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6 15:37
- 항공모함이 시간여행 뿅! 해서 제로기 때려잡는 영화 아닙니다. 1988년작에 런닝타임은 87분. 스포일러는 없게 적을게요.
(나무 그림만으론 전달이 안 될까봐 좌측 하단에 다소곳하게 그려 놓은 그것...)
- 무슨 박물관 같은 데서 우주의 탄생과 생명체의 진화를 보여주는 영상... 을 한참 보여주다 로맨틱 코미디 무드로 시작합니다. 모쏠로 살아온 30여년을 정리하고 처음으로 여자를 꼬시는 데 성공해서 행복에 넘치는 주인공. 설레는 데이트 약속을 잡는데 약속 시간이 밤 열두시 15분이에요. 여자 식당 일이 열두시에 끝나서요. 그 전에 미리 잠 좀 자 두려고 자명종을 맞추고 잠을 청하는데. 남자가 피우다 버린 담배 꽁초를 비둘기가 물어가서 (왜;;) 자기 둥지에 불을 지르고 (왜;;;;) 그 여파로 남자 집이 정전이 되며 자명종 시계가 꺼져서 결국 남자는 새벽 세 시 반에야 일어나게 됩니다.
(로맨틱 코미디로 시작해서)
첫 데이트 약속에서 바람 맞은 여자는 빡쳐서 집에 가서 자구요. 뒤늦게 여자 직장으로 달려간 주인공은 당연히 허탕 치고 난감해하다가 가게 앞 공중 전화로 걸려온 전화를 받는데. 알고 보니 그 전화는 엉뚱한 곳으로 잘못 건 전화였죠. 여기서 중요한 건 전화의 내용입니다.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상대방이 자기가 아는 사람인 줄 알고 다급하게 혼자서 다다다 쏟아 놓은 그 이야기인 즉, 핵전쟁이 시작됐고 70분 후에 그 곳은 허허벌판이 될 거라는 얘기였어요.
(충격과 공포다 그지 깽깽이들아!!!)
- '추억의 외화'라고 적어 놓았으니 우리 탑골 횐님들께선 옛날 옛적에 티비에서 방영해 준 적 있는 탑골 외화... 라고 생각하실 텐데. 음. 잘 모르겠습니다. ㅋㅋ 아무 것도 모르고 다짜고짜 영화를 틀고 보다보니 예전에 이걸 봤다는 얘길 친구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저는 못 봤고. 그래서 그 녀석들이 티비 방영을 본 건지 비디오로 빌려다 본 건지 모르겠어요. 뭐 그러합니다만.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니 그냥 영화 자체가 그런 식으로 티비 방영 후 구전되는 추억의 영화 스타일에 딱 맞더라구요. 그래서 뭔지도 모르고 제목은 저렇게 적었습니다. ㅋㅋㅋ
(이 분들 뉘신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좌측은 탑건, 우측은 로보캅에 나온 유명(영화에 나온) 배우님들이십니다. ㅋㅋ)
- 까놓고 말해서 못 만든 영홥니다. 최소한 못 만들어 '보이는' 영화인 건 맞아요. 일단 되게 저예산인 게 다 티가 나구요. 이야기도 엄청 엉성해요. 비현실적인 건 둘째 치고 이야기 전개도 괴상하고 캐릭터들이 내리는 선택과 행동들, 그 결과들도 이상하구요. 이야기가 하도 이상해서 배우들의 뻣뻣한 연기 같은 건 전혀 신경도 안 쓰게 됩니다. ㅋㅋ
일단 도입부가 저래요. 무슨 로맨틱 코미디처럼 시작해서는 전화 한 통 받는 걸로 분위기가 반전이 되는데. 그때부터 스토리가 무리수의 무리수를 거듭합니다. 주인공이 전화를 받았던 그 식당에 마침 정재계 인맥과 정보가 쩌는 사람이 한 명 있어서 바로 사실 관계 확인 후 탈출 플랜을 짜는 것도 그렇고. 또 그 플랜에 식당 안 사람들을 다 끼워주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다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구요. 이후에 벌어지는 주인공의 여자 친구 찾아 삼만리도, 클라이막스의 헬리콥터 탈출 시도도 다 그냥 괴상하고 어설퍼요. 게다가 결국 찾아낸 여자 친구는 이후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무슨 몽유병 환자 마냥 '쟤 왜 저래?'스런 대사만 쉬지 않고 계속합니다. 이렇게 전반적으로 너무 말이 안 돼서 당연히 코미디여야 할 것 같은데 영화 내내 등장 인물들 모두가 궁서체로 진지하다는 게 그 괴상함을 3배로 파워 업 해주고 말이죠.
(이런 장면과)
(이런 장면)
(요러한 장면들이 나오는데 분명히 심각하고 진지한 아포칼립스물이란 말이죠.)
- 그런데 이게 보다보면 이상하게 빠져듭니다(...)
일단 앞서 말한 그 총체적 괴상함들이 인적 없는 LA의 밤거리의 이미 세상 망한 듯한 분위기와 결합되어 '몽환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무언가를 형성합니다. 그 분위기 속에서라면 만난지 며칠 되지도 않은 여자 친구 구하겠답시고 오만가지 위험한 일들을 저지르고 다니는 주인공의 괴상함도 그냥 동화 속 주인공들의 순진 무구함으로 승화가 되구요. 그 과정에서 만나는 만만찮게 이상한 사람들도 다 동화 속 캐릭터처럼 납득이 돼요. 핵전쟁 아포칼립스를 소재로 한 다크한 동화 같은 느낌이랄까요. 핵전쟁 상황으로 벌어지는 뒷맛 사나운 개꿈을 녹화해서 틀어 보는 것 같기도 하구요. 약간 핵전쟁 버전 '특근'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물론 그 쪽은 그냥 멀쩡하게 잘 만든 영화였지만요.
(빠져드는 밤 분위기!)
- 매우 저예산 영화이고, 그래서 참 생전 모르겠는 배우들만 나오는구나... 싶지만 확인을 해 보면 주인공은 무려 '탑건'의 구스구요. 여자 친구는 '세인트 엘모의 열정'(아니 이 번역제 참 별로...)에서 친구들 중 한 명으로 나왔고. 또 술집 멤버들 중 한 명은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실버맨 박사님이고 그래요. 하지만 뭐 앞서 적어 놓은 내용들 읽어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딱히 인상적인 연기 같은 걸 보여줄 찬슨느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ㅋㅋ
(그래도 출연작 중 대표작을 늘어 놓으면 꽤 괜찮으신 배우님들... 게다가 두 분 다 현재까지 현역이십니다. 뤼스펙!)
- 뭐 더 길게 설명을 못하겠습니다. 정말 참 많이 괴상한 영화에요. 처음엔 '아 오늘 선택은 망했구나' 하면서 보고 있었는데, 계속 보다 보면 이상하게 빠져들고 몰입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네요. 마지막의 다소 충격적인 결말(!) 장면도 참 강렬한 인상을 남기구요.
도대체 어디까지가 감독의 의도대로 뽑혀 나온 건지 참 궁금해지는 영화입니다만. 만약 이게 정말 감독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거라면 나름 냉전 시대 미국인들의 핵전쟁에 대한 공포를 '악몽'으로 잘 표현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솔직히 아닐 것 같지만요. ㅋㅋㅋ
암튼 '환상특급'류의 어두컴컴한 환타지 에피소드 하나 보고 싶다... 라는 분들이라면 만족하실 수도 있겠구요. 특히 괴작 취향인 분들이라면 한 번 보시길.
(노을이 참 예쁜 것이었습니다.)
+ 글을 다 적고 나서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티비 방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그 시절에 티비 외화로 방영됐다면 이렇게 소리소문 없이 조용할 리가 없는데요. 저도 친구들에게 들었다는 기억은 있는데 그 기억도 아주 흐릿한 걸 보면 봤다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듯.
++ 제목이 '미라클 마일'이고 하니 막판에 뭔가 기적 같은 게 일어나는 환타지일 줄 알았는데요.
그냥 동네 이름이었습니다. LA에 실제로 있는 곳이래요.
+++ 이걸 보고 나니 갑자기 그 시절 핵전쟁의 공포를 다룬 티비 영화들이 생각나더라구요. 특히 80년대 한국에서 센세이션이었던 '그날 이후'!!!
...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검색해보니 정확한 제목은 '그날 그 이후'였고 '그날 이후'란 영화는 또 따로 있었군요. 대략 40년만의 정보 수정(...)
2022.09.26 16:15
2022.09.26 16:33
네 내용을 보니 제가 본 건 더 무서운 후자더라구요.
특히 결말의 그 출산 장면 같은 건 어떻게 그 시절에 공중파에서 (등급 구분도 없이 무조건 전체 관람인데!) 이런 걸 전국민 대상으로 틀어줬나 싶었어요. 알고 보면 관대했던 80년대! ㅋㅋㅋ
2022.09.26 16:19
2022.09.26 16:47
괴작 중에서 재밌는 축에 낄 것 같은 작품이네요. 저 분은 설마 탑건의 구스? ㅋㅋㅋ
2022.09.26 17:51
2022.09.26 20:03
2022.09.26 22:48
보신 분이 계셨군요!!
대사까지 기억하시다니 대단합니다. 그게 영화의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첫장면과 연결되면서 더 괜찮았던 것 같아요. 사실 결말 자체는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지만... ㅋㅋ 근데 그렇게 썩 잘 만든 영화는 아니어도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긴 한 것 같아요. 그럼 된 것 같기도 하고요. 흥행은 제 일이 아니니.
2022.09.26 20:26
혹시 주제가가 이노랩니까...
2022.09.26 22:47
전 이 노래는 다른 '최후의 카운트 다운' 주제가일 거라 생각했었는데요.
확인해보니 거기에도 안 나왔더라구요. ㅋㅋ 그거랑 별개로 영상 재밌네요.
2022.09.26 20:30
KBS에서 방영했어요. 당시 은밀한 수작으로(아마 방영 시간대가 안 좋지 않았는지..?) 약간 컬트 비스무리하게 소비됐던 적도 있었고요.
저는 굉장히 좋아하는 영화인데, 다시 보면 실망하겠지만 그래도 4K로 보고 싶긴 합니다.
급조한 여피 전문가 집단이라는 80년대스러운 설정이나, 유령도시 같은 밤거리 장면들도 맘에 들고요, 어거지로 끝고 가긴했지만 결말 부분도 좋습니다.
본문에 <특근>이 연상된다는 부분에 크게 공감하고, <미라클 마일>도 작정하고 블랙코미디로 갔다면 평가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도 드네요.
2022.09.26 23:02
방영 시간대에 대한 의문은 아래 dora님 댓글로 설명이 된 것 같아요. 이거 보신 분들이 많으시네요. 오오...
보니깐 블루레이는 진작에 나와서 팔리고 있는데 해상도는 1080p인 것 같네요. 왓챠의 해상도는 분명 그 이하인 듯 한데 걍 dvd급 정도 되는 것 같구요.
저도 그 밤거리 장면들이 좋더라구요. 몹시 당황스럽긴 했지만 결말의 임팩트도 상당했어요. 정말 그렇게 끝날 줄은... 하하;
사실 이미 영화 속에 코미디 요소들은 충분히 차고 넘치니 블랙 코미디 버전이 훨씬 더 멀쩡하게 잘 만든 영화처럼 보일 것 같긴 합니다. 평가도 훨씬 잘 받았을 것 같네요. 근데 괴작 좋아하는 저로서는 그 와중에 심각하고 진지한 지금의 버전도 나쁘지는 않았구요.
2022.09.26 22:23
제가 봤습니다! 티비 방영했던것 맞아요. 토요일 하교후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텔레비전부터 켜고보니 딱 그 전화받고 긴가민가 멍때리는 주인공 장면부터 봤던것 같아요. 윗분 말씀대로 방영시간대가 애매해서 아마 토요일 정오즈음? 본 사람이 많지는 않았던듯해요. 전 남자가 전화받고 부터가 거의 영화의 도입부인줄만 알았는데 앞에 로맨틱코미디를 가장한 낚시질이 꽤 길었나 보네요. 전 당시 이상한것도 모르고 너무 재밌게 본 영화라서..가끔 다시 보고싶어서 찾아보곤 했는데 전 왜 원제도 final countdown으로 기억하는거죠...분명 예전에 imdb에서 저 제목으로 검색했던것 같은데...왠일로 정직한 번역제라며... 암튼 어디서 보셨나요! 다시 보고 싶어요!
근데 이게 한국에서만 컬트스런? 명성이 있던건 아닌거 같아요. 외국생활중에 그 지역 소규모 영화제..까진 아니고 카페대여해서 하는 영화모임같은 곳에서 상영한다는 정보를 뒤늦게 보고 놓친적이 있었는데 그쪽에서도 뭔가 꽤나 방구석 티비러들에겐 센세이셔널한(ㅋㅋ) 영화였던듯해요.
아 난 정말 티비를 얼마나 끼고 살았던걸까...
2022.09.26 23:06
아니 이거 보신 분들이 왜 이리 많죠. ㅋㅋㅋ 티비 방영은 안 했을 거라고 넘겨 짚은 제가 민망하게시리!!! ㅋㅋ
글 제목대로 '왓챠'에서 봤습니다. 보니깐 '웨이브'에도 있는 듯 하구요 만약 왓챠 회원이 아니신데 이 영화만 보고 싶으시다면 네이버에서 1500원에 볼 수 있기도 하네요. 놀랍게도 네이버에서 이 제목을 치면 딱 이 영화 정보가 나와요.
그게 또 놀랍게도(?) 원제로 영화 정보를 검색해보면 imdb 유저 점수 7/10에 로튼 토마토 91% 등 굉장히 고평가에요. ㅋㅋ 정말로 컬트적으로 인기 끌고 또 인정받는 영화였던 것 같네요. 저만 몰랐던!!!
[그날 이후]는 미국 TV 영화 [The Day After]이고 [그날 그 이후]는 영국 TV 영화 [Threads]이지요. 둘 다 소재는 같은데, 전자도 무섭지만 후자가 더 무섭지요.
참고로 [Threads]의 선배 격인 1966년 BBC 단편 다큐드라마 [The War Game]도 있는데, 이건 오스카 단편 다큐멘터리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https://vimeo.com/532331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