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얼마 전에 본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공연에 앞서 디카와 핸드폰을 꺼 달라는 영어 안내 방송에서 '디지를'과 '모바일'의 발음이 살짝 재밌더군요.

미국 영어에 특유한 모음 사이 /t/의 탄설음과 영국 영어에 특유한 -ile의 [ail] 발음이 합쳐진 묘하지만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었죠.

미국 영어 위주로 교육 /t/는 탄설음이 되면서도 외래어로 들어온 mobile이 한국어에서는 영국 영어에 바탕을 둔 '모바일'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죠.

물론 이게 무슨 바로잡을 대단한 오류씩이나 되는 건 아니며 안내인의 영어 발음은 매우 깔끔하고 훌륭했습니다.


사실 딱히 영어를 말할 일은 거의 없지만 왠지 괜히 혀를 쓸데없이 굴리는 것 같아 모음 사이의 /t/는 탄설음을 억지로 고치려고도 하는데

미국 영어로 교육 받아서 그런지 잘 안 되더군요. 뭐 그러려니 해야죠.

다만 inter- 따위의 /t/는 [t]로 발음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극중에 나오는 Richard라는 인물은 사실 원작이 불어니까 리샤르라고 발음해야 되지만 뮤지컬은 영어에 바탕을 둬서 그런진 몰라도 리처드라고 하던데

아무튼 배우가 영어 [r] 소리를 내던 게 미국 영화나 드라마의 독일어 더빙에서 들은 영어 [r] 발음의 낯선 느낌과도 비슷했습니다.

독일어와 덴마크어 등 주로 게르만어권 일부 유럽 언어는 영어 고유명사나 최근에 들어온 영어 외래어에서 영어 식 [r] 발음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말을 할 때도 [f]를 발음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듯한데 모든 외래어에서 다 그러지도 않고 [p]를 [f]로 틀리기도 하니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죠.


2.

한국어는 표준 발음이 고유어와 한자어는 있으나 외래어는 없어서 예컨대 영어 유성 파열음은 예사소리 ㄱㄷㅂ 및 된소리 ㄲㄸㅃ 사이에서 변이를 보이죠.

물론 대개 예전에 들어온 말일수록 된소리로 발음하듯이 일정한 경향은 있지만 최근에는 방송 언어를 중심으로 된소리 대신 예사소리를 내데요.

다시 말해 철자에 발음을 맞추는 것인데 이를테면 '뻐쓰'가 아니라 '버쓰'로 발음하는 것이죠.

간단히 말해 어두에서 무성 무기음인 영어 유성 파열음은 한국어 된소리와 음성학적으로, 예사소리와는 음운론적으로 가깝다고 보면 됩니다.


하지만 마찰음 ㅅ은 좀 더 복잡한데 일단 사이다, 소다, 소켓, 시럽, 시소처럼 예전에 들어온 말일수록 예사소리로 발음하는 편입니다.

아마 일본어를 거쳐서 들어와 예사소리로 발음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일본어 어두의 /s/는 한국어 /ㅅ/과 거의 같음)

'스'로 시작하는 말도 예사소리인 것은 음성학적 이유가 있는데 st, sk 따위로 시작하는 말의 [s]는 s+모음의 경우보다 지속 시간이 짧습니다.

그래서 스타일, 스키 따위는 예사소리 '스'로 소리가 나는 반면 어말 /s/는 지속시간이 더 길고 한국어 음운의 특징상 모음이 붙으니 된소리 '쓰'로 발음하죠.


어쨌든 어두에서 'ㅅ+ㅡ 이외 모음'인 외래어는 예외적인 사례 말고는 대부분 /ㅆ/ 발음을 하지만 어중은 좀 변이가 많습니다.

'센세이션' 같은 말은 대개 '쎈세이션'으로 발음하는데 일단 '션'으로 끝나는 말 가운데 패쎤, 쿠쎤으로 발음하는 말들 말고

이중 모음이 앞서는 -ation 계열인 내레이션, 애니메이션, 커뮤니케이션 따위는 주로 /ㅅ/이니까 그렇다고 볼 수도 있으나 두 번째 'ㅅ' 발음은 설명이 안 됩니다.

스폰서, 아나운서 처럼 /ㅅ/ 발음인 것도 있으나 프리랜서처럼 /ㅆ/ 발음인 것도 있으니 딱히 법칙을 만들기도 아리송하죠.


아무튼 뉴스 동영상 검색을 하다 보니 '콘센트'의 발음에 약간 남녀 차이가 있던 게 발견되더군요.

여자 아나운서, 기자 여덟 명은 [콘쎈트], 기자 두 명은 [콘센트]

남자 아나운서, 기자 여섯 명과 시민 두 명은 [콘센트], 기자 두 명은 [콘쎈트]로 발음하는 것으로 나타나

남자는 [콘센트], 여자는 [콘쎈트]의 빈도가 높았습니다.


사실 콘센트는 콩글리시고 정확히 말하면 일제 영어라서 아마 전에는 '콘센트'가 훨씬 더 우세했을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남자가 많이 다루는 물건이다 보니 '콘센트'가 남자쪽에서 더 많이 나타났다고 볼 수도 있겠죠.

그러다가 영어 발음의 영향이 더 커지면서 '콘쎈트'라는 발음이 늘어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무작위로 뉴스 동영상을 고른 것이긴 해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진행한 조사는 아니기에

성인의 경우 콘센트의 발음에서 남녀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고 확실히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나름대로 흥미로운 관찰 결과였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4908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4239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4677
124314 디플에 꽤 재밌는 신작영화가 올라왔네요. [15] LadyBird 2023.09.24 939
124313 로키 시즌 2 티저 예고편(10월 6일 공개) 상수 2023.09.23 168
124312 잡담 - 당근마켓에서 당근, 로켓배송보다 더 빠른 배송, 어른의 태도 - 중년의 태도, (추가) 남이 틀린만큼 나도 틀렸다는 걸 알았을때 [5] 상수 2023.09.23 310
124311 가렛 애드워즈의 오리지널SF 블록버스터 크리에이터를 보고(스포 좀 있음) [2] 상수 2023.09.23 268
124310 오늘 알게된 힘빠질 때 들으면 힘나는 신인걸그룹 노래 하이키(H1-KEY) - 불빛을 꺼뜨리지마 상수 2023.09.23 126
124309 디플 - 무빙 다 봤어요. 노스포 [3] theforce 2023.09.23 495
124308 프레임드 #561 [4] Lunagazer 2023.09.23 109
124307 전자책 단말기 크레마 모티프 샀습니다 [7] 2023.09.23 432
124306 [더쿠펌] 돌판 문화를 스포츠판에 가져와서 빡쳐버린 스포츠 팬들 daviddain 2023.09.23 409
124305 유행어의 어원 - "상남자"의 사례 [15] Sonny 2023.09.23 547
124304 디즈니플러스 [12] thoma 2023.09.23 443
124303 [티빙바낭] (더) 옛날 옛적 할리우드는... '바빌론' 잡담입니다 [9] 로이배티 2023.09.22 367
124302 송과체 독서 꿈 catgotmy 2023.09.22 107
124301 바낭 - 하루에 한 두번씩, 현재와 미래의 죽음을 생각한다 상수 2023.09.22 147
124300 프레임드 #560 [2] Lunagazer 2023.09.22 70
124299 일본인 케이팝 아이돌 XG를 보며 - 케이팝이란 무엇인가? [4] Sonny 2023.09.22 492
124298 시대극에서 언어 고증을 놓쳤을때('국가부도의 날'을 보고) [27] 하마사탕 2023.09.22 693
124297 고윤정이 로코 영화 찍으면 좋겠네요 catgotmy 2023.09.21 286
124296 [왓챠바낭]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 잡담입니다 [17] 로이배티 2023.09.21 544
124295 프레임드 #559 [4] Lunagazer 2023.09.21 108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