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거나 슬프거나

2019.08.15 19:57

어디로갈까 조회 수:1493

1. 포도에서 포도향기가 나듯, 그러면서 쉽게 짓무르고 상해버리 듯, 개인은 그토록 당연하게 생기있고 우울합니다.
나는 무엇인가? 세상에서의 하나의 기능, 하나의 역할들의 조합이 아니라면 나는 무엇인가? 이 자문의 답을 모르는 사실에 대한 반응이 바로 우울입니다. 그러니까 우울은 개인의 징표이기도 합니다. 

민족과 국가, 계급과 신분, 지배자와 시민 같은 이름들로 호출이 이루어질 때, 끝내 대답하지 못하고, 끝내 일어서지 못하고, 대기실 의자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개인의 우울. 그것은 얼마나 기이하며 또한 당연한 걸까요. 얼마나 비천하며 또한 고귀한 걸까요?
경미한 우울은 앉아서 성찰하게 하지만 심각한 우울은 창문에서 뛰어내리게 합니다. 개인은 의자와 창문 사이에 존재합니다.

2. 슬픔과 우울은 흡사합니다. 차이점이라면 우울에는 슬픔과는 달리 자기비하의 감정이 섞여 있죠. 슬퍼하는 자에겐 세계가 비어 있고 우울해 하는 자에겐 자아가 비어 있습니다.
슬픔과 우울은 대상 상실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이죠. 슬픔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현재를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슬픔은 대상과의 이별을 가능하게 해요. 우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사로잡혀 있는 태도죠. 즉 현재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슬픔은 진실하며 가면을 쓰지 않습니다. 슬픔 뒤에는 언제나 슬픔이 있어요. 우울은 상실된 자아의 모범에 따라 진실을 부분적으로 변화/왜곡시킵니다. 우울 뒤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있어요. 슬픔이 쏟아져 내리는 눈이라면, 우울은 눈에 파묻혀 형체를 잃은/잊은 벌판입니다.
슬픔과 우울의 실질적인 요점은, 그것을 저지할 수 없다는 것. 슬픔과 우울의 자세가 그 다음의 문제로 남을 뿐입니다.

0. 1980 '서울의 봄'에 합수부에 구속됐던 분들 중 고문받다가 몇 분이 쓴 진술서를 어쩌다가 읽어보게 됐어요.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소수의 개인들이 자기 삶의 존엄을 해치거나 죽음으로 맞서는게 과연 훌륭한 결단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는 시민 각자가 괴롭더라도 자기 몫의 책임을 살피고 살면 그런 비극까지는 없을 건데...라는 턱도 없는, 하나마나한 생각만 들죠. - - 아아, 개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1833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0831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1123
109476 독서모임 동적평형 2019 8월 정모 후기 & 신입 회원 모집 듀라셀 2019.09.02 496
109475 오늘의 만화 엽서 파워오브스누피커피 2019.09.02 250
109474 [EBS2 지식의기쁨] 추상미술 강의 [4] underground 2019.09.02 798
109473 벌새 보고왔습니다 [9] 먼산 2019.09.02 1298
109472 이런저런 일기...(주말) [2] 안유미 2019.09.01 949
109471 Valerie Harper 1939-2019 R.I.P. 조성용 2019.09.01 384
109470 뒤늦게 본 영화-스파이더맨 뉴유니버스, 차이나타운 [5] 노리 2019.08.31 893
109469 왓차에 ‘체르노빌’ 이 올라왔어요. [4] ssoboo 2019.08.31 1134
109468 감자 떨이하는걸 샀는데 파란 감자가 1/3 [2] 가끔영화 2019.08.31 2030
109467 니 실력에 잠이 오냐? [17] 어디로갈까 2019.08.30 2526
109466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새 예고편 [6] 부기우기 2019.08.30 997
109465 심장마비로 쓰러진 노인 [7] ssoboo 2019.08.30 1654
109464 [드라마바낭]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보슈' 시즌 2도 다 봤네요 [5] 로이배티 2019.08.30 1091
109463 '엑시트' 재밌어요. [1] 왜냐하면 2019.08.30 666
109462 오늘의 편지 봉투 [4] 파워오브스누피커피 2019.08.30 354
109461 이런저런 일기...(카페와 펜션, 장래, 빙수) [1] 안유미 2019.08.30 627
109460 이런저런 일기...(시도와 노력) [1] 안유미 2019.08.30 565
109459 심상정이 검찰에게 한마디 했네요 [4] ssoboo 2019.08.29 1758
109458 젊음의 행진에서 채시라가 [2] 가끔영화 2019.08.29 774
109457 박근혜 국정농단이 파기환송 된거 같은데..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나요? [3] 라면한그릇 2019.08.29 1458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