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듀나님의 글을 보고 씁니다.

스텐저의 책 '물리학의 세계에 신의 공간은 없다' 중 '지적 설계라는 망상' 챕터를 보면 켈빈경이 진화론에 대한 자신의 이의를 품위있게 철회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켈빈은 자신이 열역학적으로 계산한 지구의 나이에서는 생물의 진화가 나타나기엔 너무 짧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웠다가 지구의 나이가 더 오래되었다는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나타나자 철회했다고 쓰여있죠. 듀나님은 이 사실을 여기서 처음 접하고 다른 소스도 확인하고 싶어하시던데 아시모프가 쓴 '아이작 아시모프의 과학에세이'라는 책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잠깐 소개해보죠.

지구가 태양에서 일부가 떨어져 나와서 생긴거라고 했을 때 지구가 현재 온도로 식는데 걸린 시간과 태양이 중력 에너지를 발산하며 지구 궤도의 크기에서 현재 크기가 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니 켈빈은 지구의 나이가 2억년 정도라는 걸 알아냈습니다. 지질학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그보다 열 배나 백 배는 오래됐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켈빈의 발표에 대해 어이없어 했지만 켈빈처럼 물리학적, 수학적으로 정확히 계산해 낼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잠자코 있어야 했습니다. 켈빈은 자기가 말한 것보다 지구의 나이가 많으려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열의 원천을 찾아내야 될 거라고 비꼬듯 말했고요.

그로부터 한참 지난 후 우라늄, 토륨 등의 방사성 원자가 발견되었고 그것이 붕괴되며 열을 내놓는다는 것도 알게되었죠. 어네스트 러더포드는 방사능을 연구하며 지구상에 수많이 존재하는 방사성 원자의 방사능 열이 지구가 식는 속도를 충분히 더디게 해 줄거라는 것을 생각해냈습니다. 또한 태양이 중력 에너지를 내놓으며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방사능 에너지를 이용하여 열을 방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러더포드는 이것을 과학자들 앞에서 발표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그 자리엔 물론 여든이 된 켈빈도 참석하고 있었고요.

러더퍼드는 켈빈의 참석을 달갑지 않아했지만 이윽고 발표를 하다가 그 명성높은 노 과학자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켈빈이 너무나도 잘 내다보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새로운 열의 원천이 발견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켈빈은 그 말을 듣고 표정이 누그러져 잔잔하게 웃었고, 러더포드는 무사히 발표를 마쳤다고 합니다.

두 책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노년에 켈빈경이 지구의 나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철회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스텐저가 쓴 것처럼 진화론까지 인정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연선택이 작동하기에 지구의 나이가 너무 적다고 생각한 켈빈경이 지구의 나이가 많다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진화론까지 그 즉시 인정했다고 믿긴 조금 어렵네요. 독실한 기독교인인 켈빈에게 2억년이라는 지구의 나이는 진화론을 반박하는 여러 논거 중 하나였을 뿐이고, 그 중 하나만 깨진 것이니까요. 뭐 스텐저가 가장 좋아하는 사례라고 하며 쓴 것이니 출처도 확실한거라 믿어야겠죠.

켈빈경 이야기랑은 관계없지만 어떤 책에서 본 한 일화가 생각나네요. 오랫동안 자신의 과학적 발견을 신념처럼 고수하며 연구해왔던 한 과학자가 한 발표 자리에 참석을 했죠. 거기서 자신과 같은 분야를 연구하던 다른 과학자가 그 발견과 완전히 반대되는 연구 결과를 발표를 했습니다. 발표가 끝난 후 처음 그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한 과학자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며 악수를 청했고 글쓴이를 포함한 청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고 합니다. 권위나 다수의 믿음보다는 증거와 더 나은 설명이 더 우선시되는 과학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담 중 하나겠죠(물론 과학계가 항상 이렇게 순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건 아니지만요). 글쓴이 뿐만 아니라 저도 아주 감동적인 사례로 생각했는데 누가 어떤 책에서 쓴 내용인지 당장 생각이 안나는군요. 아마 도킨스의 책에서 본 내용이 아닐까 하는데 한 번 뒤져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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