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10 13:28
안좋아할 게 뻔한데도 추천하고 싶은 영화는 또 오랜만이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의 초반 30분은 불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기차를 타고 몇박 몇일을 가야하는데 그 좁은 칸 안에 탄 남자가 러시아 양아치입니다. 아무 허락도 없이 술냄새를 풍기면서 보드카를 들이키더니 좀 있다가 취해서 음담패설에 별 헛소리를 다 늘어놓습니다. 관심을 끊고 혼자 있으려고 하면 쫓아와서 계속 말을 겁니다. 귀찮아서 대답을 해주면 그게 뭐야...? 라면서 무례한 대답을 합니다. 주인공은 정말 재수 옴 붙은 날이죠. 안그래도 우울해 죽겠는데. 저렇게 가까이에서 같은 방을 써야하는 남자는 스트레스의 화신처럼 계속 시비를 걸어댑니다.
영화는 기차 안의 주인공을 이 거북한 관계로 계속 고문하지는 않습니다. 이들이 지나치는 러시아의 어떤 사람들과 광경들은 고역같은 시간을 풀어줍니다. 이들의 관계도 계속해서 꽁초 투성이인 재떨이같지만은 않습니다. 그렇지만 관객은 이들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기차 여행에서 여자 남자가 엮이는 이야기라면 다들 [비포 선라이즈]를 떠올리겠지만 이 영화는 그런 감성적 멜로물이 아닙니다. 기차 여행을 다루는 영화라면 당연하게도 기차의 창 바깥 풍경을 보여줘야하는데 영화는 그런 장면을 아예 찍지를 않습니다. 아마 의례 기대할 법한 로맨틱한 장면들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이 둘이 함께 겪은 시간이 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 영화가 21세기 영화라고 하더군요. 영화조차도 자기가 찍고 있는 인물들의 속내를 알 수가 없다고요.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애프터썬]과도 비슷하다고 하는데 저 역시도 공감합니다.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인가? 남자는 여자에게 왜 그랬는가? 여자는 남자에게 왜 그랬는가? 정확한 답은 얻을 수 없을 겁니다. 영화도 그걸 모른 채로 찍고 있으니까요. 영화의 비밀에서 영영 소외된 채로 관객이 남겨지는 것이 요즘 영화의 새로운 트렌드일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그 비밀이 그 자체로 신비하다는 것입니다.
2023.03.10 15:19
2023.03.10 16:08
2023.03.10 16:54
첨부하신 스틸샷만 봐도 여주인공 표정이 ㅋㅋㅋ 남자가 그렇게 불쾌한데도 둘이 뭔가 관계형성이 되고 그런 모양인데 궁금증이 생기네요. 작품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좋던데 정성일이 생각하는 21세기 영화라 그건 또 뭔 느낌일지요 ㅋ
2023.03.10 17:19
2023.03.11 12:54
애프터썬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하셨는데 저는 왠지 이 영화는 좋게 볼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근거는...없어요. ㅎㅎ 나중에 보면 알겠지요.
영화의 불친절함이나 알 수 없음의 여지를 많이 두는 것이 트랜드일지도 모른다,는 쓰신 글의 마지막 부분은 아마도 요즘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인터넷 이런저런 통로로 나름의 해석과 나름의 감상을 엄청 올리기 땜에 그런 여백을 더 많이 두는가 생각하게 되네요. 알아서 놀아보든가 해석해 보셈? 독서계에도 독자보다 쓰는 이가 더 많을 판이라는 걸 들었는데 영화도 비슷한가 생각해 봅니다.ㅎ
2023.03.11 23:54
말씀하신 것처럼 어쩌면 해석의 권위가 각 개인들에게 더 다양하게 퍼져나가는 만큼 그런 해석을 다 무효화시키는 수수께끼들이 영화에서 더 중요해질지도 모르죠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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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 순간을 가감 없이 포착해서 보여주는 형식'의 영화인 모양이군요. ㅋㅋ 이런 영화가 잘 걸리면(?) 뭔지 모르겠지만 재밌는데 역시 뭔지는 모르겠고 그렇죠. 기억해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