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 저기 들판에 남녀 30여명이 나물 캐고 있었는데, 많이 굶은 거 같은데요?"

세종 26년 4월, 병조판서 정연(鄭淵)이 임금에게 나아가 한 말입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세종이 고질병인 눈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을 들락 날락 하던 건 유명하지요. 자주 드나들다보니 아무래도 중간 기착지가 필요해서 요즘 분당구 수내동에 행재소를 만들어뒀습니다. 그런데 병조판서가 근처를 다니다가 우연히 배고픈 백성들을 보고 임금에게 알렸던 겁니다.

여기에 따른 세종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나 때문이야? 내가 여기 오래 있어서 그런 거야? 빨리 사정을 알아봐!"


임금이 오래 지방에 머물다보면, 워낙 딸린 일손들이 많다보니 여기저기 먹을 거리도 필요하고 할 일도 늘어나지요. 당연히 주변 백성들에게 민폐가 갑니다. 세종은 미리 그 점을 걱정하여 행재소 근처의 백성들에게 술과 고기, 그리고 당장 먹을 수 있는 쌀 두 섬(중요)을 내려주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세종의 발언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왜 저 백성들은 환곡이라도 받지 않느냐- 도 아니고, 하다 못해 시장가서 장돌뱅이라도 하지 그랬냐- 도 아니고, 우선 자기를 탓해서 지방 관리들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았으며 - 동시에, 괴산, 충주, 음성, 회덕, 연산, 청산, 연기, 공주, 부여, 안성, 죽산으로 관리들을 파견해서 굶주리는 백성들이 있는지를 확인하게 하고, 또 농사가 얼마나 흉작이 들었는지도 확인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충청도 관찰사 김조가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돕는 의창의 곡식이 다 떨어졌다며 곡식 15만석과 구량곡(빈민을 구하기 위한 곡식) 25만석을 달라고 요청했고, 세종은 "즉시" 호조를 탈탈 털어 27만석을 모아 내렸습니다. 이 27만석의 구성이 그냥 곡식 7만석에 구량곡 20만석. 척 봐도 백성들 구황에 더 중점을 둔 배치입니다.

그 다음 임금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렇습니다.

"충청도는 원래 땅이 비옥해서 먹고 살만한 데 이 정도인데, 평안도와 함경도는 어떻겠어?"


이런 임금님을 두니 신하도 의기 충천할 수 밖에. 그러자 충청도 관찰사 김조(金銚)가 대답하기를.


"3, 4일만 늦어도 백성들이 못 먹어 누렇게 뜰 겁니다. 이렇게 임금님이 곡식을 내어주셨으니 제가 최선을 다해서 백성들이 굶지 않게 할 거여요!"


그렇다 해도 갑자기 27만석이 누구 키우는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하니. 당연 소리가 있습니다. 승정원 쪽에서 너무 많으니 5만석 줄이는 게 어때요? 라고 슬그머니 의견을 올렸지만, 당연히 세종은 듣지 않았지요.


이거 뿐인 줄 아셨지요?
더 많이 있지만 하나만 들지요. 세종 8년에 한성의 1/5, 집 2,500채가 불타는 대화재가 발생합니다.
거센 바람 덕분에 어떻게 불을 잡을 여유도 없이 모두 불타고 이재민이 대거 발생했지요.
세종은 마침 도성을 비우고 있다가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돌아와서 구제책을 펼치지요. 이 때도 중점이 갔던 게 일단 먹고 살리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명령을 내렸지요.


"불이 난 사람들 집이랑 사람을 어른 / 어린애로 나눠서 돕고, 배고픈 사람 없게 해라."


그러면서 당장 왕궁 탈탈 털어 간장 300석을 나눠줬고, 집을 새로 지을 수 있는 목재를 공급해준 것은 보너스였습니다.

이거 말고도 세종 시대 때 굶주린 백성들 있다 치면 온갖 구휼이 벌어졌는데 너무 많으니 생략하지요.


세종 만큼 쓸데없는(?) 복지 및 인문학(훈민정음), 예술(음악)에 투자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아이를 낳은 노비에게 3년 휴가를 주고, 그것도 모자라 남편에게까지도 출산휴가를 준 일이야 그냥 행정상의 글자 뿐인 정책이요 진짜 실행은 알 수 없다고 치부할 수 있지만, 정말 시행하고 정책을 굴린 게 이렇게 보이니 말입니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공정하게 매기기 위해 공법을 제정했고, 이를 제대로 시행하기 위해 근 20년 가까이 토론을 벌이고 시험을 하고 설문조사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세종만 유별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조선시대 때 통수라는 관리는 집 곳곳을 다니며 부뚜막을 확인하는 게 일이었지요. 과부들이 부끄러워서 차마 못 먹고 산다는 말 못 하다 굶어죽지 않도록, 사는 걸 보고 못 먹고 살면 돕는 거지요.


이전에 김유정이 굶어죽은 걸 두고 세상이 변하지 않았냐고 했지만, 그 말 취소합니다.


퇴보했네요.


배가 고픈 사람이 있으면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일단 입에 뭐든 넣어주고 나서 시작해야죠.

 


쓰다가 제가 감동받았습니다. 세종마마, 당신은 정말 우리 백성들을 위한 군주이셨어요.



p.s : 이 글을 쓰기 위해 백만년 만에 조선 아고라와 조선기담을 들춰보니 신기하네요. 제가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었나...? 추억은 방울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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