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16 14:03
이 영화가 첫 번째로 제 눈에 띈 것은 동명의 서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듀게에서 제목을 처음 봤는데, 실제 감독도 동명의 서적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저자에게 허락도 받았더군요. 개봉 이후에도 제목의 연원을 물어보면 그 책을 꼭 말했나보더라구요. 그게 좀 호감이 되었어요. (본 저자도 오랫동안 잠수했던 트위터 계정을 살려 감사 아닌 감사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오프닝을 다큐멘터리 [모던 코리아] 팀에게 제작을 요청했다고 하더라구요. KBS 영상 아카이브를 모자이크처럼 편집해서 한국의 근대가 구성되는걸 근사하게 보여준 다큐멘터리 팀에게 손을 뻗다니, 기대가 더 되었습니다. 사회학 분야 서적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영화에서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사회학적 요소들을 결합한다고 하니 기대를 늦출 수가 없었어요. 마지막으로 듀나님도 별점을 세 개 반이나 주셨더라구요. (오프닝이 흥미로웠던 분들은 [모던 코리아] 보세요, 두 번 보세요.)
그래서 이런 사회학 덕후(?) 영화가 있다니 하고 영화관에 갔는데, 올 해 본 것 중에 관에 사람이 가장 그득그득해서 깜짝 놀랐어요. 아니 다들 이렇게 사회학에 관심이 많았나? 싶은 이상한 착각도 했죠. (개봉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본 이유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영화를 계속 보면서도 '아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볼 영화인가? 사람들에게 무슨 영화를 보여주는(?)거야?' 싶었어요.
영화 내용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예고편에 나온대로, 서울에 모종의 거대한 지각변동 재난이 왔는데 아파트 한 단지만 살아 남아요. 주인공들은 그 아파트에 살던 한 부부고, 이병헌은 어쩌다 뽑힌 아파트 대표입니다. 각박한 재난살이에 외부자들을 몰아내고 아파트 주민끼리 잘 살아보기 위한 여러 선택들의 연속이죠. 그리고 여기에 대한 해석들은 굉장히 많은 분들이 써주셨으니까 하나 더 얹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다 보고나서 저는, 완성도가 아주 높다고는 할 순 없지만 신파도 최대한으로 줄였고 군더더기도 크게 없었던 나쁘지 않은 영화다, 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본 애인이 아주 깊게 분노해서 한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어요.
저 - 이 영화가 이렇게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지도 모르겠고, 앞으로 그렇게까지 흥행할 지 모르겠다.
애 - 사람들은 이병헌에 감정 이입하고, 가부장으로 고생한 남자들한테 이입할 것이다. 영화가 그렇게 나왔다. 그런고로 그런 의미로 흥행할 것이다.
저 - 아니, 대놓고 '암탉이 울면 어쩌고' 하면서 비꼬고, 총체적인 내용이 비꼬는 내용에, 마지막에 우물안 개구리 식으로 해설되지 않는가?
애 -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박보영은 그저 민폐 캐릭터일 뿐이고, 하는 것 없이 안전한 공간에서 얻어먹기만 하다 이상론을 펼치는 식으로 이해될 것이다.
애인은 박보영이 다른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주어지지 않은 것에 상당한 답답함을 느꼈나 보더군요. 다시 생각해보면 영화상 원천적으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단일 통로가 제시되었어요. 심지어 내부고발자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고요. 개연성이 여성들을 오도가도 못하게 막은 시나리오였던 거죠. 이후 [하트 오브 스톤]을 보고 마음을 풀었습니다만 (이 영화가 별점 두 개 밖에 안 된다고 생각되지는 않더군요) 여러모로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후 여기 저기의 평을 읽어봤는데, 애인의 말 대로였습니다. 이동진마저 이병헌의 신들린 연기를 칭찬하더군요. 대부분 이병헌이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이병헌의 죽음에서 영화를 잘랐어야 된다고 생각하더라구요. 뒤는 군더더기며, 심지어는 외부자를 숨겨준 사람들에게 죄송하다는 말 200번으로는 부족하고 목매달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봤습니다. 재난은 이미 와 있으며, 하루 하루의 삶이 딱히 그 아파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제게는 상당히 섬뜩한 주장이었죠.
개인적으로 황궁 아파트 바깥에서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상황에서, 외부와의 외교와 내부의 정치가 비틀어졌기 때문에 일어난 파국이라고 생각했고, 여주인공의 진실 토로는 그 파국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어요. 주변 이웃들에게 업보를 한껏 쌓았기에 습격과 매복을 당하고, 결국 통치에 불만을 가진 내부자로 인해 외부로의 벽도 무너졌죠. 하지만 그런 상황들은 잘 보이지 않았나봅니다. 그래서 이 영화 자체보다는 이 영화의 여러 주류 해석들이 더 흥미로운 영화가 되었습니다.
궁금한 점을 몇 가지 뽑아 보면....
도균(검은 테 안경 주민)의 죽음 이후 그의 시체를 태운 직후 물이 터집니다. 이 맥락은 무엇인지, 라고 쓰고 나서 이런 저런 읽었던 글을 떠올려보니 모세로 인해 반석의 샘물이 터진 성경 내용이 떠오르는군요. 그렇게까지 노골적인 성경 인용인가 싶긴 하지만.
이병헌이 결국 박지후(문예원)를 절벽에 던져 버리고 (심지어 화장실 쓰레기를 버리던 곳에) 아무도 그걸 저지하지 못 하는데... 꼭 이렇게 했어야 했나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박지후는 그저 또다른 냉장고에 들어간 여성 캐릭터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인지.
마지막에 결국 김민성은 죽고 명화만이 여성 공동체에 도착하게 됩니다. 역시나 굳이 민서준을 죽였어야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데, 어떤 합당한 결과로 인한 건지 그런 부분도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가는 길에 아래서 올려다보는 사람 씬은 왜 넣었을까요.)
여러 장면에서 나온 바둑돌들은 딱히 궁금하진 않고. 애인 말에 따르면 처음 이름 적을 때 ㅁ부터 적는건 자기 이름이 아니어서 그랬다는 디테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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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보다 정말 망해버린 세상에서의 아찔함이 리얼하게 느껴지는 영화였습니다. 특히 자식 없는 부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처음 봐서 더 이입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원작 웹툰도 봤었는데 그 웹툰은 딱히 바랄만한 것도 없었던 음울한 내용 위주었습니다. 드라마 [해피니스]와도 겹쳐서 비교되는 부분들이 몇몇 떠오르긴 하지만 이 영화를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봐야 하는 건가 싶은 의구심도 있어 이 정도만 느낀점을 써봅니다. 휴, 이제 듀게 다른 분들의 글을 자세히 읽어봐야겠습니다.
아, 그리고 ... 영화에서 기묘한 고어 분산 및 편차의 이질감을 느꼈는데요. 뭐라고 해야 할까, 요즘 영화들이 끝없이 잔인해지는 판국인데, 이 영화에서는 정말 잔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을 때는 딱히 일어나지 않고, 그렇지 않은 부분에선 상당히 묘사가 잔인하고 해서 독특했습니다. 시체들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영화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반면에 인간을 상해하거나 괴롭히는 부분은 특정 장면 빼고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걸 안 보이게 하는게 아니라 그냥 안 나옴) 그런게 꽤 특이하게 다가오더군요.
2023.08.16 14:12
2023.08.16 14:19
저는 애인 이야기에 꽤 공감을 했고, 그걸 놓쳤다니 아직도 별 생각없이 사는구나 싶은 쪽이었어서요 ㅋㅋ. 이병헌이 여성이었으면 훨씬 입체적이 될 수 있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실제 그랬다면 아마 또 반응이 뒤집어졌을 거라는 가정을 하며 마음이 씁쓸해졌습니다 ㅋㅋ. 실제로 그렇게 쎈 여성들도 많이 있는데 ([사이렌: 불의 섬] 인물들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었어요 ㅋㅋ) 아마 그랬으면 관객 대부분이 '개연성'이라는 이름 하에 납득을 못 했겠죠.
그런데 애인이 많이 화가 난 이유 중 하나가, 자기 자신도 이병헌의 선택과 프로파간다에 내적으로 수긍을 했기 때문일 거에요. 저도 이런 시원한 사무실에 앉아서 과연 도균의 반 만큼이나 할 수 있나 생각해보면 자신이 없습니다 ㅋㅋ. (남편 이름은 고쳤습니다. 이름을 못 외워서 여기 저기서 보고 넣었는데 역시나.)
2023.08.16 14:21
노숙자1은 감독 동생이자 밀정에서 콧수염 기르고 누구 함부로 뺨때리는 역할이었던 엄태구배우가 특별출연했는데, 중반 방범대원이었던 상황에서, 부랑자 패거리들이 자판기 깨고 얼음이 된 음료를 먹던 상황에서 처지가 많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때 천국같은 (사람을 꼬셔서 인육으로 만들어 먹는) 아파트 이야기를 하죠. 그 이야기가, 마지막 대사가 있는 결말로 이어진 게 아닐까... 결말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는 남성 하나, 여성 두 분은 일종의 예수탄생의 동방박사 상징이라는 설도 있더군요.
2023.08.16 14:38
이 영화에서 수직적인 시선 교환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역시 여러 번 봐야 잡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노골적으로 검은테 안경 주민이 아래로 내려다보고, 주민 일동은 올려다보죠. 아파트 탐색자 무리도 아래로 내려다보고, 말씀하신 그 분들이 등장하는 두 장면 다 위로 올려다보거든요. 방이 없으면 살아 남기 어려웠던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있는가 싶기도 하고요.
2023.08.16 20:53
애인 님의 답답함에 공감하며..ㅎ
보고 싶은 대로 볼 사람들이 많으리라는 예상이 맞네요. 그런데 뒷 부분이 군더더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군요. 이 아파트를 벗어나면 다른 식의 공동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보여 주는데요. 이 사람들이 사는 곳은 옆으로 누운 아파트였지요. 당연히 가재도구 포함, 기존의 살림 형태는 다 기울어져 있고요. 세상이 바뀌었음 또는 내 것을 주장하며 울타리 치고는 살아갈 수 없음을 보여 준 것 아닌가 했는데 말입니다. 성경과 연결짓는 감상도 있나봐요. 감독의 의도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크게 의미 있는 해석일까 싶기도 합니다.
2023.08.17 09:12
성경 알레고리는 그 설명을 보기 전에도, 아파트 대문에 피와 같은 페인트를 칠할 때 직감되긴 했습니다. 장자를 빼앗아간 이집트의 마지막 재앙 말이죠. 나중에 다른 평을 보니 이병헌의 숨겨진 이름이 "모세범"이라더군요. 이 정도면 감독이 면전에서 그것도 넣었다고 자백한 셈입니다. (그러고보니 모세도 이집트에서 자기 민족을 괴롭히는 사람을 죽이고 도망자가 되는군요.) 다만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비유라 딱히 깊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신도 멕이면 멕였지 신앙적인 교훈으로는 가지 않을 것 같을 뿐더러. (또 그러고보니 김영탁네 집 대문엔 어느 교회 다닌다는 십자가 스티커가 있었네요.)
마지막 공간도 노골적이었죠. 저는 세계가 뒤집어졌다는 뜻도 되겠지만 그 보다.... 엄청나게 넓은 아파트의 옆면 만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치는 주거 공간이 되는구나라고 느꼈습니다 ㅋㅋ.
2023.08.17 13:05
제가 요새 느끼는 건 디피의 감상들도 그렇고 현실의 폭력을 전시하며 그에 대한 자성을 이끌어내는 건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 것 같다는 겁니다. 이제 다수의 사람들이 각자도생이나 현재진행형의 폭력을 매체에서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그걸 있는 그대로 인정해버리죠. 그런 면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한가지 실수를 했는데, 관객들이 관찰자 입장으로 이입할만한 캐릭터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황궁아파트의 입주민 다수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바라볼 때 박보영이나 김도윤은 뭔가 별종처럼 그려져있습니다. 심지어 외부인들의 시점조차도 거의 없죠. 그걸 그려냈다고 해서 한국의 관객들이 이 교훈극을 이해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명화나 혜원이 김영탁을 모세범이라는 본명으로 분명히 부르는 장면쯤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2023.08.17 14:12
폭력을 보면 자력구제부터 떠올리는 시대라고 할까요. 마동석 유니버스도 그렇고, [모범 택시]도 그렇고 한국 매체에서 이미 정부는 없고 개인들이 알아서 해야하는 형국입니다. (심지어 [더 문]에서도 정부는 무능하고 하는 거라곤 대국민 발표 쯤이고, 지연 혈연으로 문제를 해결하죠. 규칙은 어기면서 알아서.) 최근 한국 영화들의 고어 수위가 분명하게 꾸준히 올라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게 진짜로 행해져야 할 일처럼 느끼지 저렇게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질 않고요.
듀나 님 말씀처럼 여기서 더 생각하기란 훨씬 힘든 일일 것 같아서, 저도 시나리오 다시 쓰기를 계속 상상해 보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더 나았을까. 박지후에게 좀 더 활동과 권한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어요. 내부적으로 젊은 사람들을 결속해서 어떤 정치적 반향을 구성했다면 어떨까 싶고.
2023.08.17 14:53
김영탁이 혜원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밀어서 죽여버리는 것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서로 뒤엉켜서 마주보는 상황에서 입주민이 아닌 김영탁이 입주민을 죽이려한다고 그 사실을 바리발 욕하면서 고발하는 장면 같은 게 떠오릅니다... 그 부분이 좀 아쉬운데 2년간 계속 후반작업을 한 결과물이니 감독님의 최선의 선택이었으리라 또 생각합니다
2023.08.17 15:05
그랬군요. 어쩐지 왓챠피디아 등에서 연도가 2021로 적혀있더라구요. 전체적으로 굉장히 잘 정돈되어 있는 감각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뚝심 있게 구성되었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자기 완결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야겠네요.
2023.08.17 14:04
성경 알레고리를 떠올려보니 끝도 없이 나오기는 하네요. 그런데 그 많은 것들이 역행한다고 할까요.
모세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자기 민족를 탈출하여 신세계로 인도하는 인물입니다. 책에서는 자기 민족을 핍박하는 사람을 죽인 후 이집트 왕가에서 나와 광야로 도망가는데 영화에서는 사람 죽인 후 '황궁' 아파트에 뻔뻔하게 계속 사는군요. 책에서는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인도했다고 하는데 영화에서는 불 기둥을 멀뚱멀뚱 보고만 있습니다. 책에서는 재앙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죽은 양의 피를 대문에 바르지만, 영화에서는 탄압하는 자들의 대문에 피와 같은 페인트를 바르죠. 책에서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물을 구해내지만, 영화에서는 사람을 죽이고 태운 후 물을 얻게 되는군요. 책에서는 40년 간의 고생 끝에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지만, 영화에서는 끌려가지 조차 못 하고요. 책에서는 신에게 규칙을 받지만, 영화에서는 직접 규칙을 만들고... 이 알레고리로 봐도 안티-모세라고 해야 하지 않을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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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나름 잘 읽었습니다.(그런데 명화의 남편 역 배우분 이름을 약간 틀리신 듯...?ㅎㅎ) 왠지 제가 뭐라고 지적할 사안은 아니지만... 애인분의 반응도 뭔가 난감하네요. 하긴 ㄴㅁ위키에서도 처음엔 명화캐릭터다 답답하다, 고구마다(요즘 사람들이 못견디는 거) 그런 반응이었다가 차츰 이성적인 이야기로 캐릭터를 푸는 걸 보면서도... 암담합니다. 뭔가 요즘 사람들은 합당한 논리나, 자기 생각에 대한 메타인지 없이, 무조건적인 자기합리화를 위해 신경질적으로 조건반사식 반응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