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20 12:18
이 노래를 처음 듣는 순간 저는 기이하게도 횡스크롤 고전 닌자게임을 떠올렸습니다. 발빠른 템포와 중간중간 섞이는 표창 소리 비슷한 사운드가 제게 가장 익숙한 이미지를 연상시켰던 것 같습니다. 반복되는 원코드의 멜로디도 오르락내리락하며 어딘가 조급히 가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해당곡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조금 기이한 우연을 느꼈습니다. 제가 느낀 인상과 뮤직비디오가 주는 인상이 어느 정도 비슷했거든요. 어딘가로 주인공이 계속 질주한다는 인상이 비슷했습니다. 이 뮤직비디오에서 백현진은 불륜 현장으로부터 탈출해서 계속 뜁니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심지어 주인공인 백현진의 캐릭터 본인도 목적지를 알고 뛰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저 어딘가로 뛰어가는데, 그 과정에서 별의별 쌩고생을 다합니다. 높은 데서 추락하기도 하고, 넘어져서 손에 변도 묻습니다. 마지막에는 차에 치이기까지 하는데 그래도 일어나서 또 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백현진은 어딘가로 사라집니다.
일단 저 뮤직비디오의 내용만 보면 인생 자체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이란 곧 늘 더 높은 곳을 향해 상승하거나 꿈을 성취하면서 사는 순간들의 연속이 아닙니다. 가장 추접스러운 순간에서 그저 끝없이 도망치며 그 도피 중간중간에 별의별 더러운 꼴을 다 보면서도 앞으로, 혹은 내일로 나아가는 걸 멈출 수 없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릅니다. 현재 21세기 이후의 힙합계가 함축하는 이미지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미지죠. 무한한 상승과 자본을 통한 압도적 지배, 이것들과는 정반대로 뱅버스의 뮤직비디오는 메리야쓰 빤쓰차림의 아저씨가 '노답인생'을 사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뮤직비디오는 모든 이가 외면하고 싶어하는 악몽의 형태와도 닮아있습니다. 한번씩 꾸게 되는, 인파 한가운데에서 벌거벗고 뛰는 그런 종류의 꿈처럼도 보이죠.
그러니까 왜 이런 경박하고 신나는 노래에 이런 내용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는지 물어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힌트는 이 노래 뱅버스가 포함된 "뽕"이라는 장르를 듣는 주된 감상자의 계층에 있지는 않을까요. 뽕(짝) 장르를 즐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장년층입니다. 최소한 40대 이상으로 간주될 이 감상자들에게는 그전까지 살아왔던 자기만의 험난한 굴곡들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감상자들이 아무리 신이 나고 흥겨워도 그 감흥은 이전까지 헤쳐왔던 고난과 반드시 연결되며 어떤 애환을 자아냅니다. 뽕의 이 지점이 1020이 신나는 노래를 들을 때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지점입니다. "젊은이"들이 듣는 신나는 노래는 압도적으로 미래지향적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훌훌 털어버리자, 오늘밤 클럽에서 모든 걸 잊고 뛰어놀아보자, 금요일 밤을 불태워보자, 매력적인 누군가를 만나 뜨거운 시간을 보내보자... 그 흥겨움 속에서 젊은이들은 과거와 분절되는 특별한 미래를 순간적으로나마 추구하고 또 만끽합니다. 그러나 뽕은 그렇게 미래를 꿈꾸며 우울한 과거와 현재를 망각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BPM을 빠르게 해도 과거와 현재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속되고 먼지투성이인 현재의 일상 속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250이 뽕이라는 장르에서 찾은 것은 그 빠른 비트 속에서도 탈주불가한 범속한 일상과 판타지의 강력한 고정상태일 것입니다. 어린 사람들은 그래도 '오늘밤만이라도' 라며 완전한 망가과 도피를 도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뽕을 듣는 사람들은 이미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고속버스에서 이렇게 신나게 뿅뿅거리고 씰룩거려도 이 모든 것이 고된 일상의 사이클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요. 어쩌면 뽕이라는 장르는 헛된 망상이 아니라 이 잔인한 일상성을 노래 안에 녹여놨다는 점에서 훨씬 더 솔직한 음악일지 모릅니다. 250은 뱅버스의 뮤직비디오를 통해 뽕의 감상자들에게 서글픈 리스펙트를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깨달아버렸지만, 그럼에도 이 비루한 하루하루 속에서 흥을 쫓기를 멈추지 않는 당신들의 음악과 인생을 더 느끼고 싶다고요.
2023.02.20 14:39
2023.02.20 15:35
재미있는 뮤직비디오지 않나요? 제가 또 백현진 배우를 좋아해서 그런 걸 수도 있습니다.
thoma님 감상을 들으니 저희 아버지가 떠오르네요. 휴게소에 갈 때마다 저런 뽕짝 음악이 나오면 쓴소리를 참지 못하셨거든요. 저도 청각적 소음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250의 "뽕" 앨범을 들으면서 조금 생각이 바뀌었어요. 저도 해당 장르에 대해 막 호감이 생긴 건 아닙니다. 저도 여전히 thoma님과 비슷한 생각인데, 다만 왜 이렇게 비천하게까지 느껴지는 음악을 이 젊고 유망한 프로듀서가 도전을 했을지 (참고로 250은 2022년 하반기와 23년 상반기에 가장 크게 히트한 뉴진스의 노래들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다른 방향의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이 뮤직비디오는 말씀하신 그 비속함을 단지 비웃으려고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끄적거려보았습니다.
2023.02.20 14:49
[카게의 전설]은 아케이드나 MSX, 패미콤 등으로 나온 올드스쿨 닌자 액션 게임인데,
1985년 게임이니 한참 오래된 게임이지만, 메인 BGM 음악이 나름 장르 물의 공식적인 느낌을 따라가면서 당시 전자음악 유행을 섞은 상당히 인상적인 곡이었습니다.
작곡자에 의한 공식 re-arrange 버전 곡이 있는데 이 쪽은 게임을 몰라도 한번 들어보실 만 할겁니다.
글에 올라간 '뽕' 곡과는 달리 섬나라 전통 음악스러운 멜로디라는 '인상'에서 더해지는 선입관과 90년대 후반 전자 음악 다운 개성을 섞은 곡이지요.
2023.02.20 15:49
약간 나루토 느낌도 나고, 닌자 하면 뭔가 떠올릴만한 전통적 구슬픔이 있군요. 재미있네요. 저는 일단 뱅버스를 들으면서 빠른 템포만 생각을 하고 해당 게임을 생각했는데 정작 본 게임의 삽입곡은 그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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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도 뱅버스도 전부 처음 들어요. 그냥 뽕짝을 생각하며 이 글만 읽고 쓰는데.. 뮤직비디오 재밌네요. 저는 저 뮤직비디오가 뽕짝음악에 대한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를 영상화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오래 전에 관광 버스에서 듣던, 휴게소 같은 곳에서 듣던 뽕짝메들리 같은 음악의 이미지가 그러합니다. 뭔가 노골적으로 추잡스럽고 비속하고, 그 추잡함과 비속함 속에 그냥 뭉개는데 음악 속에서도 - 탈출하듯 빠른 템포지만 추잡함과 뭉갬을 영원히 지속시키는 느낌이 들어요. 단순 반복 속에서 헤어날 수 없는 비루함 속에 헤엄치는 이미지를 그대로 표현한 뮤직비디오 같습니다. 음악이 위로나 고양이나 다른 상태로의 이동이 아니라 속옷만 입고 온갖 더러움 속에서 뒹구는 느낌요. 제가 휴게소 뽕짝을 너무 싫어해서 이런 댓글을 답니다.ㅠㅠ 양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