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오류, 선거 후기, 노무현, 종교 본능,

2010.06.03 23:59

bunnylee 조회 수:6915 추천:1

"믿음이란 인식상의 오류가 아니라, 욕망의 오류이다." 라고 예전에 싸이에 끄적거린 적이 있었죠.

황빠들이 황구라의 사기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었죠. 황구라가 사기를 쳤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대단한 과학적 지식이 필요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어요. 그들이 황구라를 끝까지 믿었던 이유는 황구라가 대한민국을 단번에 질병 없는 유토피아로 만들어 주길 바라는 욕망이었죠. 마찬가지로, 광우병 사태 때, 광우병이 사실은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대단한 과학적 지식이 필요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어요. 광우병이 정말로 그렇게 무서웠다면, 한국도 안전 지대가 아니며 전수 검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대중들이 그렇게 간단하게 생까지 않았겠죠. 광우병 공포의 기저에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반감이 깔려있었어요. 광우병은 좋은 핑계였죠.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예전에는 불가지론에 Practically, God doesn' t exist 라는 식의 약간 유보된 입장이었다면 (나에게는 신이라는 가설이 필요하지 않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였죠? 그거랑 비슷한 태도였죠)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고 그냥 "Practically"를 떼버렸어요. 어차피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나중에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면 그 때 바꾸면 되는데, 굳이 "신"의 문제라고 해서 조심스러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그 책을 보면서 했어요. 도킨스가 종교 현상을 바라보는 1차원적 시각은 그다지 맘에 안들었지만, 적어도 신의 존재 유무를 결정하는 나이브한 태도는 좀 멋져보였어요.

 

큰 기대를 하지도 않고 투표를 하고 돌아왔는데, 출구조사에서 한명숙과 유시민이 의외로 선전을 하고, 좌희정, 우광재, 김두관이 1위를 달리니까,  자연히 노무현 대통령 생각이 났어요. 하늘에서 우릴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이 되어 버리더라고요. 무신론자인 제가 그런 망상을 하다니 말도 안돼죠. 그렇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노제와 봉하 마을에서 무지개가 보였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1주기 때 비가 적당히만 와서 노란 우비를 입고 행사를 하는 사진을 볼 때도 노무현 대통령은 그냥 아무것도 아닌 無의 상태가 아니고 뭔가 초현실적인 영향력을 가진 것이 아닐까 하는 망상으로 희망을 느끼고, 심지어 세상이 너무 말도 안되게 돌아가서 화가 날 때도, 노무현 대통령이 죽음이 이렇게 헛될 리는 없다고 믿으면서 위로를 받아요. 우리나라가 이대로 부조리의 사회로 계속 남을 거라는 서사는 저에게는 불가능한 서사예요. 저에게 세상은 그렇게 예정되어 있지 않은 거죠.

 

오늘 좌희정, 우광재, 김두관이 결국 당선되고, 한명숙, 유시민이 낙선하자, 한명숙, 유시민을 대선에서 쓰기 위해서는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다는 식의 생각마저 들었어요. 그러면서 저 "믿음이란 인식상의 오류가 아니라, 욕망의 오류이다." 라는 문장이 생각난 거죠. 신도 영혼도 존재하지 않아요. 압니다. 그런데 자꾸 그렇게 믿고 싶네요. 이런게 인간의 "종교 본능"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도킨스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유신론을 논박해도, 사람들은 믿고 싶어서 믿는 거죠.

 

쓰다 보니, 별로 건전하지 못한 선거 후기가 됐네요. 음악이나 같이 들어요.

 

David Bowie - Life On Mars?

http://www.youtube.com/watch?v=v--IqqusnNQ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3542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2801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3212
125116 고 이선균 배우의 목소리 [1] soboo 2023.12.31 525
125115 프레임드 #660 [4] Lunagazer 2023.12.31 63
125114 최근 읽은 책과 읽을 책 [6] thoma 2023.12.31 319
125113 [영화바낭] 올해의 마지막 영화는 쌩뚱맞게 뤽 베송, '니키타'입니다 [4] 로이배티 2023.12.31 315
125112 [넷플릭스] 인비저블 게스트 [2] S.S.S. 2023.12.31 217
125111 디즈니 100주년: ‘마우스 하우스’가 실패한 이유(Feat.워너) - BBC 코리아 상수 2023.12.31 208
125110 [디플] 이니셰린의 밴시 [6] S.S.S. 2023.12.31 256
125109 어제의 대설주의보와 누가 걸어간다(한국소설의 기억을 되살리다) [2] 상수 2023.12.31 171
125108 레트로튠 - through the years [1] theforce 2023.12.31 69
125107 Tom Wilkinson 1948-2023 R.I.P. [5] 조성용 2023.12.31 194
125106 Mike Nussbaum 1923-2023 R.I.P. [1] 조성용 2023.12.31 127
125105 아마존프라임 시리즈 - 미스터 미세스 스미스 예고편 [4] 상수 2023.12.31 252
125104 [관리] 23년도 하반기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0] 엔시블 2023.12.31 346
125103 [왓챠바낭] 추억 파괴인가 강화인가, 호기심에 본 '시네마 천국' 잡담입니다 [18] 로이배티 2023.12.30 410
125102 2024 영화 기대작 리스트 [2] theforce 2023.12.30 321
125101 프레임드 #659 [4] Lunagazer 2023.12.30 59
125100 지난 정권에서 그렇게 조국욕을 하며 정권과 각을 세웠던 모 기자 도야지 2023.12.30 462
125099 올해 끝나가는 동안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10] 조성용 2023.12.30 501
125098 범죄도시3 vs 독전2 ( 2023년 실망을 크게 줬던 영화) 왜냐하면 2023.12.30 185
125097 라이언 오닐 가족은 [3] daviddain 2023.12.30 19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