 되죠.
미국은 유럽에서 건너간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인데 왕실에 열광하는 것 보면 신기해요. 케이트 미들턴이 첫 아이 낳을 때 cnn이 며칠 전부터 죽치고 있다가 실시간 중계한 것도 그렇고요.
정치인뿐만 아니라 재벌3세 한 번 본 사람도 후광이 어쩌고 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