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식쇼는 코메디언 유튜버 피식대학이 영미권 토크쇼를 패러디한 토크쇼입니다. 여기 듀게에 있으신 분들은 연식이 좀 있을테니 데이비드 레터맨 쇼를 좀 예시로 들어야할려나요 ㅎㅎ 객석에서 직접 들리는 박수소리, 상대적으로 캐쥬얼한 분위기의 대화, 메인 호스트와 보조 엠씨의 구성, 그리고 진행자의 역할을 맡은 피식대학 사람들이 영어로 대화를 합니다. 물론 이 사람들의 영어가 원어민 수준은 당연히 아니고, 그냥 본인들이 정말 영어권 원어민인것처럼 능청을 떠는 거죠. 그래서 게스트들도 원어민이거나 그에 준하는 영어실력이 있으면 영어로 말을 하고 그게 아니면 떠듬더듬 영어로 대화를 이어갑니다. 그래서 이 쇼의 제일 웃기는 지점은 한국어와 영어가 섞이는 괴상한 한영어입니다. 이를 잘 보여준 편이 방탄소년단의 RM이 나온 편인데, 영어를 잘하는 게스트가 컨셉을 완벽하게 이해를 하고 나오니까 골 때리는 멘트들을 치더군요. Are you 등따심guy?  / Because I have a 가오... 르세라핌 편에서도 그런 어처구니 없는 말들이 나옵니다. It's kind of 흔들려~ 


이런 언어적 유희도 웃기지만, 제가 이 쇼를 보면서 특이하게 느꼈던 건 출연자와 진행자 사이의 케미스트리였습니다. 아이돌 게스트가 진행자와 편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공중파 방송의 가장 대표적인 토크쇼 라디오스타를 생각해보면 그 차이점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만약 이들이 라디오스타에 나간다면, 김구라를 포함한 다른 메인 엠씨들 앞에서 실수하지 말아야한다는 중압감과 계속 싸워야할 겁니다. 공중파 방송의 토크쇼에는 엠씨와 게스트 사이의 보이지 않는 주도권 싸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피식쇼에는 그런 게 거의 없습니다. 진행자들의 "급"의 차이로만 보긴 어려운 게, 피식대학은 현재 유튜버 중에서 침착맨을 제외하면 제일 메인스트림에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이퍼 리얼 꽁트라는 새로운 장르의 선두주자로서 엄청난 명성을 누리고 있습니다) 누구와 어떤 방송을 하든 한국의 여자 아이돌들은 긴장을 놓지 않을 수 없죠. 그런데 30대 남자 코메디언들을 앞에 두고 이 여자아이돌들이 꽤나 편하게 낄낄대며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진행자의 방송 스킬이나 배려심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어느 게스트든 이 피식쇼에 나오면 자동적으로 좀 헐렁해지게 됩니다. 그건 이 피식쇼가 이미 하나의 가상의 무대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피식쇼는 토크쇼이지만 사실은 "토크쇼를 흉내내는 꽁트"입니다. 일종의 연극이죠. 그러니까 게스트들도 자동으로 이 연극에 하나의 캐릭터로 참여하게 됩니다. 게스트조차도 이 피식쇼 안에서 가상의 캐릭터로 능청을 떨며 꽁트에 참여하게 됩니다. 위의 영상에서도 이 피식쇼의 게스트 르세라핌은 진짜 르세라핌이 아니라, 가상의 토크쇼 피식쇼가 있는 세계관에서 한영어를 섞어쓰는 가상의 아이돌 르세라핌인거죠. 뭔가를 지어내는 건 아니지만, 다 같이 합의한 꽁트를 하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는 어떤 이야기든지 편하게 할 수 있죠. 왜냐하면 이건 진짜 자신이 아니니까요. 이것은 다들 합의를 마친 후 서로 능청을 떠는 가면극입니다. 


공중파 토크쇼에서는 아이돌, 배우, 희극인, 이런 역할극으로서의 가면을 벗고 "진짜 자신"을 드러내주길 바라는 강박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웃겨야 하죠. 이 두가지 명제를 둘 다 성립시키는 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는 건 어지간히 원숙하거나 다수를 향한 기만능력이 있는 이효리 정도나 가능한 일입니다. 모두에게 쉽지 않고 불편하면서, 완수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미션입니다. 피식쇼는 그 형식 자체로 "진실성"에 질문합니다. 왜 진실되어야하지? 웃기는 게 목적이면 그냥 적당히 다들 연기를 하면 되지 않나? 진실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엄청나게 편안한 일입니다.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장 약하고 인간적인 부분을 굳이 드러내면서 평가당할 걱정을 안해도 된다는 뜻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이 피식쇼는 게스트들이 솔직함에 대한 강박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되게 시시하고 사적인 이야기들도 털어놓습니다. 왜냐면 이건 어차피 가짜이고 이 무대에서는 다들 연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동시에 출연자들도 재미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쇼 자체가 이미 형식으로 웃음을 보장하고 있으니까요. 설령 게스트가 계속 진지하게 영어로만 대답하더라도 그 자체가 이미 이 쇼의 능청을 한몫 거들고 있는 것입니다. 대답이 조금 평이하고 덜 웃긴다 싶으면, 바로 이 "미국적 토크쇼"의 형식에서 슬쩍 빠져나오면 됩니다. 영어로 본관을 물어본다거나, 약속시간에 늦었을 때 한국식 대처방법을 영어로 설명한다거나, 엠비티아이로 진지하게 썰을 푼다거나 하는 "한국적" 주제를 진행자들이 풀어놓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바로 형식과 내용의 괴리가 생깁니다. 게스트들도 웃기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영어를 하다가 슬쩍 한국어만 섞어주면 되거든요.


토크쇼를 꽁트로 진행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이 실험적인 형식으로 피식쇼는 꽤나 재미있는 대답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라디오스타를 비롯한 공중파 토크쇼들은 그 존재에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은 누구를 모셨습니다, 근황은 이렇다는데요, 이러이러한 에피소드가 있으셨다고? 라는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별반 재미를 이끌어내기 어려울 겁니다. 그저 수위를 높인 도발적 질문으로 제작진과 진행자가 게스트를 괴롭히는 일방적인 권력으로도 별 재미를 뽑아내진 못할 거구요. 꼭 방송계의 트렌드가 아니더라도 피식쇼는 저에게 철학적으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듯 합니다. reality를 추구하는데 왜 truth는 같이 끌려오지 않는 것일까? "진짜같은" 재현은 우리를 "진실"로부터 얼마나 떨어트려놓는가? 새로운 종류의 웃음을 발명할 때 세상의 인식도 새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피식대학은 이래저래 참 창의적인 코메디언들입니다.


@ 최근에 산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 저에게 더 명확하고 깊은 대답을 줄 수 있을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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