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의 풍경

2019.09.15 18:32

Sonny 조회 수:1056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저희 집과 할머니집을 오가며 간간이 섞여나왔던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평온한 가족이란 단어는 판타지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대단한 불화도 아니고 데시벨 높은 언성을 들은 측에서 충분히 납득하고 넘어갔지만, 그럼에도 조금 어색하긴 했습니다. 왜 저렇게 짜증을 낼까. 왜 저렇게 짜증을 긁을까. 피 한방울 안 섞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별로 겪을 일 없는 스트레스이고 훨씬 더 교양있게(가식적으로) 처리되는데, 가족 사이에서는 더 격하고 직접적으로 해결이 되곤 합니다. 가족의 편안함이란 고민없이 짜증을 지를 수 있는 특권인 걸까요.

일단 제가 엄마한테 짜증을 냈다는 걸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 엄마는 다 좋은데 특유의 자기긍정고집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뭔가를 원하면 그 원하는 대로 저나 다른 가족의 반응을 미리 편집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소통에 굉장한 난맥이 생기곤 합니다. 평소에는 귀여운 해프닝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일평생 단 한번도 매생이죽을 먹어본 적이 없고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저희 엄마는 매생이죽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저와 같이 먹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고, 현실을 왜곡해버립니다.

"쏘니야, 너 매생이죽 좋아했잖아? 왜 갑자기 안먹는다는 거니...? ⊙.⊙"

이러면서 식탁에서 계속 매생이죽을 권하면 권유받는 저는 계속 진실을 밝히면서 거절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엄마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보면 좀... 열받습니다. 그냥 기가 막히고 말 일인데 이런 결정들이 사소한 데서 계속 발생하니까 제가 해명부터 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의사소통의 실패는 고스란히 제 책임이 될 때가 많구요...

이번 추석에는 엄마의 자기중심적 착오가 더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저한테 제육볶음을 먹을 건지 잡채를 먹을 건지 엄마가 물어봅니다. 그런 전 제육볶음이 먹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 다음 어떤 요리가 나왔을지는 아시겠죠... 그리고 저의 질문에 저희 엄마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너가 제육볶음보다는 잡채 먹자면서?" 차라리 그냥 당신의 뜻을 우선했다면 모르겠는데, 그게 갑자기 저의 선택이 되고 대사로 낭독되면 사람이 환장하게 됩니다... 내가 언제? 이건 먹고 싶은 걸 먹냐 못먹냐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 안있어 진실왜곡은 다시 터졌습니다. 어떤 한과를 두고 이게 유과냐 약과냐 하는 언쟁이 저와 엄마 사이에 불이 붙었고, 엄마는 호기롭게 외쳤습니다. 십만원 내기 하자 십만원! 타짜의 고니를 방불케 하는 그 자신감에 저는 아귀처럼 달라들었다가는 손모가지가 날아갈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아 무슨 십만원씩이나.... 식품 쪽에 종사하는 제 동생이 남편과 함께 저희집에 뒤늦게 오자 저희 엄마는 네 오빠가 뭣도 모르면서 헛소리를 한다~~ 하고 동생신문고를 둥둥 울려댔습니다. 이게 약과냐 유과냐??? 제 동생이 정마담처럼 저를 보면서 말하더군요. 오빠 이건 약과야... 그러자 저희 엄마가 또 합의된 적 없는 승전보를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10만원 내놔라~~ 10만원!! 아까 내기했잖아 10만원 내놔!!!"

저는 졸지에 10만원 내기를 한 사람이 되어서 꼼짝없이 돈을 뜯길 판이었습니다. 약과도 모르는 인간이 되서 짜증나는데, 이제 참여하지도 않은 내기로 쌩돈을 날릴 판이라서 더 짜증이 나더군요.

"내기 안했잖아!! 내기 안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옆에서 보면 영락없이 제가 내기약속을 무르면서 ㅌㅌ를 시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걸 의식하니까 저도 괜히 움츠러들고 그걸 또 극복하려고 승질머리를 동원하게 됩니다.

앞으로는 그냥 엄마에게 문자를 보낼 생각입니다. 기록을 남겨야 다른 소리가 안나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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