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7 21:11
한병철의 [피로사회] 읽고 조금 소개합니다.
2012년에 나오고 화제가 된 책이니 뒤늦은 독서입니다. 문학과 달라서 이런 책은 조금 시기를 탈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읽어 보니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 시대는 외부에서 강제하는 타자의 힘 즉 부정적 폭력에 의해 착취당하는 시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제가 되는 이 부분은 생각의 여지가 있는 것 같아요. 지금도 여전히 그런 사회인데? 또는 그런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라며 받아들일 수 없는 전제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다른 층위로 볼 때, 사회의 어떤 측면에서 볼 때는 이해가 가고 본 설명을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습니다.
저자는 지금 시대는 이질적인 힘에 의한 규율사회가 아니며, 같은 것의 과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자기 착취가 일어나는 성과사회라고 진단합니다. 이 사회에서 주민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가 되어 있고 '예스 위 캔'의 구호가 말해 주듯 '할 수 있다'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라는 무한정한 압박을 가집니다. 능력, 가능성, 성과의 압박입니다.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사회가 되었다고요.
저자는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히는 긍정의 과잉과 산만함에 대한 대응으로 '깊은 심심함'이라는 상태를 제시합니다.
저는 졸리다가 눈을 번쩍 떴습니다. 이거 내 생각이랑 비슷한데? 게으른 저는 어쩌다 알게 되는 지인들 중에 항상 뭔가를 배우거나 모임을 만들거나 해서 활동적인 일을 해야만 하고 가만히 있으면 큰일나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했거든요. 저의 경우에는 심심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정상적인 일상 생활을 하는 데 꼭 필요하거든요.
저자는 아래의 니체 말을 옮기면서 자기 생각을 거들게 합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니체는 지금에 비하면 조용했던 19세기 이후를 살지 못한 사람인데도 이런 말을 했나 봅니다. 저기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이란 게 한병철의 표현으로는 '깊은 심심함'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분노'의 의미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분노는 세계가 점점 긍정적으로 되어가는 것을 멈출 수 있는 힘이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었어요. 분노는 긍정과 정상에 흡수되고 있는 '예외적 상태'를 확보하는 에너지라고 하면서 짜증, 신경질과 구분을 합니다. 저에게 분노의 에너지까지는 힘겹게 느껴졌어요. 그저 짜증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라.
제가 책의 맛을 잘 옮기지 못했으나 짧은 분량의 철학에세이 종류인데 문장은 정연하고 군더더기 없이 할 말만 잘 전달하는 책이었어요.
심심하게 사는 제 편을 들어 주는 거 같은 기분이라 잘 읽었습니다.
2023.12.07 23:57
2023.12.08 10:32
네. 여유의 확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여유 시간이 생길 때 여행을 가거나 골프를 친다면 도루묵이 아닐까 싶어요. 근데 번역을 여유나 여가로 하지 않은 것은 심심함과 조금 의미차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심심하다는 걸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 하고 단어 자체가 그렇게 좋게 쓰이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사실은 중요하고 좋을 수 있는? 상태라 그런 것 같습니다. 일단 무슨 일을 벌이지 않아야 이 책의 '깊은 심심함'의 상태에 가깝지 않나 싶어요. 세잔 이야기도 조금 나오는데 그의 아내 말이 세잔이 뭔가를 바라 볼 때 머리에서 눈이 튀어 나올 때까지 가만 있으면서 사물을 바라 본다는 겁니다. 표현이 참..ㅋ
2023.12.08 10:16
멍때리기 대회가 나오는 현 세태를 정확히 조망하는 문장 같습니다. 요새 들어서 "도파민 중독"이란 말도 유행하는데 끊임없이 자극을 추구하고 그걸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뭔가 이득을 봤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게 하더군요. 가끔씩은 유튜브를 보면서도 내가 이걸 재미있어서 보는건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늦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찌뿌둥하고... 자극의 가치가 너무 커진 것 같아요.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2023.12.08 10:52
저 니체 말 중에서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는 부분에서 최근에 열심히 선물받으신 모모가 생각이 나더군요. 학력,경력,외모까지 계속 손질하면서 정말 열심히-_- 살아서 모든 부산한 이들의 우러름을 받는 위치에 간 것인가 했어요.
2023.12.08 22:35
제가 요즘 작고얇은♡ 2개의 책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와 츠바이크의 [발자크/스탕달을 쓰다]를 가방에 넣고다니며 읽고있는데, 두 책 다 너무 좋아서 행복해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향기]에도 니체의 생각이 인용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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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최후의 인간"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다. 오늘날 절대적 가치로, 심지어 일종의 종교로까지 격상된 "건강"을 최후의 인간은 이미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쾌락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에게는 "낮에 즐길 거리와 밤에 즐길 거리"가 있다. (..중략..) 길고 건강한 삶, 하지만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삶은 결국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는 마약을 먹고 끝내 약물로 죽고 만다. "때때로 약간의 독을 : 그러면 기분 좋은 꿈을 꾼다. 그러다가 결국 많은 독을 먹는다. 기분 좋게 죽기 위해서." 역설적이게도 그는 건강을 위한 엄격한 방침으로 끝없이 삶을 연장하려 하지만, 결국 조기에 삶을 마치게 된다. 그는 죽지 않고, 불시에 끝장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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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인용해주신 부분도 그렇고 니체 당신은 대체..생각이 절로 들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제가 처음으로 읽은 한병철 책이 [피로사회]였는데 별로로 읽었어서 이런 글도 남겼었는데 ㅋㅋ
http://www.djuna.kr/xe/board/13487756
지금 [시간의 향기] 읽으며, 사람은 아는만큼 보인다고 내가 아무래도 [피로사회]를 인식,체험 면에서 덜 여물었을때 읽은 게 아니었을까 다시금 생각하고 있어요 ㅋㅋ
2023.12.09 11:03
저는 이런 종류 책을 워낙 오랜만에 읽어서 더 좋게 본 거 같습니다. 한병철의 책을 이제 두 권 읽었어요. 한 권 정도만 더 볼까 생각했는데 [시간의 향기] 좋게 읽고 계시니 살펴 보겠습니다!
[피로사회]에서 한나 아렌트 등 다른 철학자는 반론을 위해 인용하는데 니체는 같은 생각인 듯 자기 생각을 강화시키기 위해 인용하더니 역시 저자가 니체를 좋아하나 보네요.
츠바이크의 두꺼운 발자크 평전은 저에게 있는데 저 책은 츠바이크의 두 인물에 대한 감상 위주로 얇게 나온 책인가 봐요?
영화도 책도 시기를 타는 것 같긴 합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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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왜 이렇게 피곤하지... 라는 글을 적어 놓고 보니 바로 아래 '피로사회'라는 제목이 보여서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만. 전혀 그런 내용은 아니군요. ㅋㅋ
적어주신 내용을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진 모르겠습니다만, 심심하다는 건 어쨌거나 여유를 챙기고 있다는 게 아닌가 싶구요. 그런 측면에서 심심함이란 참 소중한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심심할 틈이 없으면 너무 지쳐요. 말씀하신 '활동적인 일을 해야만 하고 가만히 있으면 큰일나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을 보면 참 존경스럽긴 하지만 저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구요.
결국 직장과 규칙적인 생활은 인생에 해롭다 & 근데 그게 없으면 굶어 죽는다. 라는 난감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균형을 찾아보려 애쓰며 사는 게 현대인의 삶이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합니다. ㅋㅋ 저와 제 주변 사람들의 2024년이 올해보단 좀 더 한가하고 여유롭기를 빌어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