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과 잡채

2022.12.01 01:22

Sonny 조회 수: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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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당근은 '당근이지'의 유행어로 받아들였는데 잡채는 '00 그 잡채'의 유행어로 받아들이기 싫은 걸까요. 일단 먹거리인 당근과 잡채의 디자인적 차이를 뽑을 수 있겠습니다. 당근은 딱 봤을 때 밝은 주황색과 녹색이 어우러지면서 일단 건강하고 활기찬 느낌을 줍니다. 그러면서도 다소 오동통한 느낌 때문에 다른 식으로 시각화를 했을 때 직관적으로 귀엽게 느껴집니다. 당근을 이모티콘이나 간단한 이미지로 만들었을 때 뭔가 자연적이면서 유아적인 느낌도 납니다. 오죽하면 '당근마켓'이 고유 브랜드로 자리잡았겠습니까. 당근마켓이라면 돈천만원짜리 명품을 거래해도 뭔가 아기자기한 걸 사고 팔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실생활에서 장바구니 안에 조용히 담겨있을 것 같은 느낌도 있죠. 동물들도 즐기는 밥이기도 합니다.


당근에는 일종의 '채소빨'이 있습니다. 조용히 농장에서 자라다가 얌전히 추수를 당하는 채소들은 무해하면서도 가까운 느낌이 듭니다. 오이, 양파, 대파, 감자, 고구마, 토마토 같은 농작물들은 특히 그렇죠. 예를 들어 레드벨벳의 아이린은 본명이 배주현이라 별명이 "배추"입니다. 별다른 연관성이 없는데도 그냥 발음의 유사성 때문에 바로 갖다 붙여지는 게 채송의 명칭입니다. 이것은 동물과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개나 고양이 같은 것들도 귀엽고 친근하지만 어딘지 활동적이고 통제가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그보다는 한참 얌전하고 동적인 느낌은 없지만 '싱싱하게' 보이는 생명력을 표현할 때는 당근 같은 채소가 제격입니다. 


이미지의 측면에서뿐 아니라 당근은 언어학적으로도 귀여운 어감이 있습니다. 유성자음 ㅁㄴㅇㄹ 중 ㅇ과 ㄴ을 받침으로 쓰기 때문에 당근, 했을 때 발음이 통통 튀는 탄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술자리게임에서도 당근 게임이 있죠. 바니바니바니바 당 근 당 근....어쩌면 이건 채소 중에서도 당근만이 가진 고유의 강점일지 모릅니다. 같은 채소라 해도 감 자 감 자 하면서 게임을 하진 않으니까요. 우엉은 어쩐지 좀 늙수그레한 느낌이고 인삼도 발음만으로 귀여워하기에는 수염이 너무 많고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유행어가 된 '당근이지'의 어감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본래 표현인 '당연하지'가 ~하지 라는 어미로 끝난다는 점에서 벌써 싱그럽고 활기찬 느낌을 주는 문장입니다.(당근이지, 라고 하지 당근이다, 라고 하진 않죠ㅋ김성모 만화라면 또 모르겠지만...) 당연하지, 라는 문장을 쓸 때는 좀 캐쥬얼한 대화를 나누다가 상대가 약간 믿음이 흐릿할 때 그 불신을 가볍게 해소하는 목적에서 쓰는 경우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유행어의 뿌리 자체가 이미 발랄한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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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채도 색깔로만 보면 경쟁력이 없진 않습니다. 녹색과 주황색이 갈색 바탕에 어우러진 모습은 다른 면요리들보다 훨씬 더 깔끔하면서도 채소의 생명력을 담아내고 있죠. 그러나 당근이 가진 활력에는 갖다댈 수가 없습니다. 잡채의 가장 베이스가 되는 면의 색깔이 간장으로 쪼려진 '갈색'이라는 점에서 어딘가 다운톤의 느낌을 주죠. 그렇다고 여기저기에 어떤 이미지로 인용된 바도 별로 없습니다. 주로 명절에 등장하는 반찬이라는 점에서 어딘가 고루한 느낌도 좀 있습니다. 


잡채는 불운하게도 '면빨'이 들러붙습니다. 면요리는 주로 부정적인 경우에 사용됩니다. 웃기는 짬뽕(짜장), 발음의 유사성을 활용한 사례로 "완전히 짜장난다" 같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면발이란 게 또 아무리 갓 요리했어도 이미 한번 쫙 끓이거나 볶아서 나온, 늘어져있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에너지틱한 인상을 주지 못합니다. 먹는 모습을 상상해봐도 당근은 토끼 같은 것들이 아삭아삭 갉아먹는 귀여운 이미지가 바로 출력이 됩니다. 그에 반해 잡채는 젓가락이 오고가며 뭔가 좀 번잡스럽고 때로는 불결하기까지 한 이미지로 연결되죠. 


언어적으로 잡채는 이미 발음에 결함이 있습니다. "잡쳤다"는 발음과 너무 유사하기 때문에 좀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거센소리인 ㅊ으로 끝나기 때문에 날숨이 강하게 나오면서 뭔가 뱉어버리거나 건성으로 처리하는 느낌도 줍니다. 귀에 딱 꽂히거나 여러번 발음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00 그 자체' 라는 단언적인 의미 또한 거슬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xx는 완전히 00과 유사하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00 그 자체라고 하는 것은 지독하게 과장된 은유법이죠. 어떤 이미지가 바로 다른 이미지로 치환되는데, 이 때 생기는 이미지의 언어적 점프는 요즘 1020 세대가 컨텐츠를 즐기는 방식과도 통합니다. 기존의 전통적 방송에 비해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바로 다음 장면으로 컷이 되고 넘어가버리거나, 아주 짧게 웃음이나 당황을 보여주고 바로 다음컷으로 넘어가는 유튜브의 편집 방식과도 좀 유사합니다. 뫄뫄가 솨솨 그 자체라고 하는 것은 순식간에 어떤 이미지의 전환을 이뤄내면서 완전한 동일성을 획득했다는 선언입니다. 이런 의미적 전환이 너무 빠르고 과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유행어가 입에 안붙는 이유야 많겠지만, 일단은 이 정도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유행어라는 것도 집단적으로 어떤 심상을 만들어내서 공유하는건데 왜 저는 거기에 편승하거나 스스로 소외되는지, 그 근거를 써놓고 싶어졌네요. 잡채라는 유행어 짜증 그 잡채... 라고 하면 안되는 건 당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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