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일들 7

2019.06.09 17:45

어디로갈까 조회 수:2796

5월 마지막 날, 회사에서 가벼운 사고가 있었습니다. 인턴 사원이 실수로 커피팟의 끓는 물을 제 발등에 쏟아서 화상을 입었어요. 금방 큰 물집이 부풀어 올라서 조기 퇴근하고 피부과 진료를 받았죠. 처음 겪는 사고라 처음엔 좀 당황했으나, 의느님의 바늘 한 방으로 물집이 꺼지고 나니 뭐 별일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사흘 통원 치료 후 화상용 거즈와 붕대, 항생제 복용으로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는 중이에요. 불편한 건 샤워할 때 기기묘묘한 요가 자세를 취해야 하는 점, 새벽 산책을 할 수 없다는 것, 운전을 못 한다는 것 정도고 통증은 끝난 터라 견딜 만합니다.
다음 주 정도면 거의 회복될 거고, 몇년 후면 흉터도 남지 않을 거예요. 혹시 남는다 해도 발등이니 I don't care!

사고 당일, 인상 깊었던 건 그 인턴이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그는 다만 어둔 얼굴을 했을 뿐 우발적인 사고에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건 타이밍이 불러온 사고였지 그가 덤터기를 쓸 잘못이 아니었어요. 탕비실에서 제가 텀블러를 세척하는 동안 그가 끓는 커피팟을 싱크대 테이블에 올려놓다가 삐끗해서 떨어진 게 하필 제 발등이었던 것. 저나 그나 운수 나쁜 날이었을 뿐 그가 큰 죄책감을 가질 일은 아닌 거죠. 
이튿날(토요일),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 그가 전화했습니다. 담담하게 화상 상태를 묻더니, 걱정할 만큼은 아니라고 답하자 월요일부터 출퇴근을 자기가 모시겠노라며 주소를 알려 달라더군요. 

- 택시라는 합리적인 대체제가 있는데 왜요? 
" 그러니까 운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다치신 건 맞군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 (어라?) 붕대 감은 상태라 조심하는 거지 심각하지 않아요. 택시 타면 돼요. 바로 이웃에 산대도 난 친하지 않은 사람과는 단둘이 카풀 안해용~ ㅋㅎ

월요일 출근하니, 어마무시하게 붕대가 감긴 발목 -의느님의 과대보호- 를 그가 보더니 자기가 보상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더군요. 하여, 정 마음이 쓰이면 병원 진료비를 지불하고(만오천원 정도.) 붕대 풀 때까지 매일 내 단골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사서 배달해 달라, 요구했습니다. 그 대답 뒤에 나온 그의 반발이 정말 놀라웠어요.
"**님은 자신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죠?"
- (3초 간 얼음땡!)
"미안한 사람의 마음을 받아주는 것보다 **님의 원칙이 우선이고 더 중요하신 거죠?"
- (또 3초간 얼음땡~) 내 판단과 진심을 이해하든 못하든 그건 xx씨 몫이에요. 나는 지금 제시한 것 이상 허용하지 않을 거니 수용해줘요. 그러는 게  서로 스트레스 덜 받는 길입니다.
그리고 지난 한 주, 그는 하루 두 번 커피를 사와 말없이 제게 건넸을 뿐, 달리 저를 신경쓰거나 눈치 보지 않았습니다.

오늘 오전 10시 경, 배달이라며 현관 인터폰이 울렸어요. 뭘 주문한 게 없어서 물어봤더니, 제 이름과 주소를 확인하곤 가구 매장에서 왔다며 들어와 설치해야 한다더군요. 내려가봤죠. 택배업체가 아니라 강남 모 수입가구 매장에서 보낸 배달이었어요. 자신들은 배달만 할 뿐, 전후사정이 어떻든 다시 싣고 갈 수는 없다고 해서 어영부영 들여놓게 됐습니다.
물건은 라운지 체어였어요. '문재인 명품 의자'로 시끄러웠던 허먼 밀러 사 제품. 주위에 이런 고가의 제품을 제게 선물할 재력가는 아버지밖에 없는데, 아버지는 이런 과소비를 하는 분도 아닐 뿐더러 사전 알림 한마디가 없었을 리가 없어 머리를 쥐어짰죠. 그때  띠링~ 문자가 도착했어요. 그 인턴이었습니다.
"부모님과 피해보상  문제를 상의하다가 죄송함을 이렇게 전하기로 했습니다. 받아주세요. 엄마가 운영하는 매장 물건이니 부담갖지 말고 받아주세요."
(암전 - 이런 도발을 하다니!)
(암전- 맹랑하기 짝이 없네.)
(암전 - 내 주소는 어떻게 알았지?)

통화를 할까 하다가 저도 메모로 통보했습니다.
- 마음만 받겠습니다. 좁은 공간이라 등에 지고 있어야 하는 사정이니, 수거해 가주세요.
- 회수해가지 않으면, 지역 생활 폐기물 업체에 신고하고 아파트 마당에 내놓을 겁니다.
- 수거 비용이 2~3만원일 텐데 그건 청구할게요.

여태 그는 묵묵부답이네요.
Gift. 영어로는 선물이라는 뜻이지만 독일어로는 '독(약)'입니다. 예외로는 Mitgift가 '함께 주는 독'이 아니라 돈과 선물을 의미하며 지참금/혼수라는 뜻입니다.
(잠깐만~ 퀴즈.) 그가 보낸 건 선물일까요, 독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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