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권력, 지적의 권력.

2010.06.05 01:31

keira 조회 수:5328

 지방 출신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몇 년 사이에 '사투리'를 싹 고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대부분 전라도나 제주도 사람들이, 그리고 여성들이 빨리 고칩니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빨리 고친다는 이야기이지요. 경상도 출신의 남성에게 사회 생활에 지장 있을 수 있으니 '사투리'를 교정하라는 이야기 하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전라남도 출신의 여성으로 거의 7~8년을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소위 '사투리'를 교정하지 못했지요. 일단  어휘를 표준말에서 벗어난 걸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의사 소통이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귀가 밝은 편이 못 되어서 리스닝이 잘 안 되는 편이기도 하지만 제게는 서울말과 전남말의 차이가 그다지 크게 들리지 않습니다. 결정적으로 제가 고쳐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겠지요.

 

하지만 학교에서 교수님께도 '사투리'를 교정하라는 말을 들어 봤고, 심지어 100% 전남 사람인 부모님께도 그런 말을 들어봤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제게 악의가 있어서 그렇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그게 제게 유리하니까 충고해주는 거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그걸 이해하는 것과 감정적인 반응은 다른 문제입니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제 말을 좀 듣다가 항상 물어옵니다. 

- 집이 지방인가요? 어디예요?
- 전남이에요.
- 어쩐지 말투가 좀 다르게 느껴진다 했어요.

 

아마 다르겠지요. 그런데 그걸 왜 꼭 집어서 지적하는 건가요? 제게도 경상도 말, 서울말, 충청도 말, 제주도 말이 다 다르게 들립니다. 하지만 전 그걸 지적하지 않아요. 의사소통이 되는데 상대방이 억양이나 강세가 약간 다른 말을 사용하는 게 무슨 상관일까요? 누가 그들에게 제 말투에 대해 지적할 권력을 준 겁니까?

 

전라도 사람의 입장에서도 다른 지역의 말투에 대해 부정적인 평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 합니다. 그게 무례하다는 걸 아니까요. 하지만 지난 10년간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전라도의 지위가 조금씩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지적이 무례하다는 합의가 올 날은 아직 요원한 모양이군요.

 

말투와 '사투리'의 문제에는 서울과 지방 사이의 권력 문제, 전라도와 같이 차별받아온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사이의 권력 문제, 남성과 여성의 권력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문제에 있어서는 언제나 한국 사회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계층이고요. 제 말투에 대한 지적에 익숙해져야 하고, 익숙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 판단과는 별개로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화가 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간 들어온 지적질들이 오버랩되면서 지금 분노까지 치미는군요.
 
완전 오버라는 반응이 나올 거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지만 저는 지금 지난 97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왜 어른들이 개표 방송을 보면서 춤을 추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음에도 갈 길이 멀다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하고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0403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9468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9726
126548 왜 ‘프렌치 수프’를 봤는데 ‘베이크드 알래스카’가 먹고 싶어지는가?(스포일러 없음) [4] ally 2024.06.25 230
126547 Love is an open door 크로아티아어 catgotmy 2024.06.25 42
126546 모임, 동호회에서 한 인간이 흑화하는 과정에 대해 [5] ND 2024.06.25 692
126545 [정보] 에릭 로메르 감독전 - 아트하우스 모모 6.24~7.6 soboo 2024.06.24 147
126544 왓챠의 옛날 홍콩영화들은 한글자막이 있다는것에 의미를 둬야겠군요. [2] ND 2024.06.24 209
126543 [넷플릭스바낭] 제목이 참 직관적인 대만 호러, '여귀교' 잡담입니다 [4] 로이배티 2024.06.24 239
126542 에피소드 #95 [4] Lunagazer 2024.06.24 90
126541 Jennifer Lopez -I'm glad daviddain 2024.06.24 57
126540 프레임드 #836 [4] Lunagazer 2024.06.24 169
126539 "악마와의 토크쇼" imdb 트리비아 [6] 폴라포 2024.06.24 314
126538 폴라 압둘 forever your girl과 백 투 더 퓨처 2교집합 daviddain 2024.06.24 80
126537 옆집 사람이 이상합니다 [7] catgotmy 2024.06.23 766
126536 프레임드 #835 [4] Lunagazer 2024.06.23 62
126535 [구별짓기] 읽다가 [9] thoma 2024.06.23 234
126534 [넷플릭스바낭] 인도네시아산 호러 앤솔로지, '조코 안와르: 나이트메어 앤 데이드림' 잡담입니다 [6] 로이배티 2024.06.23 262
126533 엠스플 롯데 :키움캐스터 누군가요/기아ㅡ 한화 재밌네요/인사이드 아웃2 봤어요 [1] daviddain 2024.06.23 125
126532 내 일도 아닌데 너무 많이 봐서 그많은 시간을 소요하는 인터넷 틀린 것 찾기, 우단털파리속(러브버그), 난 나를 씹어먹음 상수 2024.06.23 135
126531 Love is an open door 리투아니아어 catgotmy 2024.06.23 46
126530 [넷플릭스바낭] 중국산 과잉과잉 스릴러, '사라진 그녀' 잡담입니다 (댓글 스포일러) [8] 로이배티 2024.06.22 344
126529 프레임드 #834 [4] Lunagazer 2024.06.22 5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