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커서 뭐가 될래?"
어릴 때  받아본 이 말이 발화되는 억양에는 두 종류가 있었어요. 기대와 호의가 담긴 궁금증의 억양과, 싹수가 노래 보이니 앞날이 걱정된다는 비아냥의 억양이 있었습니다. 어느 쪽이든 저는 저 질문 자체가 좋지 않았어요. 세상의 이목이 집중될 만큼 비범한 소녀였던 적도 없고 절망적으로 흔들린 방황의 시기도 없었지만 저는 저 질문이 때때로 몹시 끔찍했습니다.

선생님, 이웃/친척 어른들, 친구, (자라서는)선배 등등 가족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저 질문은 건너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디로 휙 증발해버리고 싶었죠. 무위의 삶에 대한 동경 때문이 아니라, 저 질문이 기대고 있는 가치 체계에 종속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미래'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어찌저찌 이렇게 평범한 노동자가 됐어요.

그런데  아직도 주위엔 저를 성실한 한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 관점들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 가까운 미래에 다른 무엇이 될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중단없는 관심을 송신하죠. 저로서는 어이없다 못해 부당하게 여겨지는 기대들이에요.
'무엇이 되는 것'이 중요한 세상으로부터 끝내 도망칠 수 없어서 저는 그래도 뭔가가 되었습니다. 외화를 버는 노동자가 되었어요.
나인 투 파이브의 시간을 일하고, 거리의 나무가 숨쉬는 소리에 귀기울이고, 외진 거리의 가로등에 날아드는 나방들 조차 감미롭게 바라보고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생이 폭발해버릴 정도의 환희는 없지만 자아가 상처입을 정도의 고통도 없어요.

어제 오후, 새 프로젝트 PT 후  유리 천장으로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회의실에 탈진상태로 널부러져 하늘을 오래 바라봤습니다.  미세먼지 위기의 나날임에도 흐릿하나마 구름이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더군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또 깨달았습니다.  '난 흐린날에도 구름을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
이만큼만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것, 더 이상은 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저의 성취입니다. 

"넌 뭐가 되었니?"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저는 구름의 애인이 되었습니다. 구름은 제 귀에다 텔레파시로 낯선 정열의 말들을 흘려 넣어줘요. 그러면 저는 털이 곤두선 고양이 한 마리를 머리 속에 집어 넣은 듯, 불꽃 같은 상상에 싸여 이름 모를 감각의 거리를 배회하기도 합니다. 
저는 노동자가 되었고 구름의 애인이 되었습니다. 구름이 흘러가며 들려주는 거대한 음악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됐어요. 더 이상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걸까요?

덧: 이 글을, 이 신새벽에 - 아무리 제가 깨어 있는 시간이라는 걸 알더라도- 국제전화해서 "이제 더 미루지 말고 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라는 뜬금포 조언을 날리신 작은아버지에게 보냅니다. (깊은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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