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위대한 발명

2019.07.14 12:18

어디로갈까 조회 수:1634

BBC에서 제작한 '인류의 발명'에 대한 다큐멘터리 필름을 봤습니다. 
세계 석학들이 꼽은 인류의 가장 중요한 발명품은 인쇄기계더군요. 이것이 발명된 후, 지식의 축적을 통해 자연을 지배할 힘을 얻게되었다는 게 이유입니다. 동시에 그로부터 인간의 자연에 대한 '강간'이 시작되었으며, 지구 파괴의 속도가 앞당겨졌다는 비판도 곁들여졌고요.

인간 진화의 다음 단계인 컴퓨터도 인쇄기계 비슷하게 많은 표를 얻었어요. 스스로 프로그램을 짤 수 있는 컴퓨터는 인간의 생물학적 구조를 바꿔 사이버 요소를 생리과정 안에 도입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은 사이버네틱 종으로 변하게 되는 것일까요? ( 아마도 저는 그런 진화를 보지 않고 죽을 듯하여 별 고민 안... - -) 

컴퓨터와 비슷하게 중요한 발명으로 언급된 것이 인도-아랍의 숫자체계입니다. 그게 없었으면 미적분도, 뉴턴이나 갈릴레이의 업적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컴퓨터도 등장하지 못했을 테죠. 윈도우즈는 시장을 먼저 장악했다는 사실만으로 세계를 석권했지만, 인도-아랍숫자 체계는 쓰기에 편리했기 때문에 범세계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외에 리스트에 오른 것들은 전기, 나사, 도르래, 페니실린과 아스피린, 시계, 비행기, 상하수도, DNA, 인터넷, 피임, 핵폭탄, 배터리, 렌즈, 확률론...등등이었어요.

그런데 독특하고 흥미로운 주장이 있었으니, 더글러스 러쉬코프란 학자가 꼽은 지우개가 바로 그것이에요. 그가 말한 '지우개'에는 컴퓨터의 'del'키, 화이트, 헌법 수정 조항, 그 밖의 인간의 실수를 수정하는 모든 것들이 포함됩니다. (전 이 분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요.)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없었다면, 뒤로 돌아갈 수 없었다면, 과학적 모델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고 정부, 문화, 도덕도 없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발명들의 가치를 전면 부정한 학자들도 있었어요. 모든 발명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거나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역사적 사실을 꿰뚫은 이들인데, 주로 고고학자들이거나 예술 쪽 학자들이었습니다.

요즘 제가 하고 있는 생각/회의도 비슷한 거예요. 인생에 있어서나 예술에 있어서나, 아름다움은 과도한 성취가 아니라 포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것. 

덧: 이 영상을 보고 나니 보르헤스가 선정한 '정의로운 자'들이 두둥실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어요.
그의 가치관에 따르면, 자신도 모르게 세계를 구원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 단어의 기원을 찾아보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 
- 볼테르가 소망했듯이, 자기 정원을 가꾸는 사람, 
- 조용히 체스 게임을 즐기고 있는 두 사람의 노동자, 
- 모양과 색깔을 그윽한 눈으로 살피고 있는 도자기 굽는 사람, 
- 책의 내용에는 무관심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책을 잘 만들까 고심하는 조판공, 
- 의견이 다를 때, 상대방이 옳다고 믿어주고 싶어 하는 사람,
- 잠들어 있는 동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사람.


덧2: 어느 러시아 사상가는 이런 역설을 선보였죠. "이제 인류는 실현되려는 유토피아를 회피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영미 실용주의자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농담(!)이었을 겁니다. 
어제, 일찍 치매를 앓게 되신 친구 어머니를 뵙고 왔어요.  눈부신 과학의 멋진 신세계에서 쪼그라든 뇌로 크기가 축소된 현실을 살 수밖에 없는 모습은 우리 모두의 미래이자 위기구나 싶더군요. 십만년의 시간농축자 호모 사피엔스에게 찾아든 이 위기를 극복할 다른 차원의 발명이 절실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9135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7828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8011
109186 핀란드 영화 <레스트리스>- 죽음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한 사람 [3] 보들이 2019.07.21 1313
109185 Tv에 나만 보이는 영화 가끔영화 2019.07.21 416
109184 인어공주보다 흑기사가 더 흥미로운 이유(Feat 한일 경제전쟁) [3] Isolde 2019.07.20 843
109183 [EBS1 영화] 디스트릭트9, 사랑의 기적 [8] underground 2019.07.20 790
109182 롱샷을 보고.. 라인하르트012 2019.07.20 649
109181 스포일러] The Aftermath 겨자 2019.07.20 594
109180 그와 함께한 저녁식사 [11] 어디로갈까 2019.07.20 1524
109179 프엑 막방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잡담... [1] 안유미 2019.07.19 753
109178 탑건: 매버릭 예고편 [7] 으랏차 2019.07.19 1071
109177 노노재팬과 감동란 [13] eltee 2019.07.19 2099
109176 오늘의 일본 만화잡지(3)(스압) 파워오브스누피커피 2019.07.19 429
109175 이런저런 일기...(생명력, 신비감) [2] 안유미 2019.07.19 660
109174 소공녀- 경제적 압박이 심할때 무엇을 정리할 것인가?(스포주의) [6] 왜냐하면 2019.07.18 1356
109173 참새가 귀여우면서 카리스마 있게 생겼군요 [6] 가끔영화 2019.07.18 967
109172 [EBS1 영화] 집시의 시간 (내일 밤이군요.. ㅠㅠ) [20] underground 2019.07.18 930
109171 배스킨 라빈스 사태에 대해 생각할수록 역겹고 소름끼치네요. [44] 일희일비 2019.07.18 2480
109170 ”더 뮤즈 드가 to 가우디“ 등 다양한 전시회 리뷰, 추천 [8] 산호초2010 2019.07.18 737
109169 쿄애니 방화살인사건 [2] 연등 2019.07.18 1044
109168 크록스 구두 헝겁은 어떻게 닦아야 할까요? [2] 산호초2010 2019.07.18 740
109167 [드라마 바낭] 저도 한번 해봅니다. [11] McGuffin 2019.07.18 115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