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7 19:48
우리 나라에선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말이 있잖아요. 현실 감각이 없어진다고 생각해서일까요. 저는 박완서의 소설에서도 이 대목을 읽었던 게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박완서였을 주인공이 어린이였을 때 너무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거나 이야기책을 밝히자 그의 할머니가 한 말이었나 그랬습니다. 박완서는 이후에 오래 현실 세계를 꾸려나가다 중년 이후 이야기꾼으로서의 길을 걷는데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생활을 하셔서 전쟁전후를 제외하면 가난하게 사시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인간사 큰 굴곡이 있어 마음의 고통은 많이 겪으셨지만요.
'3000년의 기다림'에선 위의 문장을 요렇게 고쳐야 되겠습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시청각적 이미지는 생략하고 그냥 드문드문 이상한(인상적인) 장면들 이야기를 두서없이 하려고 합니다. 내용도 다 포함되어 있고요.
알리테아는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는 것이 편했으며 그런 아이에게 흔하게 볼 수 있는 귀결로 책을 좋아했고, 공상의 친구도 있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친구에 대해 글로 기록하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글로 적을수록 그 존재는 점차 의심스럽고 유치하게 느껴졌고 결국 그렇게 의심받던 친구는 어린 알리테아의 인생에서 사라집니다. 병에서 나온 지니를 만나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 초반에 다짜고짜 '고백'할 것이 있다면서 어린 시절 현실의 결핍이 만들었던 그 보이지 않는 친구 얘기를 꺼냅니다. 이것이 왜 '고백'이 되어야 할까. 주의가 갔습니다. 마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상대에게 이전에 했던 사랑의 실패의 경험을 얘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맞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다시 잘 사랑해 보고자 하는 사람의 이야기였고 그 사랑의 대상이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지니가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병에 들어갔다가 상대의 망각 때문에 또다시 갇힌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듣던 알리테아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당신도 나를 사랑해 달라,는 소원을 말합니다. 이 장면도 영화의 내용 전개상으로는 상당히 뜬금없이 느껴졌습니다. 알리테아와 지니 사이에 사랑이 생길 수 있는 사연도, 사건도 없으니까요. 그냥 호텔방에서 둘 다 목욕 가운을 걸치고 3000년에 걸친 지니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거든요. 지니의 이야기를 통해 계속해서 갖고 있던 내면의 요구(갈망)를 분명히 깨닫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이야기,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이야기가 주는 감동과 그것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상대의 망각으로 지니가 오랜 세월 병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 알리테아의 폐부를 찔렀을까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야기도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주변을 보면 생각보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흔치 않은 것 같아요. 내가 이야기를 사랑한다면 나는 이야기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 봐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두 사람이 연인이 밤을 보낸 다음 아침 장면도 무척 이상합니다. 지니의 모습은 안 보이고(마치 목욕탕의 수증기에 가려서 그런 양) 행복해 하는 알리테아 혼자 허공을 보며 같이 런던에 가자 어쩌구 말합니다. 집으로 와서 지니와 지내며 알리테아는 일상 일을 하러 나갑니다. 학교에서 일처리도 하고 카페에서 혼자 식사도 하고 전철을 타고 돌아오고...등등. 그런데 이 장면들이 느리고 적적해 보입니다. 집에 연인이 기다리고 있다기엔 어울리지 않는, 언제나 지속되어 온 이전과 같은 일상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집에 오면 지니가 식탁 의자에 앉아 있어요. 이 부분을 보자니 영화의 정 중간에 나왔었던, 아무도 그 존재를 모르고 모두의 망각 속에서 병에 갇혀 있던 외로움을 이야기 한 후에 '우린 누군가에게 진짜일 때만 존재합니다' 라고 한 지니의 대사가 떠오릅니다.
온갖 전파 공해로 인해 가끔씩 만나기로 하고 만남의 그 순간순간을 만끽하며, 죽기 전에는 함께 하겠다고 한 지니에게 알리테아는 충분해 합니다. 알리테아는 어릴 때와 달리 지니라는 존재를 의심하지 않고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있다고 믿는 모양입니다. 마지막 장면의 둘은 무척 만족스러워 보입니다.
2023.07.17 20:10
2023.07.17 20:15
제가 개인적으로 담아놓았던 이야기만 주절거린 거 같아서... 각설하고 본문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자면, 예술도 문학도, 결국 적자생존... 이 적용되는 시장이란 게 안타깝습니다. 그것도 운과 인기가 따라줘야 하고, 그 흔히 말하는 작품성...이란 게 작가로서의 생존에는 적용되지 않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국내에서는 글쓰는 사람이 전업작가가 되기 어려운 환경이죠. 김영하 작가같은 베스트셀러 많이 내신 전업작가도 방송이나 한예종 강의등 투잡 뛰시는 게 현실이니.
2023.07.17 22:57
현실과 판타지의 혼동과는 좀 다른 얘긴 것 같습니다. 영화는 증거와 확인이 가능한 과학의 세계와 점점 영향력을 잃어가는 서사의 세계를 대비하고 있었고 소박한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시각적으로는 매우 화려하였지만요.
이 영화에서 이야기를 좋아하던 아이가 서사학자가 된다는 것은 누가 봐도 가장 바람직한 진로라고 저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일정한 결손을 안고 간다는 점도 보여 주었으니...
2023.07.17 21:15
이야기에 대한 사랑... 을 넘어서 아예 이야기랑 연애 하는 이야기라는 게 재밌었습니다. ㅋㅋ
말씀대로 마지막 장면의 만족스런 분위기가 인상적이었고, 참 좋았어요. 난 내 인생에 이거면 돼. 다른 거 필요 없지롱. 이런 넉넉함이 느껴졌어요.
그리고 뭣보다 틸다 여사님은 사랑입니다... 언젠가 이 분이 맡았던 괴상한 캐릭터들 싹 다 정리해보면 재밌을 것 같아요. 하다 하다 이젠 램프의 지니와 연애하는 사람이라니. 으하하.
2023.07.17 23:09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격려의 내용이었던 거 같아요.
두 배우가 다 매력적이었습니다. 저는 이드리스 엘바가 거대하게 등장해서 고대 그리스어인가를 쓰며 돌아앉아 있던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2023.07.18 13:37
처음에 보고 당황했던 영화입니다. 3000년이라는 아득한 시간의 단위와 램프의 지니라는 절대적 존재가 나오는데 정작 소원의 청구자와 수리자(?)가 하는 게임은 알콩달콩 사랑밖에 없죠. thoma님의 글을 보고 이야기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내면의 감상을 더 굳히게는 되는데, 직관적으로 어떤 감정적 결론에 딱 가닿지는 않고 있습니다.
2023.07.18 17:30
소박한 이야기를 상당히 크고 화려한 포장지로 감싸 그렇게 느끼셨을까요.
지니는 신기하고 흥미롭고 소원 성취라니 막 매력 있는 옛날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선택된 거 같아요. 재미난 이야기의 대표 주자로. 영화는 알리테아의 이야기일 뿐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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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개인적으로 어떤 문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 자체는 좋은 일인 거 같습니다. 문제는 픽션과, 개인적인 판타지를 혼동했을 때, 그리고 요즘은 그러한 개인의 통찰이 어려운 미디어의 범람 속에서, '무엇이 현실인가?' 를 구분하기 어려워지지요. 그러한 구분이 안되는 경우도 종종 있고요. 영화 자체는 나름 인상깊게 봤으나, 소박한 결말에 다소 놀라기도 했습니다. 결국 일종의 환상동화로서 끝맺는 이야기라서.
예전에 모 덕부심 강한 연예인 관련 기사의 댓글에서, "화면 속 사람들이 아플 때도 곁에서 지켜줄까요?"란 글을 봤는데, 왠지 이야기의 힘은 강하지만, 현실의 힘은 또 별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트위터에서 김태리 배우가, 자신은 연기를 가짜라고 생각하고 연기한다는 글을 봤는데... 그 트윗도 인상 깊어서 한 번 옮겨오겠습니다.
무드(@20mood46)님의 7월 15일 트윗.
김태리는 “연기는 진짜라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모든 연기는 거짓말이다”고 의외의 답변을 내놨다. 그리고는 “우리의 삶이 진짜다. 연기는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는 거짓말을 최선을 다해서 진짜에 근접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연기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