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겨먹은 대로 산다는 것

2011.01.12 23:23

Damian 조회 수:2976

사람이 생겨먹은 대로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직업, 직장과 관련해서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네요.


재작년 가을 쯤에는 꽤 고민에 빠져 있었어요. 3년간의 군의관 복무를 마친 뒤 갈 곳을 정해야 할 시기였거든요.


저는 굉장히 게으른 편입니다. 쉬엄쉬엄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온라인에 잡문이나 좀 끼적이며 


간혹 재미있는 뭔가가 있으면 좀 공부하다 마는 게 제 생겨먹은 바에 어울려요.


저와 비슷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런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다가도 간혹 불안해질 때가 있습니다.


정체감이죠. 다들 앞만 보고 죽어라 달려가는데, 이러다가 뒤쳐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체감.


제가 이런 말 하면 싫어하실 분도 꽤 계시겠습니다만, 어쨌든 제 직종에서도 노후를 걱정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부익부빈익빈, 강자독식은 이 동네에서도 이미 보편화된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은 대략 세 가지 정도 있을 거에요. 


1.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적당한 자리에서 애들 뒷바라지하며 산다. 일이 많다 해도 관심없는 공부를 억지로 할 필요가 없다.


2. 체제에 적극 순응하여 달리는 말에 올라탄다. 돈에 영혼을 팔거나, 노후가 보장되는 교직으로 가는 길을 취하거나...


3. 아예 판을 떠난다. 대표적으로 성공한 예가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이겠습니다. 물론, 완전히 떠났다고 보긴 어렵지만요.


전 언제나 이 판을 떠나고 싶어했습니다만, 그러기 위해 들여야 할 노력과 시간이 너무 커 보였어요.


실은 저 같은 사람에게   첫 번째 길이 가장 어울리죠. 일이 많다 해도 대개는 routine으로 반복되는 것들입니다. 


그 분야에서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up to date하게 공부하면 됩니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권태감이 밀려듭니다.


솔직히, 권태감보다 더 큰 것은 사회적 성공에 대한 컴플렉스입니다. 시작도 안 해 보고 포기하는 듯한 느낌, 그에 따른 열패감,


이른바 잘나가는 친구들을 보며 느껴지는 초조감, 자랑스러운 남편이자 아빠이고 싶다는 욕망...


이 판을 떠나기 위해 위험부담을 안고 잘 알지도 못하는 것에 투자하기에는 늦었다는 생각...


그래서 2번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 뒤로 1년이 지났네요. 정확히 말하면 8개월간 모교병원에서 "이른바" 연구활동이라는 걸 해 왔습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동안 이것저것 조금씩 공부하며 알게된 것들도 많지요.


하지만, 그 지식들이,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포기한 대가로서 충분한가, 난 이 일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지도교수님은 일을 많이 시키시긴 하지만, 한국의 여느 대학교수들과 달리 공정하신 분입니다. 전보다 오히려 존경하게 될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 내가 해야 하는 것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


저에게는 아무 의미기 없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하다 보니 이 곳에 1년 더 있게 되었습니다.


보스께서 제가 빠져나갈 수 없는 여러 장치를 마련해 놓으셨더라고요.


언제나 친절과 상냥함을 가장하는 제 전임자도 저를 위해 주는 척 하면서 적극 수렁에 밀어넣더군요.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도와 주는 것 맞습니다. 의도는 극히 이기적이지만...)


한 번 시작한 것 어쨌든 끝은 봐야죠.


이 의미 없는 일들이 쌓이고 쌓이면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보려고요.



지금 가장 부러운 사람들은, 자기 생겨먹은 바를 깨닫고 미련 없이 떠났거나 떠나기로 한 이들이에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1494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0501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0782
109427 오늘의 만화 엽서 (스압) [2] 파워오브스누피커피 2019.08.26 303
109426 [엑시트]봤습니다. [3] 룽게 2019.08.26 959
109425 수꼴 조롱받는 청년의 분노와 울분을 들어보자 [18] skelington 2019.08.26 1403
109424 조국 교수의 법무부 장관 후보자 사퇴를 촉구한다 [11] 도야지 2019.08.26 1388
109423 특혜의 가능성에 목소리를 높이다 [1] 사팍 2019.08.26 616
109422 변상욱 기자의 사과문, 이런저런 [3] 왜냐하면 2019.08.25 1019
109421 [넷플릭스바낭] '마인드헌터' 시즌2까지 완료했습니다 [4] 로이배티 2019.08.25 2036
109420 [넷플릭스바낭] 할로윈 2018을 보았습니다 [4] 로이배티 2019.08.25 624
109419 조국 이슈 쟁점 정리(feat. 김어준) [24] 사팍 2019.08.25 2165
109418 EIDF 2019 [푸시 - 누가 집값을 올리는가] [3] eltee 2019.08.25 1171
109417 itzy 데뷰전 사진들 왜냐하면 2019.08.25 767
109416 X파일 HD, 미드소마, 듀냥클 [10] 양자고양이 2019.08.24 1256
109415 수수께끼 같은 만남 [7] 어디로갈까 2019.08.24 1131
109414 조국딸에게 했던 것처럼 [37] 사팍 2019.08.24 2717
109413 스타워즈 새 시리즈 만달로리안 예고편 [4] 부기우기 2019.08.24 872
109412 자한당에서 조국 청문회를 3일 동안 하자고 하는 이유 [13] ssoboo 2019.08.23 2075
109411 도덕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마광수 [5] eltee 2019.08.23 1487
109410 영화 <변신> 보신 분은 없나요? [2] DL. 2019.08.23 849
109409 마인드 헌터 시즌 2의 아쉬운 점 (스포 없음) [3] DL. 2019.08.23 1377
109408 EIDF - Minding the gap [3] tori 2019.08.23 75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