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마비로 쓰러진 노인

2019.08.30 16:06

ssoboo 조회 수:1654

오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배 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걸어서 두어시간이면 종주가 가능한 조그만 섬에서 출발한 배가 중간정박항에 도착할 즈음 미리 일어나 출구로 이어진 계단으로 향하는데 화장실로 연결된 복도 입구에서 왠 노인이 아주 조용히 주저 앉듯 쓰러지더군요. 얼굴색이 아주 시커매지며 숨도 못 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경우 필요한 응급처치가 머릿속을 맴돌 뿐 멍 때리고 있는데 주변에 있던 다른 승객들이 다급하게 가장 가까이 있던 매점 판매원에게 노인이 쓰러졌다는 것을 알리자 그 판매원은 상기된 표정이었만 노인이 쓰러져 있는걸 확인하고는 위층의 운전실쪽으로 소리를 지르며 누군가를 호출했고 바로 심각한 표정의 승무원이 달려 내려 왔어요. 노인이 쓰러지고 1분도 안지나는 동안 벌어진 상황입니다.  곁에서 공연히 구호 조치 하는걸 지켜 보겠다는건 방해가 된다는 것을 직감하고 자리를 피해 출구쪽으로 올라가서 그 뒤 상황은 못 봤어요.

중간 기착지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10여분 거리의 상해로 가는 배가 출발하는 항구로 이동하는 내내 그 까만 노인의 얼굴이 떠 오르 더군요.


여객선 터미널에서는 배가 출발하기 1시간 전부터 표를 팔던데 이상하게 오늘은 출발 15분전이 돼서야 표를 팔기 시작하더군요.  그 이유는 배를 타고 나서 알게 됐습니다.


상해로 가는 배를 탔더니 출구에서 가장 가까운 좌석앞 넓은 공간에 노인이 링겔을 맞으며 누워 있었고 옆에는 의료진이 3명이 있었어요. 아까 쓰러진 그 노인인지 아닌지는 분간할 수가 없었어요. 얼굴색이 핏기 없어 보일 정도로 밝았거든요. 자세히 보는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보는 거나 모두 민폐일거 같아서 부질 없는 궁금증은 혼자 삭히기로 했습니다.

상해쪽 여객터미널에 도착하니 부두까지 구급차가 와서 대기하고 있더군요.

제발 아까 쓰러졌던 노인이 지금 저 구급차에 타는 환자이길 바랄 뿐이에요.


이번 출장은 섬 마을 중에서도 빈집이 많아지면서 주거 환경의 구조안전과 위생면에서 한계에 달한 곳에 대한 실태조사 업무였어요. 주로 보존 가치가 있는 건물과 부분 개조와 철거 및 재건축을 가름하는데 필요한 기초 자료를 정리하기 위함이었는데, 조사 대상인 140여 가구 중 1/4이 채 안되는 집들만 사람이 살고 있었고 그 대부분은 노인들이었어요. 쓰러진 노인의 새까만 얼굴과 지난 몇일간 그 마을에서 마주친 노인들의 얼굴이 오버랩 됩니다.
그 노인은 어찌 보면 얼마나 운이 좋았던 것일까요? 마침 응급조치가 가능한 승무원이 있는 배를 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저 낙도의 3/4 이 텅 빈 마을의 노인들은 어쩌죠?

그 쇠락해가는 섬마을은 관광개발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 수년 후에는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되겠지만 저 스러져 가는 노인들의 생활과 그 시간들은 되돌릴 수가 없겠죠. 그리고 조그마한 육체적 손상도 치명적일 수 있는 위험을 늘 달고 말이죠.

인생의 허무함이 아니라 지금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닫는 경험이었어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1639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0639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0926
109615 여기는 분위기가 어떤가 궁금해서 들어와봤어요 [2] 연금술사 2019.09.11 886
109614 노문빠 FANTASY [20] 메피스토 2019.09.10 1359
109613 15년간 거의 매일 모든 신문지면을 읽으며 느낀점 [8] 위노나 2019.09.10 1259
109612 널 가질 수 없다면 부셔버리겠어 [8] 남산교장 2019.09.10 1439
109611 게시판에서 표창장 떠들던 머저리들 사과할 염치 같은건 없겠죠 2 [28] 도야지 2019.09.10 1435
109610 [넷플릭스바낭] '괴기특급'이라는 대만제 호러 앤솔로지를 봤습니다 [8] 로이배티 2019.09.10 2547
109609 가입인사를 대신하여 연등이에게 엽서 하나 띄웁니다. [11] theoldman 2019.09.10 884
109608 나랏돈 172억 들여 '文대통령 단독 기록관' 짓는다 → 문 대통령 "개별 대통령기록관, 원치 않아" [9] eltee 2019.09.10 1132
109607 조커의 토드 필립스 같은 감독이 또 있나요? [2] theum 2019.09.10 599
109606 진보 FANTASY [22] 은밀한 생 2019.09.10 1077
109605 각종 번호 부를 때 쓰는 "다시" / 선검색 후질문 DH 2019.09.10 407
109604 동양대 교수 “조국 딸, 인문학부 프로그램서 봉사…표창장 위조 아냐” [13] 왜냐하면 2019.09.10 1121
109603 이언주 의원 삭발 [25] underground 2019.09.10 1139
109602 조국 딸의 논문과 나경원 아들의 논문(포스터) [31] ggaogi 2019.09.10 1837
109601 김종배의 시선집중(특별좌담, 검찰개혁 어떻게 되나) [6] 왜냐하면 2019.09.10 688
109600 너는 친문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9] 칼리토 2019.09.10 981
109599 오늘의 카드 [4] 파워오브스누피커피 2019.09.10 283
109598 조국이 법무부장관이 되어 슬프답니다 [3] 사팍 2019.09.10 1159
109597 세상에서 책읽기 가장 좋은 장소에서 [12] 어디로갈까 2019.09.10 887
109596 이런저런 잡담...(장르, 엑소시스트) [5] 안유미 2019.09.10 65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