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7 18:27
- 또 2000년작입니다. 장르는 시간여행 스릴러 & 드라마 정도 되겠고. 결말 스포일러는 없을 거구요.
(뭔가 호러 영화 분위기의 포스터네요.)
- 1969년이었나 2000년이었나 그 즈음입니다. '앞으로 이런 얘기 할 거야' 라는 듯이 뉴욕을 급습(?)한 정체불명의 오로라 현상, 간호사만 노리는 연쇄 살인범 이야기가 뉴스에서 흘러 나오구요. 이어지는 건 상남자 소방관 데니스 퀘이드의 화려한 대활약 장면입니다. 그야말로 영웅이네요. 사명감에 불타는 소방관이자 영혼까지 바칠 듯한 야구 덕후에, 멋진 간호사 아내와 아직 좀 비리비리하지만 귀여운 어린 아들과 셋이 행복하게 삽니다.
그런데 30년 후의 현재. 그 귀여운 아들은 형사가 되어 있고, 시작과 동시에 여자 친구에게 차이구요. 아마도 인생이 별로 행복하지 않고 본인 성질도 많이 삐뚤어진 모양이에요. 엄마는 살아 있지만 아빠는 30년 전(!) 화재 진압 중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얘는 어릴 적 살던 집에서 혼자 살고 있고, 어쩌다 또 오로라가 나타났고, 우연히 꺼내 본 옛날옛적 아빠 물건들 중에 아마추어용 무선 통신기가 있고, 그걸 켜 봤더니만 글쎄...
(이게 '동감'보다 1년만 먼저 나왔어도 '동감' 만든 사람들 인생 억울할 뻔 했죠. ㅋㅋㅋ)
- 제가 이걸 왜 봤는진 글 제목만 보고도 다들 눈치 채셨겠죠. ㅋㅋ 그 시절에 '동감'과 엮여서 괴상한 표절 시비를 불러 일으켰던 영홥니다. 어라? 무선 통신기로 과거랑 대화하는 얘기네? 이거 표절 아님?? 이라는 식으로 화제가 됐는데. 여러가지 정황을 볼 때 그냥 순수한 우연의 일치였죠. 결국 한국의 많은 관객들에게 '함부로 속단하지 말자'는 값진 교훈을 남긴 에피소드였습니다. 아무래도 헐리웃 vs 한국 영화이니 '동감' 쪽이 베낀 걸로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해요. 어쨌든 재밌는 우연이긴 했죠.
(동감, 시월애와 이 영화의 공통점 : 주인공인 척은 현재의 사람들이 다 하는데)
- 이걸 보고 나면 영화 두 편을 본 기분이 듭니다. 영화... 는 아니고 하나의 소재로 만들어진 환상특급 에피소드 두 개를 본 기분 정도?
그러니까 '무선 통신기로 과거의 아버지와 대화하는 아들' 이라는 상황을 놓고 사건 두 개가 차례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첫 번째는 당연히 화재로 죽은 아버지를 살리려는 아들의 눈물나는 드라마구요. 두 번째는 부자간의 연계 플레이로 30년 전의 연쇄 살인범을 잡으려는 스릴러죠. 동기 부여를 위해 엄마의 목숨을 판돈으로 거는 건 영화 시작하고 5분만 지나면 다들 알 수 있는 부분이니 스포일러도 아니겠구요.
그리고 이렇게 영 어색해 보이는 둘을 하나로 묶는 건 아버지와 아들의 눈물겨운 사랑 이야기와 '가족을 지켜라!'라는 고풍스런, 하지만 시대 초월의 인기 떡밥입니다. 그래도 결국 따로 노는 느낌이 적지 않지만, 그럭저럭 무사히 잘 묶여서 크게 거슬리진 않습니다.
(실제로 주인공스런 행동과 고생은 과거 파트 사람이 다 합니다. 어쩔 수 없죠. 현재는 과거의 결과일 뿐이니.)
- 그 시절에 안 봤던 이 영화를 지금 와서 보니 더 재밌는 건, 이 영화가 후대에 미친 영향이 생각보다 크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일단 한국 드라마 '시그널' 생각을 안 할 수가 없겠죠. 오래된 미결 사건을 시간을 뛰어 넘는 무전으로 해결하는 형사들 얘기잖아요.
또 그 시절 인기 영화 '나비효과'도 있습니다. 그냥 착하고 선량한 마음으로 살짝 바꿔 놓은 과거 때문에 현재가 예측하지 못한 점점 더 걷잡을 수 없는 막장 상황으로 변해간다... 는 기본 설정 뿐만 아니라 그렇게 변화하는 현재를 보여주는 방식까지도 많이 가져갔어요.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밖에 없을 정도.
암튼 좀 놀랐어요. 그냥 흘러간 시간 여행 드라마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렇게 존재감 확실한 영화였다는 게.
(전반부가 부자 버전 '시월애'였다면 후반부는 '시그널'로 흘러갑니다.)
- 흔한 아이디어를 뼈대로 삼은 안 독창적인 이야기로 사람들을 재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한 모범 답안 같은 영화라고 느꼈습니다.
캐릭터를 잘 구축하고, 기본 드라마를 튼튼하게 세운 후에 디테일을 적절히 심어주며, 가능한한 소소한 아이디어와 재미 거리들을 채운다. 말로만 쉽고 진짜 능력자들이 아니면 따라하지 못 하는 뭐 그런 거 말입니다.
아버지 데니스 퀘이드의 캐릭터는 얼핏 보면 되게 얄팍합니다. 카리스마 가부장에 직장에선 영웅, 퇴근 후엔 맥주 한 병 까서 휴식을 취하며 야구와 가족에 목숨을 거는 단순하고 솔직한 남자. 이렇게 묘사하면 평평하기가 A4용지급인 캐릭터인데 거기에 적당한 허술함과 인간미가 꾸준히 첨가돼서 영화를 다 볼 때쯤엔 꽤 몰입할만한 주인공이 되어 있어요. 아들 제임스 카비젤의 캐릭터도 이런 아빠 캐릭터 & 애절한 사부곡이라는 치트키성 설정과 배우 연기력의 도움을 받아 나름 설득력이 생기구요.
거기에다가 난데 없는 스릴러로의 전환도 '아빠를 살리는 바람에 연쇄 살인마의 희생자가 늘어나 버렸다'는 아들의 죄책감 덕택에 추진력을 얻구요. 범인을 찾아내기 위한 둘의 수사(?)도 어쨌든 장르물 안에선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충실히 짜여져 있어서 재밌게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꾸준히 과거와 현재의 상호 작용을 소소한 아이디어들로 채워 넣기 때문에 심심하지도 않구요.
(부모 자식간의 사랑이라는 치트키를 든든히 만들어서 바탕에 깔고 흘러가니 시큰둥해지기도 힘들죠.)
- 영화가 나온 연도에 어울리게 90년대 헐리웃 장르물 특유의 (좋게 말해) 나이브함, 또는 허술함이 도처에서 튀어나옵니다만. 동시에 괜찮은 장면들이 꾸준히 튀어나와서 뒷받침을 해주기 때문에 '아 이거 구리네'라는 생각은 안 하면서 봤습니다. 뭐 사실 이미 '백 투 더 퓨쳐'에서 보여준 것들이 대부분입니다만. 그 영화에서 마티가 과거를 바꾸면 그렇게해서 달라진 현재를 보기까진 시간차가 있었잖아요. 근데 이 영화는 설정상 과거와 현재 두 곳에 주인공이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에서 벌어진 일이 거의 실시간으로 현재에 반영이 되고 그래서 훨씬 속도감 있게 시간 여행 장난(?)을 써먹을 수 있어요. 영화는 그런 장점을 최대한 잘 활용을 하고 거기에서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가 나옵니다. 특히 클라이막스를 마무리하는 그 장면은 '아!' 하고 눈치를 채는 순간부터 웃음이 나오더라구요. 아니 그걸 이렇게 써먹나. ㅋㅋㅋㅋㅋㅋ 하고 씨익 웃었습니다.
('동감'에서 스무살 더 먹은 김하늘 분장을 그냥 뿔테 안경 하나로 때우는 게 그렇게 웃겼는데)
(역시 미제가 짱입니다요.)
- 결론은 간단하게.
시간 여행물을 좋아하는데 아직 이걸 안 보셨다면 보세요.
규모로도 아이디어로도 큰 야심 없는 소품이지만 참 영리하고 야무지게 잘 만들어진 소품이고. 이 정도 시간 여행물은 은근히 흔치 않습니다.
물론 제가 시간 여행을 빙자한 그냥 연애물 두 편을 연달아 본 후에 감상해서 더 후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ㅋㅋㅋ 어쨌든 전 재밌게 봤습니다!
+ 이 영화 역시 기껏 과거랑 대화 터 놓고선 돈 벌 생각은 안 하는 영화입니다만. 당장 아버지, 어머니 목숨 구하느라 바빴으니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치구요. 대신에 부모 말고 친구에게 힌트를 주죠. "얘야, 난 산타클로스야. 이건 무조건 외우고 기억하렴. 야후! 따라해 봐. 야후!!!" ㅋㅋㅋ 이걸 리메이크한다면 뭘로 바꿀까요. 아무래도 비트코인만한 게 없겠죠.
++ 역시 '시월애'나 '동감'과는 다르게 시간 여행의 시작과 끝에 대한 설정을 확실히 해 놓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말도 안 되지만, '암튼 저 오로라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어요. 앞서 말한 한국 영화 두 편의 경우엔 다 보고 나서 생기는 이런 쓸 데 없는 궁금증을 막을 길이 없거든요. "아니 그럼 앞으로 저 우체통/통신기는 어떻게 되는 건데??"
2022.09.17 18:49
2022.09.18 01:15
안 봤습니다만. 원작 소설은 읽었어요. 영화로 나왔다길래 '그 원작을 갖고 영화를 만들어?'라고 잠시 신기해 한 후에 잊었습니다. ㅋㅋ
2022.09.17 22:42
2022.09.18 01:24
'모레'가 뭔가 한참 생각했습니다. ㅋㅋㅋ 그 영화 재밌게 봤는데 데니스 퀘이드가 나왔다는 건 아예 기억에 없군요. 허헐.
제게는 '이너 스페이스'랑 '죽음의 카운트다운' 주인공으로 기억에 남아 있었어요. 말 해놓고 생각해 보니 둘 다 멕 라이언이 나온 영화로군요. 그래서 또 아름답지 않은 이 배우님 역사가 떠오르고(...) 그래도 최근에도 꾸준히 다작에 가깝게 활동하는 걸 보면 역량은 괜찮은 배우인갑다 싶기도 하구요.
2022.09.17 23:53
말씀대로 캐릭터 설정은 주인공 부자부터 범인까지 그냥 딱 기본인데 과거와 현재가 소통한다는 설정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효과적으로 잘 써먹은 작품이었다는 기억이 나네요. 이것도 마지막으로 봤던 때가 언젠지 기억이 안날 정도라 글을 보면서 조금씩 살아났네요. 확실히 완전히 말이 되게 납득은 못시키더라도 최소한 뭔가 이유가 있긴 있구나, 그래도 어떻게 미래에 어떻게 돈 버는 방법을 궁리하는 모습이 대사로도 살짝 나와주고 그래야겠죠. 어제 글이랑 비교해보니 확실히 동감이 너무 대충 만들긴 했어요 ㅋ
여담이지만 두 주연배우가 둘 다 이후로 그닥 안좋았죠. 데니스 퀘이드는 마약중독으로 많이 망가지면서 마침 바람 핀 멕 라이언이랑 결혼생활 끝나고 그래도 이후에 정신은 차렸다는데 커리어 회복은 못했죠. 아드님이 최근 더 보이즈에도 나오고 스크림 신작에 무려 놀란 차기작에도 캐스팅 되면서 잘나가고 있으니 그나마 위안을.... 제임스 카비젤은 여기에 글도 올라왔던 것 같은데 그렇게 촬영장에서 정신나간 또라이 짓을 많이 했다는 폭로가 나와서 이미지 훅갔죠.
2022.09.18 01:28
네. 사실 그 소통 방식도 말이 안 되긴 하는데 말이 안 되는 대신 아주 재밌게 써먹어서 불평할 생각을 안 하게 만든다는 느낌이었어요. 무선으로 대화 나누며 과거에서 물건 배송(?)하면 현재에서 즉각 받아보고 막. ㅋㅋㅋ '동감'과의 차이는 아마도 만든 사람들의 시간 여행에 대한 관심도 차이가 아닌가 싶더라구요. '동감'을 만든 사람들은 그냥 로맨스의 재료로만 생각을 한 거고. '프리퀀시'를 만든 사람들은 시간 여행 자체를 재밌다고 생각하며 만든 거구요.
제임스 카비젤은 사실 본 작품이 별로 없는 배우였는데, 이거 보고 검색해보니 말씀하신 그 돌아이짓 내용이 막 나오는데 장난 아니게 심각하더라구요. 그 바닥에서 아예 퇴출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
2022.09.18 09:45
2022.09.18 10:42
봐도 봐도 볼 게 늘어나기만 해서 나름 열심히 봐도 안 그러던 시절과 실상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ㅋㅋ 왓챠에 처음 가입했을 때 컨텐츠 리스트를 전체 보기 해서 몇 시간 동안 만들어둔 찜 목록이 도대체 줄어들질 않아요. 그냥 욕심만큼 다 보기를 포기하고 사는 게 답이구나... 하고 있네요.
말씀하신 부분은 아래 하얀 글자로 적어 볼게요. 스포일러니까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드래그 하시면 안 됩니다!
클라이막스에서 결국 과거와 현재의 연쇄 살인범(그러니까 같은 놈)이 동시에 주인공 집을 습격하죠. 과거는 아빠가, 현재는 아들이 상대하는데 과거는 아들이 인질로 잡혀서, 현재는 걍 아들이 싸움에서 져서(...) 둘 다 위기에 처하구요. 특히 현재 파트에선 아들이 바닥에 눌려진 채로 머리에 총까지 겨눠지는데요. 그 때 과거에서 그동안 존재감 없던 엄마가 범인을 급습해서 빈 틈을 만들고, 아빠가 샷건으로 범인의 오른손을 날려 버립니다. 그 순간 현재에선 '현실이 달라지는 연출'이 샤라락 지나가구요. 총을 겨누고 있던 범인의 손 하나가 실시간으로 사라져 버리면서 범인은 경악하고, 그때 분명히 혼자 있던 주인공의 집에서 샷건을 든 누군가가 나타나 범인을 날려 버립니다. 그동안 무슨 수를 써도 죽은 상태였던 (화재로 죽거나, 폐암으로 죽거나) 아빠가 짜잔~ 하고 살아서 나타난 거죠. 미래의 아들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담배를 끊고 장수에 성공하신. ㅋㅋㅋ
2022.09.18 13:00
2022.09.18 15:22
맞아요 '콜'도 비슷하죠. 관계를 꼬아 놓은 버전의 '프리퀀시' 같기도 하구요.
이런 아이디어 영화 자체는 많았을 것 같은데, 이렇게 실시간 반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영화는... 모르겠어요. 제 지식과 기억으론 프리퀀시가 가장 먼저일 것 같기도 하구요. ㅋㅋ
2022.09.18 11:20
그 시기에 시간을 다뤘던 멜로 판타지가 뭐가 있나? 생각해보니 이제 송해성의 '카라' 정도가 남았을까요?
2022.09.18 11:38
그 시절에 꽤 재미 없게 봤던(...) 영화라 다시 보고 싶진 않은데 마침 스트리밍 서비스 되는 곳도 없네요. ㅋㅋ
각본 쓰신 분들이 '라빠르망'을 재밌게 보셨나... 그런 생각을 했던 거랑 '뭐야 여자 주연이 김희선이 아니라 김현주네?' 했던 거. 그리고 영화는 망했지만 이현우 노래는 꽤 인기였던 거. 그 정도만 기억 나요.
2022.09.18 12:11
2022.09.18 15:24
근데 뭐 1999년 영화니까요. 당시 한국 영화 붐을 타고 어지간한 젊은 티비 스타들은 다 1년에 영화 한 편 이상씩은 찍을 정도로 뭔가 많이 쏟아져 나오던 때라 그 정도 퀄의 영화(?)는 흔했던 것 같아요. ㅋㅋ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이런 류 영화 중 제일 좋아하는 건, 드니 빌뇌브가 연출한 어라이벌인데요. 이거 보셨나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