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명하기 게임, 인간의 본성

2019.08.10 15:25

타락씨 조회 수:1413

동네 아이들이 골목에서 노는 소리를 좋아합니다.
가끔 가만히 듣다보면 '인간의 본성'이라거나 '사회'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죠.
내가 배워야 할 모든 것들은 유치원에서 배웠다거나 하는 책처럼(읽어보진 않았습니다만..;;;) 사회적 발달은 이미 그 시기에 완성에 가까워지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인생.. 의미.. 무엇..)

오늘은 너댓살 먹은 여자아이가 name calling으로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을 들었어요.
자기보다 두어살 많은 남자아이를 '똥파리'라 부르는 것으로 집단내 권력의 양상을 바꿔놓는 것이었죠.

---
대개 같이 놀곤 하는 아이들은 4명이 기본팩, 여기에 확장팩으로 아이들이 추가되거나 빠지곤 합니다.

기본팩을 구성하는 아이들을 나이순으로 정리하면 '- 여아a < 남아a < 여아b < 남아b +' 정도인 것 같습니다. 가장 큰 아이와 가장 어린 아이의 나이차는 너댓살 정도?
(호칭과 음성으로 짐작할 뿐이라 정확하진 않습니다.)
통상 팩의 우두머리 노릇, '놀이의 종류'나 '규칙'을 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남아b입니다.
각각 남아b는 대체로 공정한 편, 여아b는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고, 남아a는 남아b에 충성심이 강하고..
여아a는.. 재미있는 아이죠. 이 중에서 혼자만 미취학 연령인 것 같구요.

오늘은 뭐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여아a가 남아b에게 선언합니다. '이제부터 오빠를 똥파리라 부를거야'
남아b와 여아b는 이에 특별히 코멘트하지 않지만, (아마 이런 호명이 유치하다고 느껴서겠죠)
남아a는 여아a의 선언을 비웃습니다. (여기서 '호칭은 사회적으로 공인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남아a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서열이 위라 여겨지는 남아b와 여아b가 이를 묵과하면서, 상황은 여아a가 바라는대로 흐르죠.

호칭의 사회성에 대해 남아a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여아a는, 자신의 선언을 철회할 의사가 없고..
자기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한 구체적 실천을 즉시, 충실히, 그리고 꾸준히 이행합니다.
'똥파리 오빠, 블라블라', '똥파리! 똥파리! 똥파리!'..

처음엔 그저 무시로 일관하던 남아b도 이 상황이 지속되자 견디지 못하고 '내가 왜 똥파리인가?'를 묻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여아a의 답은 '내가 그렇게 부르기로 했기 때문'이죠. 흠 잡을데 없는 완벽한 답입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해 폭넓은 관용적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일까요, 남아b는 뭐라 대꾸하지 못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봤는데, 사실 저도 뭐라 해야할지 모르겠더란..)

그냥 바보같고 유치할 뿐이던 '똥파리'는 이제 모욕적이고 구체적인 위협으로 작용합니다. 호칭과 그 배후의 합리성, 상호존중에 관한 사회적 합의는 파기됐습니다.
암묵적으로 전제된 것으로 여기던 무엇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견과 함께 팩의 우두머리인 남아b의 권위도 위협받습니다.

'똥파리' 호명의 괴벨스적 훌륭함은 그 미묘함에 있습니다. 일단 사실 여부를 논할 여지가 없이 간결하고, 어딘가 모욕적인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그보다는 바보같고 유치하다는 느낌이 크기 때문에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일도 바보처럼 느껴지죠.
그 미묘함으로 인해 제재받지 않으면서, '똥파리'는 구체적인 작용을 획득합니다.
그게 뭐가됐건, 상대가 원치않는 이름으로 호명한다는 그 단순한 사실, 상대의 의사에 반하는 호명을 관철시킬 수 있다는 것 만으로 권력이 됨과 동시에
이를 각인시킬 수 있죠. 미묘하게 모욕적이라면 더 효과적일테고.

'개새끼는 통하지 않지만, 똥파리는 통한다'는 걸 여아a는 어떻게 안 것일까?
결국 오래지 않아, 남아b는 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똥파리라 부르는 일을 그만둘 것인가?'

남아b가 이 상황을 타개할 간단한 해법들이 몇가지 있죠.
기존의 권력관계를 이용해서 여아a를 제재해도 되겠고, 같은 방식으로 멸칭을 쓰는 것으로 보복할 수도 있겠죠.
물리적인 억지력을 행사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해법들은 권위의 정당성를 손상시킬 위험도 있거니와, 그보다 남아b 자신에게 유치하고 부당한 것으로 여겨져 채택되지 않았겠죠.
결국 놀이의 규칙은 여아a가 원하는대로 수정되었으며, 아이들은 '똥파리 없는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
'똥파리 없는 상태'가 '똥파리 이전의 상태'와 같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새로운 놀이의 규칙이 모두가 동의할 만한 최선의 것이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경험으로 여아a와 남아b는, 아니 모두가, 뭔가를 배웠겠죠. 오, 다가올 미래의 세대여..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4383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3670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4118
109693 끝나지 않은 BBK? 김경준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 법원에 나오라” 그외 이런저런 이야기들. [2] chobo 2011.01.12 2020
109692 겨울철 얼굴 각질제거.. [12] 시실리아 2011.01.12 4396
109691 "가정"이란 과목이름을 영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요? [10] 카블 2011.01.12 6368
109690 [정훈이 만화] 라스트 갓파더 [6] reading 2011.01.12 2902
109689 듀게에서 예언했던 "바야바 패션"이 등장했습니다!!! [16] bap 2011.01.12 4765
109688 와, 메신저해킹이 무섭긴 무섭군요 [6] 메피스토 2011.01.12 3073
109687 예전에 한국인이 사랑하는 영화 베스트 방영하던거 기억하세요? [7] 우디 2011.01.12 1896
109686 여러 가지...2 [6] DJUNA 2011.01.12 3216
109685 [바낭] 컴퓨터 관련 콘센트 몇구나 차지하고 계세요? [5] 빠삐용 2011.01.12 1603
109684 맛집 프로 '식신로드' 보시는 분 있나요? [8] 자본주의의돼지 2011.01.12 3334
109683 스팸전화 역관광(미국 버전) [2] 01410 2011.01.12 2181
109682 아..이정현.. [17] 주근깨 2011.01.12 16383
109681 가요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팝송인 노래 [15] Apfel 2011.01.12 3486
109680 정성일의 2010 베스트 영화 10 [2] 매카트니 2011.01.12 4165
109679 안젤리나 졸리 마약복용으로 실신 [8] 사과식초 2011.01.12 5816
109678 러브레터와 8월의 크리스마스 [4] 프루비던스 2011.01.12 1989
109677 Scrambled eggs - Words by Paul McCartney(?) [1] 조나단 2011.01.12 1207
109676 4주만에 만든 오케스트라 가끔영화 2011.01.12 1095
109675 (바낭) 백수됐어요 [6] 사람 2011.01.12 2669
109674 브리트니 스피어스 신곡 [8] mii 2011.01.12 225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