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결혼식을 갔는데, 신랑이 입장하기 전에 프로포즈 동영상을 틀어주더군요. 촛불이 아른거리는 극장 좌석에 혼자 앉은 여자친구를 향해 세레나데를 부르는 남자. 가만, 이걸 촬영도 했단 말이야? 낭만이라고는 스타크래프트 1세대 프로게이머들 게임플레이 말고는 아는 것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버티고 보고 있기 힘든 광경이었습니다. 오늘은 페이스북 담벼락에 저 아는 사람이 프로포즈를 받았다는 포스팅을 했네요. 어디 좋은 데 데려가서 기타도 쳐주고 반지도 주고 했나봅니다.


따지고 보면 결혼식이라는 것도 그렇고, 어떤 의례가 반드시 유용성을 가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논리적 정합성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지요. 그런데 저로서는 이 프로포즈라는 문화가 너무나 이상해서, 나중에 결혼을 하고 싶어도 프로포즈를 못해서 결혼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하는 걱정이 들 정도입니다.


일단 프로포즈의 시기가 이상합니다. 주변을 보면 대부분 남녀가 결혼을 합의하고 나서 이런 저런 절차를 거치고 사실상 결혼히 확정된 시기에 하더라구요. 프로포즈라는 게 결혼 하자고 제안하는 거 아닌가요? 이미 결혼하자고 얘기도 끝났고 심지어 같이 웨딩드레스도 같이 맞추러 가고 집도 알아봤으면서 뭘 또 프로포즈라는 걸까요? 또 그럼 애초에 결혼을 합의하는 과정에서 오간 대화는 뭐가 되는 걸까요? 프로포즈를 받지 않으면 나중에 갑자기 남자친구가, "미안해. 실은 이 웨딩드레스 네가 아니라 너와 체형이 비슷한 영숙이를 위한거야"라고 말할까봐 불안하기라도 한걸까요?


둘째로 여자들이 진짜로 원한다는 그 진심이라는게 이상합니다. 제 친구는 자기 신랑이 프로포즈할 때 특별한 것 없이 조용한 식당에서 진심어린 말과 함께 반지를 주며 프로포즈했다며, 시끌벅적한 프로포즈가 아니고 진심이 느껴지는 프로포즈여서 좋았다고 자랑하더라구요. (이런 프로포즈가 사실 더 난이도가 높은, 진짜 프로들이나 할 수 있는 프로포즈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견에 대해서는 차치하겠습니다.) 요란한 프로포즈를 받았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무엇보다도 상대의 진심이 느껴져 감동적이었다는 사람들이 많지요.


프로포즈 때 하는 말은 당연히 수많은 시간 공들여 고르고 고른 말일테니 당연히 너무나 아름답겠지요.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수많은 사람들을 좋아해 봤고, 결혼을 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연심을 품지 않겠습니까. 영원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프로포즈를 심각하게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말들을 "너의 공식 진심으로 인정해"라고 해버리고, 그것에 또 감동을 받아 눈물까지 흘린다는게 이상합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이건 '난 언제든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 더 새롭고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날 감동시켜봐'라고 해놓고, '감동을 받았으니 이건 진심이야'라고 믿어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결혼할 때가 되면 예전에는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져서 연애조차 꺼리게 만들었던 날짜 세기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려니하고 말게 될까요?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을 원하는 그녀에게, '영원한 사랑이 어디 있느냐. 다행히 난 보수적인 사람이라 절대 연인관계의 의리를 저버리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영원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놈팽이들 보다는 내가 더 나을 것이라는 건 자신할 수 있다'로 일관하다가, 나중에 실연당하고 나서 술먹고 펑펑 울면서 영원한 사랑이니 그딴게 다 뭐라고 그냥 해줬으면 되는 것을, 하고 후회했던 모자란 남자로서, 제 향후의 생각과 행동이 어찌될지 상당히 궁금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2380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1427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1751
125967 [KBS1 독립영화관] 교토에서 온 편지 [2] underground 2024.04.12 259
125966 프레임드 #763 [4] Lunagazer 2024.04.12 59
125965 넷플릭스 시리즈 종말의 바보 공식 예고편(이사카 코타로 원작, 안은진 유아인 등 출연) [2] 상수 2024.04.12 315
125964 칼 드레이어의 위대한 걸작 <게르트루드>를 초강추해드려요. ^^ (4월 13일 오후 4시 30분 서울아트시네마 마지막 상영) [2] crumley 2024.04.12 163
125963 '스픽 노 이블' 리메이크 예고편 [4] LadyBird 2024.04.12 230
125962 리플리 4회까지 본 잡담 [3] daviddain 2024.04.12 237
125961 란티모스 신작 카인드 오브 카인드니스 티저,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놀란영화 12편 순위매기기 상수 2024.04.11 215
125960 [왓챠바낭] '디 워'를 보고 싶었는데 없어서 말입니다. '라스트 갓파더' 잡담입니다 [13] 로이배티 2024.04.11 346
125959 프레임드 #762 [4] Lunagazer 2024.04.11 61
125958 스폰지밥 무비: 핑핑이 구출 대작전 (2020) catgotmy 2024.04.11 170
125957 총선 결과 이모저모 [22] Sonny 2024.04.11 1432
125956 오타니 미 연방 검찰 조사에서 무혐의 [9] daviddain 2024.04.11 424
125955 10년 전 야구 광고 [2] daviddain 2024.04.11 138
125954 22대 총선 최종 의석수(업데이트, 21대와 비교) [1] 왜냐하면 2024.04.11 520
125953 [핵바낭] 출구 조사가 많이 빗나갔네요. 별로 안 기쁜 방향으로. [14] 로이배티 2024.04.11 1183
125952 프레임드 #761 [2] Lunagazer 2024.04.10 81
125951 [핵바낭] 아무도 글로 안 적어 주셔서 제가 올려 보는 출구 조사 결과 [22] 로이배티 2024.04.10 1090
125950 [왓챠바낭]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의 영화 만들기 이야기, '영화 너무 좋아 폼포 씨' 잠담입니다 [2] 로이배티 2024.04.10 199
125949 간지라는 말 [7] 돌도끼 2024.04.10 376
125948 우리말에 완전히 정착한 일본식 영어? [5] 돌도끼 2024.04.10 40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