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19 00:58
얼마 전에 샀던 윌리엄 포크너의 '나이츠 갬빗'(미행)을 읽었어요.
1949년에 나온 책으로 1932년부터 1949년까지 발표된 여섯 편의 중단편 소설들, '연기, 몽크, 수면 위의 손, 내일, 화학적 실수, 나이츠 갬빗'이 발표순으로 묶여 있습니다.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문학동네)를 - '고함과 분노'(열린책들), '음향과 분노'(그 밖의 출판사) - 읽을 때는 예사롭지 않은 장애를 지닌 인물의 특성과 작가의 문체가 결합되어 매우 독특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문장에 쉼표와 대시( - )가 많이 사용됩니다. 이런 쉼표의 잦은 사용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고 끊어지는 인물의 어수선한 사고의 흐름을 보여 주는 것 같아서 그럴 듯했어요. 또 지시어가 무엇을 지시하는지 애매하게 느껴지는 점도 상황과 어울리며 적절하고 절묘하달까 그랬습니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민음사) - '내가 누워 죽어갈 때'(부클래식) - 역시 일가가 겪는 상식적이지 않은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구성원들 내면의 웅얼거림 같은 것이 작가의 문체와 어울렸고 묘하게 빠져드는 면이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이전에 읽은 위의 두 소설에서 내용과 문체가 어울리는 포크너 소설의 맛을 보게 되었고, 내용이 갖는 특유의 막막함에 매력을 느꼈고, 호감을 가지며 작가의 이름을 머릿속에 갈무리 했지만 읽는 동안은 페이지 넘기기가 쉽지 않았고 자주 앞 부분으로 돌아가서 확인해 가며 읽는 수고가 따라야 했습니다.(호, 요 문장 쓰고 보니 포크너 문장스럽습니다? 제가 영향을 잘 받습니다.) 역자의 탓은 아니지 싶었으나 때로는 번역 탓도 하게 되고요. 작가가 어찌 썼든 안 그래도 어려운 소설, 번역의 과정에서 좀 친절한 다듬질이 필요했지 않을까 그래도 되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두 번이 아니고 지시어가 뭘 가리키는지 바로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거듭되자 에라이 모르겠다, 심정으로 대충 넘어가게 될 때도 있었고요. 그 중에서도 매우 대충 읽어서 읽은 걸로 치기 어려운 소설이 '곰'(문학동네)이고요.
아마도 영어권 사람들은 문장에서 리듬감도 느낄 것이고 단어의 뉘앙스가 주는 분위기도 있을 거고, 술술 읽기 어렵다 해도 우리보다 이 작가의 소설들을 즐길 여지가 많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나이츠 갬빗'을 읽으면서는 여기 수록된 여섯 편의 소설을 댁들도 추리 소설로 정말 즐겼냐고 물어 보고 싶었네요... 그러합니다. 추리 소설에서 이 작가가 그렇게도 즐겨쓰는 지시어가 뭘 지시하는지 혼동을 거듭하고 결국 이해를 못 하는 지경이 되자 읽어나가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가장 그랬던 작품이 표제작인 '나이츠 갬빗'이었고요. '그'는 앞서 서술한 이들 중에 누군가? '그것'이라니 무엇 말인가? 게다가 쉼표가 여럿 들어간 긴 문장에서 마지막에 서술어를 딱 봤을 때 이 서술어의 주인이 뭐였지? 대체 누구에 대한, 무엇을 설명하는 문장인지 길을 잃습니다.(ㅎㅎ 아니다 ㅠㅠ)
포크너를 많이 좋아하시면 당연히 이 소설집도 좋으실 겁니다. 저는 이 작가의 글의 특징이 이번 소설들에선 더 난이도가 높았고 다 읽고 난 후의 보람은 약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런 것이 아님이 확실한 것이 책 뒤에 신혜빈 옮긴이가 후기 끝에 각 소설에 대한 짧은 요약을 첨부했네요. '포크너가 설계한 미로에서 서성이는 독자가 있다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면서요. 하하;; 하지만 세부가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지 큰 맥락의 줄거리가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그리고 위에 제가 번역이 좀 친절했어야 한다는 불만을 썼는데 그에 대한 답이라도 하듯 옮긴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포크너 특유의 길고 복잡한 문장과 의식의 흐름 기법이 역시나 두드러지는 소설이라, 단순히 이해하기 쉽도록 문장을 매끄럽게, 짧은 길이로 토막 내지 않는 것을 번역의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포크너의 문장은 이해를 거부하는 듯 장황하고 난해해 보여도 읽다 보면 묘하게 구어체 같은 특유의 호흡과 리듬이 있다. 번역문에서 이를 구현하는 것이 번역자로서 세운 큰 목표이자 도전이었다.' 라고요. 음, 삼 년 동안 고생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편집자의 후기도 드물게 첨부되어 있습니다. '워낙'까진 아니라도 좋아하는 작가이고 추리소설에 대한 기대 등이 저와 비슷한 지점이 있어 조금 옮겨 봅니다. '이 책을 담당한 나는 이 책을 안고 있던 삼 년 간 포크너를 악마라고 불렀다. (중략) 끝나지 않는 문장들, 그 안에 얽혀 있는 미로 같은 서사, 불분명한 호칭들, 쉼 없고 장엄한 거인의 호흡 같은 진행, 은연중 읽히는 수법, 필력, 잘 따라가고 있는 건가 의심이 들지만 그런 의심에는 심드렁한 작가관...(중략) 개인적으로 워낙 좋아하는 작가이고 그래서 고유의 문체에서 오는 어려움도 다루면서 내내 기쁠 것 같았고, 또한 포크너지만 문학성을 짙게 띠기보다는 추리소설이니 약간 대중성 있게 쉽게 풀어내지 않았을까 하는 예상을 했는데 그건 오해라는 게 작업 초기에 바로 판명되었다.' 라고요.
마지막에 수록된 '나이츠 갬빗'에 여섯 편 모두의 주인공인 개빈 스티븐스의 개인사와 얽힌 사건이 나오는데 포크너 자신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요. 1차대전 참전, 어려서 사귄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 나이들어 그 여자와 결국 결혼하게 됨. 포크너도 그랬다고 합니다. 순정남이었던 것인가, 마초남이었던 것인가, 미국 남부의 남자니 둘 다였을 확률이 높겠습니다. 끝.
2023.08.19 12:20
2023.08.19 13:17
맞아요. 작가가 미국 남부의 토착적 삶에 상당히 집착합니다. 윗 글에 소설들 내용은 생략했는데 농장에서 바깥 세상과 담쌓고 흙만 파며 고독이 뭔지도 모르며 위스키와 담배를 벗하고 사는 중장년 백인 남자들의 삶을 옹호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 이어온 삶의 방식으로 변하지 않는 인간성을 유지하는 인물들을 지지하는 작가 같습니다. 문학으로 뭔가 엄숙하고 난해한 포크송을 부르는?? 철자는 다르지만요. ㅎㅎ 댓글 감사합니다.
2023.08.19 14:14
글 잘읽었어요. 감사합니다. thoma님의 글은 언제나 재미있어요!
한국어 번역의 극악에 대해서는 글 찾아읽었어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는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로 출간되어 있는데 이는 오역이다. 민음사 판은 영문학자가 번역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오역이 많다." 이번에도 재미있는거 많아요 :)
포크너는 총 여덟펀의 시나리오를 쓰거나 각색에 참여했는데, 거의 하워드 혹스 작품이고 한편은 죤 포드거네요.
레이먼드 챈들러가 쓴 필립 말로 시리즈의 첫 번째 장편 <빅 슬립 The Big Sleep> 일화가 재미있어요.
"제작 과정이 순탄치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제작사의 간섭으로 재촬영/편집이 여러번 이뤄졌으며, 원래는 1944년에 개봉 예정이였으나 계속 밀려 1946년에 두번째 판본이 개봉했다. 게다가 엄격한 검열로
원작에 있던 성적인 장면들이 잘려나갔다. 애초에 각본 단계서부터 문제가 많았는데, 유명 각본가 리 브래킷과 미국 문학의 거장 윌리엄 포크너가 참여했을 정도로 공을 들였지만, 정작 각본가들이 각본 쓰다
테일러라는 극중 인물이 자살한건지 살해당한건지 햇갈려, 원작자 챈들러에게 연락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저는 포크너가 작업한, 또 원작인 영화보기 이제 아주 힘들겠네요.
아트시네마나 기타 등등 보러다니는게 고달퍼서 다 그만두었거든요.
2023.08.19 19:08
이 책의 역자와 편집자도 얘기하듯 번역이 어려우니 오역도 많이 있나 봅니다. 번역이 힘든 점이 포크너의 작품이 우리 나라에 많이 소개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네요.
소설을 읽다 보면 일부러 이렇게 에둘러 쓰나 싶을 정도인데 진입 장벽을 높여서 독자의 수고를 유도하는 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파리 리뷰인가의 인터뷰를 보면 질문자가 당신 소설은 두 번 세 번 읽어도 이해가 안 된다는 독자들이 있다,고 말하자 그러면 네 번 읽으라고 전해 주시길, 이라고 답합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 DJUNA | 2023.04.01 | 33058 |
공지 |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 엔시블 | 2019.12.31 | 52223 |
공지 |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 DJUNA | 2013.01.31 | 362632 |
124333 | 듀나님이 용기를 내셨으면 좋겠어요. [4] | 주근깨 | 2010.07.11 | 4894 |
124332 | 머지않아 벌어질 세기의 대결 [2] | egoist | 2010.07.11 | 2372 |
124331 | 오늘은 수정냥 탄신일이라는군요 ^^ [5] | 감동 | 2010.07.11 | 2913 |
124330 | [질문] 어제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외 관련 잡담 [6] | 가라 | 2010.07.11 | 2596 |
124329 | [일요일아침에도바낭] 춘천닭갈비, 클레이사격, 출근 [6] | 가라 | 2010.07.11 | 2583 |
124328 | 서울 지금 날씨 어떤가요? [10] | 스미레 | 2010.07.11 | 2388 |
124327 | [듀나인] 노래제목이 궁금합니다. [1] | virtuald | 2010.07.11 | 1893 |
124326 | 맹룡과강에 출연한 윤아 [11] | 이정훈 | 2010.07.11 | 4837 |
124325 | 빵과 계란의 오묘한 조화 [14] | 걍태공 | 2010.07.11 | 3924 |
124324 | 빚 원금 1,700조원 [2] | Apfel | 2010.07.11 | 2959 |
124323 | 빙수용 팥조림을 만들고 있어요 [8] | 살구 | 2010.07.11 | 3109 |
124322 | 유세윤 UV 홈쇼핑 동영상 대박 [11] | 사과식초 | 2010.07.11 | 5756 |
124321 | 주절주절(셜록님 아님) [24] | 안녕핫세요 | 2010.07.11 | 2606 |
124320 | 등업고시 통과,,,안녕하세요. [8] | 무치 | 2010.07.11 | 1781 |
124319 | 등업되었습니다! 비가 많이 와요 [5] | Tristan | 2010.07.11 | 1661 |
124318 | 듀게토토 - 상품 없는 축구 우승팀 예측 (문어냐 펠레냐) [9] | Apfel | 2010.07.11 | 1905 |
124317 | 연애바낭, 또 실패한 듯. [2] | 구박해 | 2010.07.11 | 2886 |
124316 | 세기의 대결, 당신은 평생 무인도에 가게 되었습니다 [18] | 셜록 | 2010.07.11 | 2937 |
124315 | 잘생긴 여자 스타 [9] | 빠삐용 | 2010.07.11 | 4951 |
124314 | 오래오래 보고 싶은 유튜브 영상 추천해주세요 [15] | 셜록 | 2010.07.11 | 2506 |
포크너는 이름에서 뭔가 포크송 같은 느낌이 나요. ^^
네. 포크너 소설을 한 권도 읽지 않아 댓글을 달 수 없어 슬퍼하다가 몇 자 적어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