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없구요



 - 대만제 앤솔로지 드라마입니다. 에피소드 다섯개로 이뤄져 있는데 편당 런닝타임이 한 시간 사십분에 달하는 걸 보면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라고 해야할 것 같기도 하고... 주제는 모두 자식을 억압하는 부모의 행위가 불러오는 비극에 대한 것이고 억압의 주된 이유는 대입 공부구요. 한 마디로 명문대 가라고 자식들 쥐어짜는 부모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프로젝트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실 한 편 밖에 안 봤어요. 첫 번째 에피소드 '엄마의 리모콘'이 시리즈 중 최고라길래 일단 먼저 봤는데 괜찮게 보긴 했지만 제 기준으로 좀 아슬아슬하게 합격이라 나머지 네 편은 안 봐도 되겠구나... 라고 생각 중입니다.



 - 중장년의 남녀가 각자 변호사를 대동하고 이혼 조정을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그 중 여성인데, 조정이 진행되는 장면들 사이로 짧게 삽입되는 과거의 장면들을 보면 풋풋한 학창 시절에 설레는 고백을 받고 결혼해서 오랫동안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던 남편이 나이 먹고 젊은 여자와 다른 살림을 차려서 그 여자랑 살겠다며 이혼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딜을 하는 행위에 환멸을 느낀 여자는 꽤 재력가로 보이는 남편에게서 그냥 함께 살던 고급진 저택과 아들 양육권만 받아내는 걸로 딜을 끝내 버립니다.

 문제는 (가뜩이나 결벽증도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 여자가 그러고나서 자신에게 남은 것, 곧 자기 아들에게 집착을 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이제 중3으로 한창 사춘기 통과중인 아들은 그런 엄마에게 짜증을 부리고 가뜩이나 인생이 서러웠던 여자는 거리를 헤매다가 자식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리모콘(...)을 장만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 리모콘의 기능이 무엇인고 하니, 아들의 시간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정확히는 아들의 시간을 원하는만큼 과거로 돌릴 수 있어요. 그리고 좀 재밌는 점은, 이렇게 시간을 되감아도 아들의 기억이 사라지는 게 아니어서 같은 날을 무한 반복 시키는 고문(...)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는 아들을 학원에 등록시켜 놓고 하루를 열 번씩 반복시킴으로써 아들을 영재로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말을 안 들으면 같은 날을 무한 반복시키는 걸로 아들을 굴복시킵니다. 하지만 처음엔 굴복했던 아들은 다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원하는 사람을 만날 자유를 갈망하게 되고...



 - 그러니까 '환상특급' 같은 류의 이야기인 건데, '환상특급'이나 일본판 '기묘한 이야기' 같은 시리즈들과 기본적인 성격은 비슷하면서도 방향성이 다릅니다. 이런 성격의 이야기들은 괴이한 아이디어와 상황으로 보는 사람에게 스릴과 충격을 주는 데 주력하며 좀 사악한 뉘앙스를 띄기 쉬운데 반해 이 '엄마의 리모콘'이 방점을 찍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아들이 겪게 되는 드라마에요. 극단적이고 충격적인 장면은 별로 없고 애잔하고 안타까운 정서의 장면들이 주가 되는데 거기에 환상적인 설정이 하나 얹혀 있는 물건으로 생각하면 되시겠습니다.


 다행히도 그 드라마는 꽤 지켜볼만 합니다. 배우들 캐스팅도 좋고 연기도 좋고 각본도 나름 설득력이 있구요. 부모의 잘못된 집착이 아이의 인생을 어떻게 망쳐 놓고 아이 본인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대체로 평범한 이야기들이지만 차분하면서도 공감 가게 잘 묘사해냅니다.

 결말이 좀 약하고 애매하긴 한데 그것도 뭐... 애초에 이야기 자체가 '충격과 공포다 거지 깽깽이들아!!'라는 걸 의도한 게 아니니 납득할만 하구요.


 대단히 재밌고 막 강력 추천할만한 작품까진 아니지만, 제 취향에는 좀 지나치게 무난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지루하지 않게 잘 봤습니다.



 - 대만에 대한 지식은 한 10년 전에 놀러가서 며칠 돌아다닌 것 밖에 없지만,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기에 매력적인 공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드라마에서도 그런 부분을 꽤 잘 살려냅니다. 제가 놀러갔던 동네가 깔끔하고 현대적(심지어 좀 미래적인 느낌까지)인 느낌의 대도시에 그냥 숲이나 폐가(...) 수준의 건축물들이 뒤섞여 있는 그런 곳이었는데, 드라마에서도 이런 장소들을 잘 활용하거든요.



 - 제목이 참 그럴싸하죠. '너의 자식은 니 소유의 물건이 아니다'라는 의미일 텐데 약간 말장난스러우면서도 의미는 확실하게 전달이 되고 또 결정적으로 한 번 무슨 내용인지 구경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ㅋㅋ



 - 엄마의 입장을 보여주는 걸로 시작함으로써 아들 뿐만 아니라 엄마의 입장에도 나름 현실성을 부여하려는 건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그럼 안 되지!! 라는 생각이 드는 행동을 자꾸 하다 보니 그게 좀 무쓸모가 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징글징글 무시무시. 저런 부모 안 만난 나는 참 운이 좋았구나... 라는 생각을 했네요. 고맙습니다 엄마.



 - 다만 런닝 타임은 거의 절반으로 줄여도 충분했을 것 같더라구요. 길어야 한 시간 정도면 충분했을 것 같은데 참으로 느긋하게 한 시간 사십분을 잡아 먹습니다. 엊그제 본 드라마 '죽음의 타임캡슐'도 좀 그런 느낌이었는데 대만분들은 좀 성향이 느긋하신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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