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12 23:23
사람이 생겨먹은 대로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직업, 직장과 관련해서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네요.
재작년 가을 쯤에는 꽤 고민에 빠져 있었어요. 3년간의 군의관 복무를 마친 뒤 갈 곳을 정해야 할 시기였거든요.
저는 굉장히 게으른 편입니다. 쉬엄쉬엄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온라인에 잡문이나 좀 끼적이며
간혹 재미있는 뭔가가 있으면 좀 공부하다 마는 게 제 생겨먹은 바에 어울려요.
저와 비슷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런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다가도 간혹 불안해질 때가 있습니다.
정체감이죠. 다들 앞만 보고 죽어라 달려가는데, 이러다가 뒤쳐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체감.
제가 이런 말 하면 싫어하실 분도 꽤 계시겠습니다만, 어쨌든 제 직종에서도 노후를 걱정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부익부빈익빈, 강자독식은 이 동네에서도 이미 보편화된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은 대략 세 가지 정도 있을 거에요.
1.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적당한 자리에서 애들 뒷바라지하며 산다. 일이 많다 해도 관심없는 공부를 억지로 할 필요가 없다.
2. 체제에 적극 순응하여 달리는 말에 올라탄다. 돈에 영혼을 팔거나, 노후가 보장되는 교직으로 가는 길을 취하거나...
3. 아예 판을 떠난다. 대표적으로 성공한 예가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이겠습니다. 물론, 완전히 떠났다고 보긴 어렵지만요.
전 언제나 이 판을 떠나고 싶어했습니다만, 그러기 위해 들여야 할 노력과 시간이 너무 커 보였어요.
실은 저 같은 사람에게 첫 번째 길이 가장 어울리죠. 일이 많다 해도 대개는 routine으로 반복되는 것들입니다.
그 분야에서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up to date하게 공부하면 됩니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권태감이 밀려듭니다.
솔직히, 권태감보다 더 큰 것은 사회적 성공에 대한 컴플렉스입니다. 시작도 안 해 보고 포기하는 듯한 느낌, 그에 따른 열패감,
이른바 잘나가는 친구들을 보며 느껴지는 초조감, 자랑스러운 남편이자 아빠이고 싶다는 욕망...
이 판을 떠나기 위해 위험부담을 안고 잘 알지도 못하는 것에 투자하기에는 늦었다는 생각...
그래서 2번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 뒤로 1년이 지났네요. 정확히 말하면 8개월간 모교병원에서 "이른바" 연구활동이라는 걸 해 왔습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동안 이것저것 조금씩 공부하며 알게된 것들도 많지요.
하지만, 그 지식들이,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포기한 대가로서 충분한가, 난 이 일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지도교수님은 일을 많이 시키시긴 하지만, 한국의 여느 대학교수들과 달리 공정하신 분입니다. 전보다 오히려 존경하게 될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 내가 해야 하는 것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
저에게는 아무 의미기 없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하다 보니 이 곳에 1년 더 있게 되었습니다.
보스께서 제가 빠져나갈 수 없는 여러 장치를 마련해 놓으셨더라고요.
언제나 친절과 상냥함을 가장하는 제 전임자도 저를 위해 주는 척 하면서 적극 수렁에 밀어넣더군요.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도와 주는 것 맞습니다. 의도는 극히 이기적이지만...)
한 번 시작한 것 어쨌든 끝은 봐야죠.
이 의미 없는 일들이 쌓이고 쌓이면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보려고요.
지금 가장 부러운 사람들은, 자기 생겨먹은 바를 깨닫고 미련 없이 떠났거나 떠나기로 한 이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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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생겨먹은 대로 살기를 거부했어요. 저 자신을 뜯어고쳐야 해서 (성형이 아닙니다 성형이ㅋㅋ) 힘이 들긴 하지만 동시에 쾌락적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신상이 밝혀지므로 꺼려지지만...
저는 생겨먹은 바를 깨닫고 떠나는 사람들이 부럽지 않아요.
제가 부러워하는 사람 유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생겨먹은 바를 아예 모르고 사는 무감각한 사람들, 다른 하나는 생겨먹은 바를 완전히 뜯어고쳐내겠다해서 성공한 사람들인데. 후자가 특히 부럽더군요. 전 이미 내 생겨먹은 바가 어떤 종자인지를 알게 되어서리.
어쨌든 끝 잘 나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