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09 17:10
- 2011년이 벌써 12년 전입니다 여러분. ㅋㅋ 런닝타임은 2시간 1분. 장르는 스릴러/드라마 정도 되구요. 스포일러 없구요.
('셸터'가 맞겠지만 수입사가 '쉘'이라고 적었으니 그냥 '쉘터'인 겁니다.)
- 마이클 섀넌과 제시카 차스테인이 부부로 나오네요. 어린 딸을 하나 두고 단란하게 잘 살고 있어요. 비록 딸이 사고로 청력을 잃은 모양이지만 수술을 통해 회복될 가능성이 보여서 백방으로 알아보는 중이고 어쨌든 부부 관계는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마이클 섀넌에게 이상한 징조들이 보이기 시작해요. 괴상하고 불길한 모양의 구름들, 생전 본 적이 없는 대형으로 떼를 지어 날아가는 새들. 뭔가 찜찜하지만 그래도 그냥 대충 사는데, 이젠 밤마다 너무 리얼하고 생생한 악몽들을 꾸기 시작하구요. 그러다 문득 이 양반에게 '대피소를 지어야 한다'라는 몹시도 모세스런 생각이 들이닥치는데, 한 번 그걸 생각하기 시작하니 스스로를 말릴 수가 없고 멈출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이 양반에겐 가족, 직장, 지역 사회 커뮤니티 등등 거의 모든 방면에서 갈등과 압박이 몰아닥치기 시작하고. 그래서 맘이 힘들어질 수록 더욱 더 강해지는 대피소 생각. 과연 이 양반에게 찾아 온 계시는 정말 계시일까요. 아님 그냥 심플하게 미쳐 버린 걸까요.
(보기 드물게 참 다정하고 따스하며 행복한 가정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만.)
- 사실 이 또한 은근히 흔한 서브 장르입니다. 자기가 예언을 보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주변 사람들에게 미친 놈 취급 받고 오만가지 압력과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계속 본인 길에 매진하는 이야기요. 다만 여기에서 살짝 비틀기가 들어가는데, 우리 섀넌씨의 주인공은 그냥 자기가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ㅋㅋㅋㅋ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요. 가족력이 있거든요. 게다가 본인의 성격 자체가 그런 신비롭고 환상적인 것들을 믿지 않는 사람이구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가 없고 참을 수가 없고 멈출 수가 없으니 환장하겠는 거죠. 어쨌거나 결론은 모 아니면 도로 정해진 이야기인데, 이런 소소한 비틀기가 이런 이야기에 익숙한 사람들 조차도 결말을 확신 못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더라구요.
(어익후 이게 뭐여... 라며 불행의 시작이.)
- 덧붙여서 이 영화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이게 정말로 진지한 드라마라는 겁니다. 남편 뿐만 아니라 제시카 차스테인의 아내 캐릭터도 굉장히 공들여 빚어진 캐릭터인데, 역시나 이 분 또한 클리셰를 빗겨가요. 당연히 남편의 집착증과 헛짓들을 안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미쳐 날뛰는 동안에도 변치 않는 남편의 가족 사랑을 느끼며 끝까지 남편을 포기하지 않고 곁에서 돌봐줘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당연히 갈등은 어엄청나게 하기 때문에 이 둘의 난감한 드라마는 의외로 흡인력이 아주 큽니다. 덕택에 클라이막스에서 전해지는 서스펜스도 극대화 되구요.
특히 막판 그 '쉘터' 안에서 둘이 연출해내는 장면은 참 걸작이었습니다. 스릴러의 긴장감과 압박감이 넘쳐 흐르는 가운데 동시에 애틋하고 애절하고 막 그래요.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참 멋지게 잘 만든 영화로소이다... 라고 주장할 수 있겠다 싶을 정도.
(좀 이상한 얘기지만 마이클 섀넌이 백인이라면 제시카 차스테인은 배액인... 좀 이런 느낌입니다. ㅋㅋ 어쩜 이렇게 생기셨는지.)
- 다만 처음부터 막 '우왕 재밌다!!!' 라고 느끼는 종류의 영화는 또 아닙니다. 주인공에게 처음으로 그 환상과 악몽이 찾아오고, 거기에 일상의 압박이 겹치면서 주인공이 서서히 맛이 가는 과정을 정말 차분하고 진중하게 보여주거든요. 런닝타임 2시간 오버는 그 결과물이구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불안, 압박, 스트레스가 정말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보기가 참 피곤합니다. ㅋㅋ 못 만들어서가 아니라 잘 만들어서 스트레스 받게 되는 영화에요. 막판 20여분으로 충분히 보상 받긴 합니다만. 암튼 가볍게 한 번 슥~ 봐 넘길 수 있는 성격의 영화는 아니고. 또 재밌게 잘 보고도 두 번 보고 싶어지진 않는 영화이기도 하네요. 제게는 그랬습니다.
(생각해보면 주인공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다짜고짜 "아, 저는 정신병인데요. 아직 중증은 아니고 5단계 중 2단계 정도?" 이러는 영화는 난생 처음이었던 듯. ㅋㅋ)
- 또 한 가지 영화의 특징이라면 주인공의 환상 장면들입니다. 예고 없이 진행되기 때문에 처음엔 '아, 환상이었어?'하고 좀 놀라는데. 패턴이 있기 때문에 (암튼 뭔가 극적인 사건이 벌어지면 다 환상입니다 ㅋㅋ) 나중엔 환상 파트가 시작되면 바로 눈치를 채게 되거든요. 근데 그 장면들 자체가 참 잘 연출되어 있어서 자극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근데 이걸 뭐라 설명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막 참신하고 창의적인 호러씬들이 나오는 건 아니거든요. 오히려 되게 뻔한데, 그 뻔한 걸 되게 연출을 잘 해놨습니다. 음악, 음향, 편집. 그리고 어디까지 보여주고 어디부터 안 보여줄지... 등등 '기본기'를 갖고 사람을 긴장시키고 놀래키는데 그걸 되게 잘 하더라구요. 감독이 뉘신지 찾아보니 제프 니콜스. 전 몰랐던 분인데 세상엔 참 능력자도 많구나 싶었구요.
(진짜 별 거 아닌 장면들인데 긴장되고 무섭고 인상적입니다. 이런 게 연출자의 타고난 감각 같은 거겠죠.)
- 당연히 두 배우가 아주 강력하게 캐리를 해 주십니다. 아내 역의 제시카 차스테인님께서 '걍 흔한 착한 아내 #10235' 일 수 있었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아주 공감하면서 동시에 응원할 수 있는 인물로 잘 살려주시고 또 마이클 섀넌이 연기하는 미쳐가는 착한 남자의 캐릭터를 더 강력하게 잘 살려주십니다만. 어쨌거나 원탑 주인공은 마이클 섀넌이고 그래서 이 영화는 마이클 섀넌 겁니다. 특유의 무뚝뚝하지만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덤덤하게 이야기를 쭉 이끌어가다가 막판에 감정을 팡팡 터뜨리는데, 그게 터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정말 압도적이에요. 위에서 언급한 쉘터 장면도 대단했고, 그 조금 전에 나오는 식당 난동 장면은 뭐 '올해의 베스트 연기 장면' 같은 걸 꼽았다면 반드시 넣어줬을만한 명장면이었네요.
덧붙여서 영화가 이 배우를 잘 써먹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특히 덩치 측면에서... ㅋㅋㅋ 찾아보니 이 분 키가 190이 넘더라구요. 막판에 이 분 정신이 극도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벌어지는 몇몇 위기 상황에서 이 덩치를 활용해서 아주 위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게 몇 번 있는데 아주 효과적으로 먹혔습니다.
(거의 영화 내내 이런 톤으로 일관하며 묵묵히 감정 적립하다가 막판에 빵! 폭발하는 게 정말 대단했습니다.)
- 그래서 뭘 어쩌자는 이야긴데? 라고 묻는다면 뭐 뻔한 답이 있겠죠. 가장 쉬운 해석은 당시 미국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게 있겠고. (리만 브라더스 사태가 미국을 휩쓴 여파가 남아 있던 시절이기도 하니까요) 그냥 사는 게 빡센 서민들이 늘 갖고 사는 가족, 직장, 지역 생활에서의 불안감을 극대화해서 묘사했다는 식으로 좀 더 보편적으로 말할 수도 있겠구요. 근데 굳이 이런 식으로 의미를 찾고 해석하는 걸 관두고 그냥 장르물로 본다고 해도 어쨌든 강렬하고 여운이 남는 작품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을 거라고 느꼈습니다. 걍 잘 만든 영화에요.
(뭣보다도 결국 가족에 대한 영화죠. 미국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 마무리를 하자면...
어쩌다 보니 나름 꽤 극찬을 하는 중인데요. ㅋㅋㅋ 하지만 절대 잊지 말아야할 것이, 한 시간 반 정도 동안 느긋한 템포로 불안과 스트레스를 차곡차곡 쌓아 올려가는 영화라는 겁니다. 이 동안이 상당히 고통스러워요. 정말로 이 구간 동안엔 얻는 재미보다 고통이 더 크지 않았나 싶을 정도.
그리고 결말은 아주 크게 호불호가 갈리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포일러라서 설명은 아예 생략.
그래서 결론적으로 막 추천은 못 하겠네요. 애시당초 그렇게 보편적으로 인기를 끌 수 있게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서요. 하지만 한 시간 반의 고행을 견디고 나면 마이클 섀넌의 연기 때문이든, 아님 이 가족의 드라마 때문이든 나름 보상은 받을 수 있다는 거. 이 정도로만 말해두고 마무리하겠습니다. ㅋㅋ 저는 잘 봤어요.
+ 아. 글 제목은 왜 저러냐면요. 이게 결국 주인공이 미친 걸로 결말이 난다... 라고 생각하고 보면 이야기가 너무 끔찍해지거든요. 저 셸터 짓느라고 주인공이 저지르는 짓들, 주변에 끼치는 민폐들이 정말 장난이 아니어서요. 차라리 정말로 세상 망해버리는 게 주인공과 가족들 입장에선 해피엔딩인지라. 사실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서스펜스이자 스트레스 요소입니다. ㅋㅋㅋ
2023.01.09 17:28
2023.01.09 19:09
계속해서 이 영화 스타일을 유지했다면 아마도 흥행이 잘 됐을 리가 없어 보여서... 경력 가라 앉은 것도 그럴만 하단 생각이 드네요. 결국엔 재밌게 보고도 두 번 보기는 싫다는 생각이 드는 스타일이라면요. ㅋㅋ
그러고보니 정말 차여사님 경력 피기 시작한 게 2011년, 제로 다크 서티로 쐐기 박으신 게 2012년이군요. 근데 전 왜 이리 그 전부터 유명했던 분 같죠. 이놈의 기억력... ㅋㅋㅋㅋ 근데 정말로 듣보 인디 장르물들 계속 보다 보면 외모도 괜찮고 연기도 훌륭하게 해내시는 분들이 꽤 많아요. 그러던 분들이 어쩌다 메이저 영화에서 작은 역할 맡은 모습 보면 반갑고 응원하고 싶어지고 그러는데, 결국 잘 풀리는 경우는 별로(...)
쇼타임 드라마라면 파라마운트+랑 제휴 맺은 티빙에서 언젠간 어떻게 안 되려나요? ㅋㅋ 기다려보면 어딘가엔 올라올 것 같아요. 그래도 유명 배우들 나오는 작품들은 꽤 높은 확률로 어딘가에서든 들여오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2023.01.10 00:31
저는 이 감독 작품들을 대부분 여러번 재감상한 사람인지라 두 번 보기는 싫다는 생각은 아니지만요 ㅋㅋㅋ 평단에서는 계속 호평이었고 관객들 반응도 '관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괜찮은 편인데 아무래도 흥행성적이 시원치가 않다보니 차기작이 한 번 말리니까 뭔가 투자 같은 부분이 수월치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그나마 가장 인기있었다고 할만한 작품이 매튜 맥커니히, 리즈 위더스푼 나온 <머드>일텐데 배티님께는 <미드나잇 스페셜> 한 번 권해드리고 싶네요. 취향 잘 맞으면 재밌게 볼 수 있을 작품이라서요. 왓챠에서 볼 수 있습니다.
2023.01.10 09:49
멘탈이 저보다 강하시군요! ㅋㅋㅋ 전 막 달리는 호러 같은 건 다시 봐도 이렇게 천천히 스트레스 주며 압박하는 류의 영화는 다시 보기 싫더라구요. '머드'랑 '미드나잇 스페셜' 둘 다 기억해 두겠습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론 재밌게 봤으니... 하하.
2023.01.09 18:28
2023.01.09 19:10
전 마이클 섀넌 처음 봤을 때 그렇게 인상적인 역할이 아니었어서 '참 재미 없게 생기셔서 유명 배우시네' 했다가 나아중에야 훌륭한 분이란 걸 알았죠. ㅋㅋ 근데 그 영화가 뭐였는진 기억이 안 나네요; 근래에 '사랑의 블랙홀'을 보다가 마이클 섀넌이 나온 걸 보고 웃었던 기억은 있어요. 알고 보니 무려 데뷔작이셨더군요.
2023.01.10 07:16
2023.01.10 09:50
짧고 가벼워서 부담 없이 즐기기(?) 좋은 벡키를 먼저 추천드립니다만. 이 영화도 잘 봤으니 사실 뭘 먼저 보셔도 괜찮을 겁니다. 아무튼 괜찮습니다. ㅋㅋㅋ
제프 니콜스가 2010년대 중반쯤에 미국영화의 주목할만한 새로운 목소리로 확 떠올랐었죠. 이거 이후로 매튜 맥커니히 주연의 시골 순정남(?) 이야기 '머드', 스필버그의 외계인 영화를 자기식으로 변주한 '미드나잇 스페셜', 인종간 결혼이 법으로 금지되어있던 시절 흑백커플의 이야기 '러빙' 등 내놓는 작품마다 호평을 받았었는데 이후로는 차기작이 제작단계 들어갔다가 엎어졌다가 이러면서 존재감이 희미해진 감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아트호러를 새로운 트렌드로 몰고온 조던 필, 아리 애스터 이런 양반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리고 그런 느낌이네요. 저도 다 좋게 본 작품들인데 회원리뷰 게시판에 Q님 글도 있을거에요. 근데 언급하신 그 느긋한 템포로 쌓아올리는 연출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대중성이나 오락적 재미는 꾸준히 좋지 않다는 점? ㅋㅋ
2011년에 그동안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제시카 차스테인이라는 배우가 갑자기 태풍같이 나타나서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뿜어냈었죠. 이런 재능이 30살 중반 되어가던 시기까지 무명이었다니 정말 할리우드에서 배우들이 성공할 확률은 얼마나 희박한 것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저도 당시 출연작들을 막 찾아보기 시작했었는데 몇번을 봐도 아직 좀 어려운 테렌스 멜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보다는 이 작품을 더 괜찮게 봤던 것 같아요. 마이클 섀넌은 제프 니콜스 감독이랑 또 으~리로 맺어진 사이인지 필모 전작품에 나오셨더군요. 항상 잘하는 분이시지만 이 작품이 커리어 베스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언급하신 정신과 상담받는 씬도 그렇고 어머니 면회갔던 씬도 기억에 남아요. 마을 주민들 단체로 모인 자리에서 폭발하던 연기도 어마어마했죠. 끝까지 떡밥으로 관객들을 갖고 놀다가 정리가 되나 싶더니 마지막 엔딩에서 또 한 방을 크게 먹이면서 여운이 상당했던 기억입니다.
두 배우분은 최근에 레전드 컨트리 뮤지션 부부의 실화를 다룬 시리즈에서 또 부부연기로 호흡을 맞췄다고 합니다. 캐스팅 때문에 저도 이 작품이 생각나서 보고 싶었는데 미국 채널 쇼타임 오리지널이라나요. 뭐 나중에 어떻게 수입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