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12 23:20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1)를 봤습니다. 짧은 잡담이지만 스포일러 있습니다.
위의 사진처럼 주인공 율리에가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오슬로의 거리를 헤매거나 하늘을 배경으로 숙고에 들어가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인물 입장에 이입하게 하는 장치 역할을 합니다. 오슬로도 예쁘고 주인공도 예쁘니까요.
원제는 '세상에서 최고 나쁜 사람'이죠. 율리에 본인이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인지? 실제로 이기적인 여자를 보여 주려는 의도는 없는지? 저는 후자의 의도도 살짝 느껴졌습니다.
연인이 갈라서게 되는 데는 얼마나 많은 이유가 있겠습니까? 너무 많아서 그냥 연애하다 헤어지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회원분들 경험을 돌이켜 보시면 어떠신지요. 왜 헤어졌는지 이유가 확실하게 기억 나시나요(뜬금없이 죄송) 호감의 성격이 달라질지언정 두 사람이 일생을 좋아하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천운이 아닐까요. 결혼으로 맺어져 그냥 가족이려니, 하고 지내지 않는다면요. 율리에 나이에 자기 존재가 지워지는 것 같고 함께하는 앞날이 안 그려지면 갈라서는 게 맞고 다른 사람이 좋아지는 기회가 오면 다시 관계 맺기에 노력해 보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주인공의 전공 찾기 과정 역시 뭔가 신중함이 부족한 듯 볼 수도 있는데 저는 자연스럽게 봤습니다. 시간과 경제적 여건이 된다면 누군들 시행착오의 과정을 누리며 시도해 보고 싶지 않을까요. 이상적이죠.
이런 부분들에 있어 율리에를 나쁘게 생각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주인공이 잘 대접받지 않은 장면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었습니다.
만화가 애인은 왜 암에 걸리는 설정일까요. 다시 만날 이유로? 대화가 되는 상대와의 즐거움을 율리에가 다시금 깨닫게 하려고? 그리하여 밤새 걷다가 유산하게 되는 장치로 쓰려고?(김신영 형사 톤이 되네요) ...결정적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을 앞에 두고 자신의 원치 않은 임신을 얘기하는 장면에서 눈물을 보입니다. 전남친과 이 문제에 얽힌 회한이 있어서 그랬다고 봐야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연출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었어요.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으로 표현됩니다. 인물의 선택이 과연 나쁜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 인물 정말 나쁘네,가 되어 버린 느낌? 제가 놓친 것이 있거나 확대해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이야기의 구성이 챕터별로 나뉘어서 관계의 단면들을 잘 잘라서 보여주는 특징은 좋았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그런대로 재미있게 봤습니다만 영화제나 평론가들이 그렇게 호평을 할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재가입하고 끄적거린지 오늘로 이 년입니다.
글을 헤아려 보니 이 글까지 108개. 작년과 같아요. 사실 얼마 전에 글 수가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되어서 작년보다 모자르지 않으려고 맞췄습니다.ㅎㅎ. 이러다 108개가 기준이 되려나요.
올해는 더 노안이 오기 전에 책을 좀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듀게에서 소개받는 좋은 영화도 과감하게(선택장애에 고민하는 경향이 있어요)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쓰고 보니 사실 늘 하는 생각이네요.
회원님들 모두 즐겁고 편안한 일상 보내시길 바라며, 이만 총총.
2023.01.13 00:49
2023.01.13 09:11
저는 율리에 보다 오히려 만화가 애인이 숨은 주인공 같은, 감독의 아이덴티티가 녹아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암으로 얼마 못 산다는 설정 속에서도 전 애인의 기를 살리는 대화의 내용도 그렇고, 어쨋든 헤어진 이후에 재등장해서 그렇게 멋진 역할을 하는 것이...
저의 경우에 이 영화는 좋아하기엔 좀 어려운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단기적으로 방학 동안, 장기적으로도 쭈욱 독자로 남을 터이니 도배는 앞으로도 계~속!
2023.01.13 09:32
전 그 만화가가 재등장하는 건 '영원한 이별'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해서 별로 나쁘진 않았는데, 말씀하신 전투적 페미니스트 등장해서 첫 애인을 박해(?)하는 장면은 좀 의아하긴 했습니다. 뭐지? 저게 감독 진심인가? 라는 생각을 했죠. 근데 지금 thoma님 말씀 보니 그 만화가가 감독 본인 캐릭터라고 생각하면 뭔가 그럴싸하긴 하네요. ㅋㅋ
2023.01.13 01:03
저는 감독과 각본가의 의도 자체는 주인공을 이기적인 여자라고 몰아가려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위에 배티님 처럼 원제는 약간 반어법으로 쓰인 것 같기도 하고 아마도 커리어 진로, 연애 모든 면에서 갈팡질팡하는 율리에가 본인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너 아직 괜찮고 충분히 미래도 기대해 볼 수 있어! 이런 응원을 해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thoma님도 은근히 글을 많이 쓰셨네요. 덕분에 이런저런 얘기들 나눌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언급하신 만화가 전남친이 암 걸리고 면회가서 진솔한 대화 나누는 것 까지는 좋은데 굳이 임신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 유산하는 설정 자체는 과했다고 생각했어요. 꼭 성별로 이런 걸 나누고 싶지는 않지만 남자 감독과 남자 각본가가 자기들 나름대로는 여성 주인공 위주의 서사로 열심히 노력해봤는데 어쩔 수 없는 자기 감수성의 한계가 나온다고나 할까요? 환각버섯 먹은 후의 시퀀스는 재치 있었는데 저 만화가 전남친이 라디오 인터뷰 나가서 페미니스트들은 그저 '표현의 자유'를 박해하는 사람들이라는 식으로 몰아가고 영화가 그걸 편드는 것 같은 부분도 별로였고 등등.. 작품 비주얼도 훌륭하고 배우들 연기도 좋아서 괜찮게 보기는 했는데 말이죠.
2023.01.13 09:23
아침에 일어나서 문득 떠올라 필름클럽을 찾아 방금까지 들었어요. 다른 곳에서 듣지 못한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많아 신기함까지 느꼈습니다. 물론 두 사람은 매우 너그러운 포용의 언어를 쓰고 있긴 했지만 저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졌더라고요. 이 영화의 고평가에 의아함까지도 같아서 제가 이상한 것은 아니란 생각도 들었고요. 환경에 대한, 여성주의에 대한 시선에 대해서도 짚어 주더군요. 저는 만화가 양반이 재등장하여 그런 성숙함을 보이는 것도 그렇고...여튼 고평가에 약간의 의문은 남는 영화예요.
2023.01.13 23:58
2023.01.14 10:33
생각해 봐도 호감이 안 생기는 영화예요. 저는 그렇네요..
율리에가 분명히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부분이 있긴 합니다만. 전 그냥 그걸 포함해서 '인생 그런 거지 뭐. 돌이켜 보면 다 아름답다네.' 라는 식의 느낌을 받아서 괜찮았어요. 가만 보면 율리에는 충동적이긴 해도 분명히 똑똑하고 뭣보다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으로 묘사되잖아요. 땡기면 들이대고, 잘 되면 자기도 좋고. 그러다 이건 아니다 싶으면 분명히 끝을 맺고. 결과적으로 곧 죽을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것처럼 됐지만 그게 율리에의 잘못도 아니구요. "당신 참 좋고 사랑하지만 우린 인생의 다른 단계에서 만나 버렸다." 는 대사가 딱 정확했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둘이 잘 맞고 서로 사랑해도 안 될 인연은 안 되는 거고 그럼 얼른 끝맺는 게 상책이죠. 만약 거기에서 율리에가 참고 더 견디려고 했으면 둘은 더 안 좋게 찢어졌을 것 같고...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라는 원제는 살짝 반어적이랄까, 뭐 그런 의도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얼핏 보면 주인공이 남자 둘에게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거. 첫 남자 친구도 결국 율리에의 존재 덕택에 마지막 가는 길이 외롭지 않았던 것 같구요. 두 번째 남자 친구도 율리에랑 바람 피운 덕(...)에 자기랑 안 맞는데 억지로 끌려가던 여자 친구랑 헤어질 용기를 낼 수 있었잖아요.
그리고 이렇게 두 번의 연애를 통해서 단순히 연애가 아니라 사람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는 점에서 참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이거야 뭐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른 거겠죠. ㅋㅋ
자꾸만 듀게가 망한 게시판이라는 분들이 있고 또 뭐 사실 그리 틀린 말도 아닙니다만. 그래도 어떻게든 이 게시판이 더 살아 있었으면 하는 입장에서 제 듀게 도배질에 힘이 되어주는 분들이 있어서 좋습니다. thoma님 글 언제나 잘 읽고 있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