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옛적에 H. F. 세인트라는 사업가가 [Memoirs of an Invisible Man]이란 소설을 쓴 적이 있었어요.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영화판권도 팔렸죠. 그 뒤로 세인트는 전업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모양인데, 결국 차기작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뭐, 그 때 벌어들인 돈만으로도 남은 인생을 풍족하게 먹고살 만 했으니 세인트 입장에선 아쉬울 게 없겠죠.

존 카펜터의 [투명인간의 사랑]은 세인트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원제는 책 제목과 같고요. 카펜터의 경력 중 조금 특이한 영화인데, 그게 재미있게 특이하지는 않습니다. 원래 아이번 라이트먼이 감독할 예정이었는데, 주연배우 체비 체이스와 합이 잘 맞지 않아서 하차했고 그 자리를 카펜터가 물려받은 거죠. 카펜터는 고용감독으로서 자기 일을 하긴 했는데, 그의 개성은 전혀 안 보입니다. 오퇴르로서의 자부심도 찾을 수 없고.

이런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닉 할로웨이는 주식 중개인인데 어떤 과학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그만 연구소에서 일어난 사고 때문에 투명인간이 되어버립니다. CIA 요원인 데이빗 젠킨스는 할로웨이를 납치해 킬러/스파이로 이용할 계획을 세우고요. 할로웨이는 젠킨스를 피해 달아다니는데, 그러는 동안 투명인간이 되기 전부터 좋아했던 앨리스와 엮이게 됩니다.

원작에서는 투명인간으로 사는 것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꽤 많다고 해요. 하지만 그게 얼마나 말이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완벽하게 논리를 따지기 시작하면 말이 될 수 없는 게 투명인간 이야기거든요. 예를 들어서 음식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배설물은 어디서부터 언제까지 보이는지? 원작이 이 질문들에 다 답을 해주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 영화는 당연히 대충 건너뛰고 있고. 먹은 것은 소화되면 투명해지고 그 소화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맑은 수프를 먹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건 믿을 수도 없고...

흐릿한 영화입니다. 체비 체이스가 나오니 코미디 같은데 그 코미디가 아주 세지고 않고. 그렇다고 액션물이나 스릴러로 보자니 밍밍하고. 로맨스 역시 지나치게 할로웨이 중심으로 편리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특별히 감정이입할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냥 모든 게 적당한 수준이에요.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특수효과에 있습니다. 일단 영화는 닉 할로웨이가 투명해진 뒤에도 체비 체이스를 종종 보여주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게 이 영화의 '1인칭' 묘사인 거죠. 주연배우 체비 체이스를 배려한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영화의 진짜 재미있는 부분은 '3인칭'일 때, 그러니까 그가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막 할리우드에서 컴퓨터 그래픽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시절 시각효과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이후에 나온 [할로우 맨]처럼 매끈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 영화의 빛을 잔뜩 머금은 듯한 구식 특수효과엔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17/03/21)

★★☆

기타등등
카펜터가 음악을 맡지 않은 몇 안 되는 카펜터 영화입니다. 하긴 그 양반 스타일이 이 영화에 어울렸을 리가 없죠. 음악은 셜리 워커가 맡았어요. 나중에 이 작곡가는 존 카펜터의 [LA 2013]에서 같이 작업하죠.


감독: John Carpenter, 배우: Chevy Chase, Daryl Hannah, Sam Neill, Michael McKean, Stephen Tobolowsky, Jim Norton, Pat Skipper, Paul Perri, Richard Epcar, Steven Barr, Gregory Paul Martin, Patricia Heaton, Rosalind Chao

IMDb http://www.imdb.com/title/tt010485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2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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