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사랑과 야망'의 미자

2011.01.14 20:32

settler 조회 수:4378

언젠가 듀게에 가장 가장 공감하는 가상의 캐릭터에 대한 글이 올라온 적 있었는데요

그땐 잠시 고민하다 답을 내지 못했는데 잡념폭발의 새벽(미국입니다)에 떠오르는 인물은

김수현 작 사랑과 야망의 미자(한고은)입니다. 닮았다기보다 내가 이해하는 사람이랄까요.

 

미자는 잘 나가던 영화배우였고 극중 조민기와 결혼한 후 배우로써의 커리어는 중단되고 집에서 매일 술을 퍼 마시고

냉혈한 조민기에게 구박도 당하고 구박도 하며 살아가는데 디테일은 기억이 안 나고 여하간 안 행복해요

행복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남편 조민기만큼 자신은 자기 삶을 충실히 살지 못했다고 여겼기 때문인 것 같은데

남편의 성공과 성취를 자연스레 자신의 것으로 공유할 수 있는 일부의 여자들과 달리 미자는 남편을 질투하고 남편에게

처절한 열등감을 느끼죠. 조민기는 뭐 알아 주는 성취형 인간이고 미자는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도

배우로써건 뭐로건 대성하기엔 영악함과 자기 절제가 부족해 보이긴 했어요.

 

왜 지만 잘나고 난리냐고 버둥버둥 괴로워하는 미자를 전 진심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저도 골백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성취형 인간은 못 되는 주제에 그렇다고 제 팔자에 만족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제 상황이 미자랑 닮은 건 아니지요. 전 그렇게 화려한 인간도 아니고

그때의 전 미자처럼 결혼으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커리어에 단절이 있었던 상황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냥 어렸을 때는 일종의 중2병으로 당당하게 안 부러워할 수 있던 성취형 인간에 대한

열등감을, 사회생활을 몇년 해 보면서 뼛속 깊이 절감하고 있던 시기여서일지도 몰라요.

 

여하간 사랑과 야망이란 드라마, 그리고 김수현이란 작가를 달리 보게 했던 것이 바로 미자라는 인물이었는데요

인물 자체의 의식이 꽤 현대적이었던 것 같아요.

평생을 안 행복하다고 퍼덕퍼덕 버둥버둥거리는 한고은에게 친한 언니 이승연이

'넌 어떻게 그렇게 삶이 좁고 아직도 그렇게 너만 중요하냐. 너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켜라. 네 남편도 너고 네 아들도

너다.' 뭐 이런 취지로 충고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어요.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던 당시로선 지금보다 경직된 성역할도 큰 이유였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성취형 인간과 비성취형 인간이 만나면 일종의 삼투압 같은 화학현상처럼

비성취형 인간이 성취형 인간의 서포터로 포지셔닝되기가 쉬운 것 같아요.

그런데 성취형 인간도 아닌 주제에 주인공이 아닌 채로 사는 것도 싫은 못된 자존심이 미자를 힘들게 했을 거라고 전 이해해요.

 

그러고 보면 김수현 드라마엔 미자 같은 여자들이 모양을 달리하며 존재해 왔던 것 같기도 하네요.

플러스, 김수현 드라마엔 미자 그리고 미자와 대척점에 서 있는 여자-사랑과 야망에선 과수원댁...같은 흑백대조도 꽤 많았던 것 같아요

내 남자의 여자에서 칠첩반상 차려주던 배종옥이랑 처음엔 평생 밥 안 할 것 같아서 좋다가 나중엔 밥 안 해준다고 원망 받던 김희애도 그랬구요

이런 흑백 대조가 촌스러운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자 같은 캐릭터는 리메이크판이 방영되던 당시에도 꽤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한고은 연기는 늘 논란이 있지만 전 한고은의 미자는 참 좋았어요

화려하지만 심약해 보이고 긴 팔다리로 술병을 끌어안고 허우적대는 모습이 제대로 우울했어요

퇴폐적인 화려함도 있었구요

비록 발음은 샜어도,

미자의 어리석고 괴로운 마음은 잘 전달이 된 것 같아요.

 

한고은의 미자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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