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15 22:56
버스에서 내려 잠시 생각했죠.
정류장 앞에는 동네 슈퍼가 아직도 불을 밝히고 있었어요.
하루 종일 소나기가 오락가락했지만 여전히 무더운 밤,
시원한 하드나 먹으며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죠.
하지만 이건 누구에게도 말 못할 사연이에요.
누가바, 누가바,
얼마 전 누가바를 먹다가 절반이 뭉텅 떨어져나간 적이 있었거든요.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그 생각뿐이었어요.
누가 내 누가바를 책임질 것인가?
휘적휘적 팔을 휘저은 내가 잘못인가.
말랑말랑 다 녹아가는 누가바를 판 동네 슈퍼의 잘못인가.
애초에 누가바를 이따위로 만든 하드 공장의 잘못인가.
이건 트라우마예요.
하드, 하드, 시원한 하드를 먹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만약 누가바라면?
전 정말 두려웠어요.
다시 누가바를 샀다가 또 절반이 떨어져나간다면, 아니, 이번에는 막대에서 완전히 빠져버린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그건 정말 두려운 일이죠.
세상에는 얼마든지 많은 하드가 있는데...
비비빅, 쿠앤크, 보석바, 메로나, 엔쵸, 메가톤바, 바밤바, 서주 아이스주, 깐도리...
하지만 나는 왜 누가바가 아니면 안되는가.
지금 이 벽을 넘지 못하면 그 벽은 언제까지나 남아있을 것이다, 그 다음 벽도 넘지 못할 것이다.
저는 누가바를 먹어야만 했어요.
누가바를 먹을 수밖에 없었어요.
공장에서 마구 찍혀 나오는 누가바, 동네 슈퍼의 냉장고에 잔뜩 쌓여 있는 누가바,
내 앞에 벽처럼 가로막고 있는 누가바,
이 누가바를 넘지 못하면 나는 영영 그 어떤 하드도 먹지 못할 것이다.
그래요,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걸어들어갔죠, 동네 슈퍼로.
냉장고 문을 열고 오른쪽 벽에 얌전히 쌓여 있는 누가바를 집었어요.
잔돈이 없어서 만 원짜리를 건넸어요.
꾸깃꾸깃 거스름돈을 받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어요.
누가바색 누가바의 포장을 쭉 찢어 벗기고,
거침없이 한 입 물었죠.
단단하더라구요.
이건 떨어져 나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오렌지색 보안등 불빛이 켜져 있는 골목을 걸었어요, 누가바를 입에 물고.
시원했죠.
내 안에 쌓여만 가던 어떤 두려움이 서서히 녹아들고 있었어요.
내가 걷는 길 위로,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저 푸른 밤하늘 위로.
모든 두려움을 떨치고 유유히 걸었어요.
이젠 알아요.
이젠 그 어떤 누가바도 두려워하지 않을 거예요.
누가바가 오면 누가바를 먹고,
엔초가 오면 엔초를 먹고,
메가톤바가 오면 메가톤바를 먹고,
메로나, 메로나,
아마도 해탈은 이런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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