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9 13:40
많은 분들이 만화책 드래곤볼에 대한 추억을 갖고 계시겠죠.
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드래곤볼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드래곤볼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대단한 만화로 평가받는지 말이죠.
고전의 훌륭함은 후세의 작품들이 그 자체로 증거가 됩니다.
이를테면 히치콕이 [현기증]에서 보여준 트랙아웃 줌인 기법은 그 작품으로만 미학적 성취를 논할 수 있겠지만 후대의 작품들이 끝없이 차용하는 것으로도 발견됩니다.
특별한 심리적 충격이나 상황을 표현하고자 할 때 그 기법을 쓰면 그 기법으로만 표현이 가능한 감흥이 있죠.
드래곤볼은 사실 완성도가 높은 작품은 아닙니다.
설정 구멍도 많고 스토리는 제 멋대로 뻗어나갑니다.
맨 처음에는 소년 소녀 콤비의 우당탕탕 모험활극이었다가 이후에는 천하제일 무도대회라는 설정을 기반으로 점점 배틀물로 변해갑니다.
거기에서 신비한 도사와 무공이 주를 이루던 무협지적 세계관은 "마족"이라는 존재까지 등장시키구요.
그러다가 갑자기 '사이야인'과 '나메크성인'같은 외계인의 등장으로 스페이스 오페라스러운 이야기로 바뀝니다.
이후 다시 주문, 저주, 마인과 같은 설정들이 나오면서 과학보다는 마법의 힘이 더 강한 세계로 바뀌구요.
그 과정에서 손오공이 싸우는 이유는 숭고하거나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나보다 강적과 싸우는 게 좋다는, 일종의 스포츠맨십과 도전정신 같은 것이죠.
그래서 나중에는 일단 지구인들을 다 죽게 놔두고 드래곤볼로 다시 살리자는, 도덕관이 망가진(?) 소리도 자주 내뱉게 됩니다.
특히나 인조인간 편부터는 전투력 인플레도 너무 자주 일어납니다.
새끼손가락 하나로 행성을 없애는 인물들이 빡세게 수련해서 서로 최고자리를 뺏고 뺏기는 우주최강 쟁탈전이 계속 일어나죠.
그럼에도 이 만화의 위대한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드래곤볼이란 만화가 가진 공간적 상상력일 것입니다.
예전에 이동진 평론가가 잭 슈나이더의 [맨 오브 스틸]을 이렇게 평했었죠.
액션 자체보다 액션의 파장이 더 놀라운 작품이라고.
제가 그 영화를 처음 보고 친구들이랑 나눈 이야기가 '드래곤볼도 이제 영화화할 수 있겠다(이미 나와서 망했었지만)'는 것이었습니다.
드래곤볼은 액션만화로서 최초의 미학적 성취를 거둔 작품이라고 평가해도 될 것입니다.
육체의 힘이 어떤 반응을, 어떤 범위에까지 미칠 수 있는가...
이 부분에서 드래곤볼은 만화적 과장, 달리 말하면 근사한 허풍을 친 작품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먹질을 하고 때린다고 칩시다.
그럼 그건 인체끼리의 반응이죠. A의 주먹이, B의 얼굴이나 복부에 꽂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뭐 너무나 당연하죠.
드래곤볼은 A가 B를 때리면 B가 어딘가로 날아가서 처박히고 그 주변 공간이 파괴됩니다.
물론 이런 연출도 어느 정도는 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겠습니다만 (실제로 드래곤볼에서 벽이 둥글게 파이거나 부숴지는 연출은 그 영향이죠)
드래곤볼 세대는 이 연출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이건 의외로 재미있는 비현실적 상상입니다.
내가 주먹질을 쎄게 하면 그 파괴력이 강해져서 그걸 맞은 인체가 부숴져야죠? 이게 사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상상입니다.
그런데 드래곤볼은 만화 속에서 인체의 내구도를 엄청 늘리고 인체의 파워가 끼치는 효과를 공간적으로 표현합니다.
A가 B를 때리면, B의 인체가 파괴되는데서 안끝납니다. A가 B를 때리면, B를 둘러싼 공간이 다 부숴집니다.
이건 지금 생각해보면 소년만화로서는 꽤나 효과적인 연출이죠. 인체가 파괴되는 장면은 사실 굉장히 잔인해서 성인적인 취향이기 때문입니다.
격투맨 바키 시리즈나 수라의 0 시리즈를 보시면 압니다. 다이나믹해질 수는 있어도 블록버스터스러운 효과는 못냅니다.
그리고 드래곤볼이 또 남긴 것은, 인체가 어떤 에너지를 쏘아서 폭발시킬 수 있다는 설정입니다.
저 에너지가 뭔지 모릅니다. 드래곤볼안에서도 '기공파'라는 종류로 나눠지긴 하지만 뭔지 정확히 모릅니다.
불의 속성을 띄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저기에 닿으면 어쨋든 폭발합니다. 운동에너지를 가진 폭탄이 빛의 형태를 띄고 날아가는거죠.
무협지적으로 보면 장풍이란 기술은 있습니다만 그건 어떤 에너지를 바람처럼 쏘아서 사람을 날리거나 세게 부딪히는 것입니다.
SF적으로 보면 레이저에 가깝습니다만 그건 뜨거운 열이 꿰뚫는 것에 가깝지 이렇게 대규모의 폭발은 안일어나죠.
슈퍼맨의 레이저 광선을 온몸으로 나가게 한 것은 아닐까 추측합니다만...
드래곤볼의 위대한 점은 만화적으로 굉장히 멋지고 쿨한 장풍을 개발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후로는 전투력이 높고 싸움을 잘하는 캐릭터들이 어떤 폭발형 에너지를 빛으로 뿅 쏘는 게 너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저건 레이저가 아닙니다. 정체불명의 기를 어떻게 발산한 형태인거죠.
이 액션의 측면에서 드래곤볼만큼 멋지고 강렬한 감흥을 남긴 작품은 그 전에는 없었을 것이라고 감히 유추합니다.
그리고 드래곤볼 세대이자 후세대를 겪고 있는 사람으로서 드래곤볼만한 성취를 거둔 작품은 아직까진 없습니다.
왜냐? 물론 드래곤볼의 영향을 아주 강하게 받고 그걸 숨길 생각도 안하는, 오마쥬가 아니라 아예 자기것으로 만들려는 작가들은 여럿 있습니다.
한 때 점프의 3대 만화였던 나루토, 원피스, 블리치 이 세 작품 중 나루토와 원피스는 완전 드래곤볼의 자식들입니다.
모두가 육탄전을 거듭하고 어떤 인물들은 뿅뿅 레이저같은 걸 발사합니다.
생전의 토리야마 아키라의 만화력을 가장 잘 흉내내고 차용한 작가라면 원펀맨을 연재중인 무라타 유스케일 것입니다.
항상 초사이야인 형태로 있되 머리는 없앤 원펀맨을 주인공으로 하고, 장풍 형태의 에너지 발사는 주인공의 제자격인 제노스에 분할한 구도입니다.
무라타는 드래곤볼의 액션을 더 짧은 시간 단위로, 더 가까이에서, 여러번 보여주는 형태의 연출을 합니다.
원펀맨이 주먹질을 한번 하면 아예 시점을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보는 식으로 해서 그 파장을 관찰합니다. 꽤나 강렬하죠.
그런 장면들이 흥미로우면서도, 그 안에 녹아있는 토리야마 아키라 특유의 공간감각을 떠올리게 됩니다.
제가 예전에 일곱개의 대죄란 만화책을 잠깐 본적이 있습니다. 그림체가 너무 토리야마 아키라의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왠걸? 작품 전체가 드래곤볼 차용입니다. 심지어 판타지 (게임) 세계관인데 전투력을 숫자로 직접 명시하는 연출까지 나옵니다.
현재 일본 만화 중에서 드래곤볼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작품은 아무 작품도 없을 것입니다.
위대한 작품을 실시간으로 감상하는 것은 꽤나 뜻깊은 일이죠. 이후에 그 유산들을 보면서 오리지널의 영향력을 느끼니까요.
토리야마 아키라가 그려낸 이 만화적 상상력의 결과물은 아직까지도 일본 만화를 지배합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꽤나 오래 갈 겁니다.
다시 한번 조산명 선생님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 고등학교 야자 시절, 정전이 됐는데 박쥐가 갑자기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다들 난리가 났는데 제 친구가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다들 눈을 감고 박쥐의 기를 느껴봐!!" 정말 개같이 웃었던 추억이네요
2024.03.09 22:06
2024.03.10 10:11
아하 이건 제가 드래곤볼을 읽기 시작한 때보다 더 옛날이군요. 저 때는 만화대여점 사업이 막 시작되고 있었고 프리저편이 끝나지 않았을 때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권에 오백원이라니.... 물가가 실감이 되는군요.
2024.03.10 01:34
쾅쾅 부딪히면 사람이 아니라 배경이 작살나는 연출... 은 고지라나 울트라맨 같은 작품들을 수십년 전부터 만들어 왔고 '바벨 2세' 같은 만화도 나왔던 일본에서는 특이할 것까진 없는 연출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사실 에네르기파도 울트라맨 빔 공격이랑 매우... ㅋㅋ) 그 연출을 '드래곤볼'만큼 멋지게 표현해낸 작품을 찾긴 힘들 것 같기도 하구요.
근데 교실에 박쥐라니. 이런 에피소드는 정말 난생 처음들어 보네요. ㅋㅋㅋㅋ 전 야생의 박쥐를 실물로 본 적이 일생에 단 한 번도 없어요!
2024.03.10 10:25
좀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가 드래곤볼의 훌륭한 연출로 뽑았던 부분은 단순히 배경이 작살나는 연출을 말한 게 아닙니다. 로이배티님이 말씀하시는 게 정확히 제가 말하는 것의 반대논리인데, 고지라나 울트라맨 같은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거대합니다. 애초에 몸체가 크고 무겁다는 이미지를 상정하고 있어요. 말씀하신 사례들은 크고 무거운 것이 쓰러지면 생기는 부수적인 효과이지 그 자체가 액션의 박진감을 더하진 않아요. 그런데 드래곤볼은 사람의 사이즈와 중량으로 육탄전을 공간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인체가 어떤 속도로 날아가거나 튕겨나가는 힘을 받고 멀리 처박혀서 벽이나 바위가 다 부숴질 정도면 인체는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야됩니다. 그런데 드래곤볼은 그게 이 만화적 세계에서 힘과 속도를 표현하는 기본적인 연출이라는 거죠.
바벨 2세도 분명히 후대 만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이겠으나 드래곤볼의 액션 연출과는 그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만약 드래곤볼 식의 연출을 했다면 사람을 패대기치거나 육체를 때릴 때 그 반동으로 육체가 멀리 날아가서 처박히는 연출이나 바닥이 깨지는 연출이 있어야해요. 그런데 바벨 2세에는 그런 연출이 거의 없습니다. (특히 두번째 컷 같은 경우에 바닥이 깨지는 연출이 있었을 겁니다) 이 작품에서의 육탄전이란 오히려 전기 충격이나 다른 초능력들을 이용한 인체파괴에 더 가깝습니다.
2024.03.10 20:04
2024.03.10 22:45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2024.03.10 10:36
바벨 2세에 비해 드래곤볼의 액션은 공간을 훨씬 더 크게 활용하고 신체를 때리거나 던지거나 밀어서 다른 곳으로 처박는 묘사가 일관되게 나옵니다. 심지어 야지로베는 크게 센 것도 아닌데 손오공이랑 붙었을 때 저런 식으로 싸워요.
그리고 이걸 확실하게 계승해서 업그레이드한 게 원펀맨입니다. 원펀맨에서도 반드시 누가 누구를 때리면 멀리 날아가거나 처박힙니다. 무라타는 이걸 더 강하게 날아가는 것으로, 더 세세하게 보여주는 식으로 연출하고요. 사람의 몸과 사람의 몸이 부딪히는데 이런 공간적 파장을 일으킨다고 연출법을 대중들의 머리에 심은 게 토리야마 아키라라는 것이죠.
글 잘읽었어요. 감사합니다. 옛날 이야기여요. 지금 강남구청역 근처에 헌책방이 있었어요. 시간이 나면 서울의 헌책방을 순례하던 때여요.
[드래곤볼]이 정식출간 되기 전인거 같아요. 불법복사 만화인데 손바닥 사이즈이고 한권에 오백원이었어요. 앞에서부터 보면 [드래곤볼]이고
뒤에서부터 보면 [슬램덩크] 였어요. 그런거 정말 수백권 샀는데 일곱살 터울의 막내동생이 좋아하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도 같이 살아요 :)
드래곤볼 집필 중인 30세 토리야마 아키라 : MLBPARK (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