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방황, 허무, 성장 같은 것들에 매료되는 한 시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정서적으로 예민했던 그 시절과 그때 보고 듣고 읽었던 것들은 깊은 각인으로 새겨져, 살다가 어느 날이든 문득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곤 합니다.

 

그렇게 가끔 생각나는 아리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영화 <레스트리스(Restless, 원제 Levottomat)>의 주인공입니다

동명의 다른 영화가 더 알려진 듯한데, 2000년도 핀란드 영화인 <레스트리스>는 당시의 세기말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작품으로, 자국에서 흥행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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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카뮈의 <이방인>을 떠올리게 하는 아리. 영화는 그의 독백으로 시작됩니다.

 

의대생 초년에 나는 내 꿈의 목록을 작성하였다.

여러 명의 아이들, 바닷가의 집, 세계평화, 가족, 의미 있는 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것, 사랑하는 여자, 행복해진다는 것...

그 목록을 작성하고서 여러 해의 시간이 흘렀다.

어떤 꿈은 이루어지기도 하고 안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떤 것은 신경도 안 쓰지만...

내 인생은 공허하다.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다.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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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죽음과 삶의 긴급한 경계를 목도하는 앰뷸런스 의사는, 어쩌면 아리라는 인물에게는 필연적인 직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가족으로는 죽음을 앞둔 채 병원에 누워있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매일 밤 다른 여자와 섹스하고 다니지만 누구에게도 상처 주기 싫어서누구도 사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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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아리에게 어느 날 한 여자, 티나가 나타납니다

밝은 성격으로 적극적으로 구애하며 다가오는 티나에 엉거주춤 이끌려, 아리는 그녀와 그 친구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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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의식으로 시작하는 한여름의 휴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한 무리 청춘들의 빛나는 한 때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긍정이든 부정이든 옳고 그름이든, 어떤 가치판단도 유예한 채 지금을 살아갈 뿐인 아리는, 여자친구의 친구와도 개의치 않고 섹스 합니다

아리 입장에서 정확히는 다가오는 여자를 거부하지 않았을 뿐이죠. 어쩌면 티나에게 그랬던 것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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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아리에게 목회자인 한나 리카와의 만남 또한 필연적이었을지 모릅니다

티나의 친구들 중 한 명인 한나 리카는 아리의 미심쩍음을 눈치 채고, 그에게 정면으로 질문합니다

당신은 인생에 있어서 선이나 진실 같은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싶어요.

하지만 과연 한나 리카는 옳은 길을 갈 수 있을까요? 목회자도 한낱 인간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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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동시에 새 생명은 잉태됩니다.


그리고 아리의 독백과 함께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우리는 혼자이다. 단지 함께 혼자인 것이 좀 더 나을 뿐이다



최근 뉴스를 통해 어떤 이들의 죽음을 접하며 생각했습니다. 우환에 살며 안락에 죽는다고 맹자는 말했다는데, 스스로 선택한 죽음에 실패 없이 도달한 이에게는 노래를 불러 주어야 할까.

하지만 선택했든 아니든, 대부분은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 괴로움은 유전자의 명령일까, 의식의 그것일까.

 

사유적인 언어로 포장하지만 실은 인간이란 단순하다는 것이 진실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선택하게 하는 방아쇠는 작은 치통이나 10mg의 호르몬일 수도 있고, 잠자리에서 등을 맞댄 고양이 한 마리의 온기가 다시 사람을 살게 하는 구원이 될 때도 있습니다. 얼마간의 의식주가 해결되면, 대부분은 행복하게 살아갈 지도 모릅니다. 신이 아직 죽지 않아 인간의 자유의지를 신탁통치 해주던 시절이, 실은 인간들에게는 태평성대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자신의 죽음은 이제는 담담하고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것이 되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아리도 이제는 중년의 남자가 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잘 지내고 있을지.. 가끔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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