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톨스토이인가요, 도스토옙스키인가요? 라고 선호를 굳이 묻는다면 저는 도스토옙스키 쪽이라 생각해왔어요.

나보코프는 문학이 자신을 흥미롭게 하는 관점이 되는, 탁월한 수많은 예술가의 창조물이라는 기준에서 보았을 때 도스토옙스키는 위대한 작가가 아니고 유머가 있긴 하나 진부함과 황량함을 지닌 평범한 작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 언급을 할라치면 난처함과 곤란함을 느낀다고.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에 그럼에도 도스토옙스키가 다루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주제를 가르칠 만큼 학술적인 교수가 못 된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정체를 폭로하길 간절히 원한다. 책을 많이 읽지 않은 일반 독자들은 이 가치 체계가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교수로서의 나보코프는 명쾌합니다. 확신에 차서 자신의 문학관과 취향을 옹호하고 말투는 신랄합니다. 

나보코프는 네 번 - 열두 살, 열아홉 살, 스물여덟 살, 그리고 이 강의 즈음에 [죄와 벌]을 읽었다고 합니다. 열두 살 때는 황홀했으나 열아홉 살 때부터 의심을 가졌고 최근에 결함을 제대로 깨달았다고 합니다. 

저는 [죄와 벌]을 고2 때 푹 빠져서 읽고 20대 후반에 다시 읽었습니다. 수십 년이 흘렀으니 지금 다시 읽으면 느낌이 다르겠죠. 하지만 뭔가 조금 억울합니다. 나보코프가 지적하는 도 작가의 결점들과 [죄와 벌]의 결함에 수긍이 가니 더 억울한 것 같습니다.

묘사는 극히 부족하고 히스테리, 간질 발작, 정신이상의 인물들 천지에, 살아 있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관념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는 인물들, 미학적 성과는 부족한 역겨운 범죄에 대한 집착과 개연성 결핍의 감상주의적 전개...... 특히 [죄와 벌]에서 살인자와 매춘부가 함께 영원의 책(성경)을 읽는다는 문장은 최악이라고 씁니다. 추잡한 살인자와 불운한 소녀 매춘부라는, 차원이 다른 둘을 성경과 함께 트리오로 엮은 넌센스라는 겁니다.

'책을 많이 읽지 않은 일반 독자'로서 이런 지적들 자체가 혼란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들어 본 지적도 있고요. 

제가 희미하게 느끼는 억울함이랄까 반발의 마음은 좀 가혹하다는 생각 때문인 거 같아요. 

나보코프는 사람들이 이 글의 첫 줄에 있는 질문들을 나누는 것 자체가 불쾌했던 게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톨스토이의 우아함과 거대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생생하게 이를 떠받치는 세밀함과 살아 있는 인물들의 설득력 있는 감동적인 행보. 이 위대한 작가를 도스토옙스키와 같이 위치지어 언급하곤 하는 것이 보기 싫었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럴 수 있겠습니다. 나보코프가 도 작가를 조목조목 비판한 결점을 읽어 보면요.

하나마나한 소리지만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는 아주 다른 작가입니다. 여러 차이가 있지만 균형과 불균형이라는 대비를 떠올려 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작가 자신이 불균형한 삶의 여정을 거쳤고 그가 만든 작품 역시 불균형한 사람들이 불균형한 사건을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잘 아는 이들을 데리고 자기가 잘 못하는 묘사를 생략하면서 잘 아는 납득이 어려운 인간사를 펼쳐놨다는 생각을 합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작품 성격에 비해 과평가가 된 부분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 울퉁불퉁하고 기이하고 균형과 우아함을 찾기 어려운, 어떻게 보면 왜곡된 눈으로 본 인간 이야기에 이입하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긍정합니다. 

나보코프에게는 그 불균형이 예술적, 미학적으로 정제되지 않은 하수로만 보였겠지만 말입니다.


도스토옙스키 편을 가장 먼저 읽었는데 다음에 톨스토이가 이어지네요. [안나 카레니나] 위주로 쓰고 있습니다.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는 모국의 문학에 대한 이야기라서인지 거침없이 써내려간 지식과 자의식이 돋보이고 읽는 재미가 있네요. 러시아 문학 작품에 이해를 더하고자 하시면 추천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8719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7264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7439
125038 한동훈, 국힘 비대위원장 수락(국힘과 그 지지자들도 한동훈 맛 좀 봐라) 왜냐하면 2023.12.21 486
125037 [스크린 채널]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 (9시 8분에 시작했어요.) [1] underground 2023.12.21 195
125036 [핵뻘글] 아무 영양가 없는 근황 글입니다 [16] 로이배티 2023.12.20 733
125035 미국 콜로라도 법원, 도널드 트럼프 내란선동으로 경선 출마 금지 판결 [1] 상수 2023.12.20 351
125034 프레임드 #649 [6] Lunagazer 2023.12.20 83
125033 (회사바낭) 오랫만입니다. [5] 가라 2023.12.20 339
125032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을 보고(스포있음, 히어로 영화라기 보다는 해양판타지에 가까운 속편, 그리고 약간 불쾌한 스포) [2] 상수 2023.12.20 322
125031 키호이콴의 액션 [1] 돌도끼 2023.12.20 250
125030 인디아나폴리스 500 음악 [1] 돌도끼 2023.12.20 92
125029 어제 서점에서 산 것들 상수 2023.12.20 240
125028 [도둑맞은 키스] 보고 왔습니다 [2] Sonny 2023.12.20 216
125027 듀게 오픈채팅방 멤버 모집 물휴지 2023.12.20 90
125026 신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 리들리 스콧과 약간의 <나폴레옹> 이야기 [2] 스누피커피 2023.12.20 367
125025 '세인트 모드' 감독 신작 [4] LadyBird 2023.12.20 272
125024 에피소드 #68 [2] Lunagazer 2023.12.19 72
125023 프레임드 #648 Lunagazer 2023.12.19 84
125022 서경식 작가가 돌아가셨네요. [6] thoma 2023.12.19 556
125021 [괴물] 감상 [2] 영화처럼 2023.12.19 359
125020 미래의 범죄들 Sonny 2023.12.19 284
125019 잡담 - 리젠을 생각하다, 연말 새해맞이 추천 노래들(캐럴 포함), 40까지 못쏠인 남자 상수 2023.12.19 16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