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어체로 씁니다. 양해바랍니다.



에스파의 슈퍼노바 뮤직비디오가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당혹스러워했다. 카리나의 송곳니는 무슨 뜻인가? 왜 윈터는 빙빙 돌고 있는가? 닝닝은 왜 남의 집에 불을 지르고 지젤의 시간은 왜 백와인드가 되고 있는가? 이 뮤직비디오가 전위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들의 의상이나 컨셉의 묘사 자체보다도, 그것을 이해할 스토리가 거의 부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에 있다. 뮤직비디오 속에서 이들의 초능력은 명쾌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은 씨익 웃으면서 뭔가를 파괴하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에스파의 슈퍼노바가 일종의 분기점으로 느껴지는 것은 기존에 유지해오던 세계관에 있다. 슈퍼노바는 에스파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전위적 컨셉은 아니다. 에스파는 그 전부터 이미 전위적인 포지션에 계속 도전하고 있었다. 이들의 의상이나 세계관은 현재의 현실과는 괴리된, 미래의 디지털 세계관의 무엇이었고 뮤직비디오 속에서 이들은 어떤 투쟁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와 싸우고, 물리치고, 이긴다. 이 게임적인 세계관은 게임의 세계관을 차용한 여전히 "덕후"스러운 느낌에 더 가까웠다. 이들은 미래를 추구한다는 의도만 주장할 뿐 감흥을 일으키진 못했다. 때문에 이들의 사이버세계 컨셉은 그런 컨셉에서 벗어난 에스파 멤버들이 얼마나 예쁜지, 그 현실적 미모를 반증하기 위한 구속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이버 세계의 컨셉에 대한 내적 투쟁은 미니앨범 3집의 타이틀곡 Spicy의 뮤직비디오에서도 확인된다. 에스파는 가죽 혹은 폴리에스테르 재질의 옷을 벗어던지고, 인위적 세트에서 벗어나 보다 현실적인 외양으로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중간중간 뮤직비디오의 세계는 디지털 버그를 일으키는 듯한 표현이 들어가지만 이들의 옷이나 세계는 훨씬 더 일상적인 질감으로 채워져있다. 에스파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광야'를 벗어났다고 기뻐했다. 이 노선이탈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 동안의 사이버 세계관에 좀 진력을 느꼈다는 증거일 것이다. 다만 Spicy라는 뮤직비디오 자체는 어딘지 밍숭밍숭했다. 그러니까 광야를 벗어난 건 알겠는데, 이제 거기에서 하는 게 뭔지 알 수가 없다. 세계관을 파괴한 결과가 현실적인 '이쁜 척'뿐이라면 그건 좀 심심하다.


그런 점에서 슈퍼노바 뮤직비디오는 독특한 감흥을 자아낸다. 단순히 괴상한 컨셉이라서가 아니다. 사이버 전사를 표방해왔던 에스파의 이미지를 쇄신하면서도 이 뮤직비디오 자체가 사이버 세계의 이질감을 녹여내고 있기 때문이다. Spicy에서 에스파가 탄 자동차는 뚝 떨어졌다. 그것은 사이버 세계, 혹은 현실세계로 에스파의 무대가 변했다는 뜻이다. 슈퍼노바에서 카리나는 갑자기 떨어지고 차를 박살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에스파는 현실세계에 분명한 상호반응을 일으킨다. 이들이 초래하는 기현상 속에서 이들은 그냥 제멋대로이고 해맑게 웃는다. 이 전의 공감하기 어려운 비장함과 무게감은 날아가버렸다. 남은 것은 현실세상을 휩쓰는 에스파 멤버들과 난장판이 되는 세계뿐이다. 이 안에서 에스파는 극히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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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뮤직비디오는 예술작품으로 한계가 뚜렷하다. 주인공이 되는 아이돌이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컨셉 안에서도 이들은 결국 날씬하고, 예쁘고, 패셔너블하고, 현실적인 미인으로서 경탄의 대상이 되어야한다. 이런 점에서 그 어떤 컨셉을 지향하든 결국 종착지는 하나다. 우리 아이돌은 이렇게 이쁘다는 것이다. 모든 뮤직비디오는 결국 영상화보로 전락한다.


케이팝이라고 구분하기엔 미묘한, XG의 뮤직비디오들은 이 부분에서 확실한 차별점을 보여준다. 이 그룹의 인기멤버인 cocona는 뮤직비디오 안에서 정말로 삭발을 한다. 그리고 그 삭발한 머리로 무대 활동을 한다. 이들의 파격적인 시도는 이미 다른 케이팝 아이돌들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가있다. 이것만으로 미학적 성취를 논하기에는 이르지만, 적어도 이들의 용감함이 다른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자신들을 케이팝 아이돌로 세탁하기 위해 한국 무대를 이용한다는 비판은 있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컨셉은 확실히 독보적이다. 이들은 멤버 개개인의 아름다움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수단으로 어떤 세계관을 표현한다.


이 지점에서 에스파의 슈퍼노바를 곱씹어보게 된다. 이 뮤직비디오는 단순히 멤버들의 비쥬얼만을 위해 구성되어있지 않다. 그 안에서 에스파 멤버들은 분명히 이쁘고 귀여우나, 이들의 외양과 행위는 그 자체로 의문을 던진다. 이들이 누구이며 왜 이런 짓들을 하는지 미스테리에 빠진다. 즉 이들의 세계관은 컨셉에서 그치지 않고 텍스트를 만들어낸다. 뮤직비디오의 내용을 보고 질문을 던진다는 것, 이 아리송한 느낌 자체가 슈퍼노바의 세계관 그 자체다. 그 전까지 에스파의 세계관은 늘 부속품에 불과했다. 그러나 슈퍼노바 뮤직비디오를 통해 에스파는 정말로 질문한다. 우린 어디서 왔고, 원초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멤버들, 그들이 벌리는 이상한 행위들이 가사와 연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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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밀고 나아가보자. 슈퍼노바는 초신성, 즉 별의 폭발이다. 그렇다면 이 노래와 뮤직비디오에서는 뭔가가 터졌고 우리는 그 에너지를 목격하는 중이다. 그럼 터진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재미있는 해석들이 따라붙는다. 그동안 에스엠이 고수해오던 에스파의 세계관이 터졌다는 뜻이라면? 이 노래는 기존의 에스파 스타일과 궤를 달리한다. 슈퍼노바에는 에스파를 생각할 때 떠올릴법한 전통적인 하이라이트 고음 파트가 없다. 이들은 아무와도 싸우지 않는다. 물리치는 대상도 구해내는 대상도 없다. 에스파는 이미 케이팝 아이돌 씬의 슈퍼스타이지만, 그 스타성을 스스로 파괴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내뿜는 게 이 슈퍼노바라는 노래를 통한 선언은 아닐까? 슈퍼노바는 에스파가 구 sm의 에스파스러움을 파괴하는 정반합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이들에게는 더 이상 억지로 고수해야할 세계관이 없고 그 부숴진 세계관에서 새로운 에스파스러움을 실험하는 자유를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


보다 작품 내적으로 질문해볼수도 있다. 이 뮤직비디오에서 제일 기괴하면서 컨템포러리한 장면이라면 A.I.로 만든 에스파의 노래 장면이다. 사진으로 있는데 얼굴만 뭐라고 뻥끗거리는 장면은 보는 이를 불쾌한 골짜기로 데려다놓는다. 이 장면은 단지 사이버 괴이를 연출하기 위한 장면일까. 역으로 이것이 뮤직비디오 속 에스파의 정체를 가리키는 장면이라면? 슈퍼노바 뮤직비디오 속 에스파는 사실 A.I. 들이다. 그들은 현실세계의 에스파에 대응하는 가상세계의 æ들이다. 즉, 세계관에서만 존재하던 가상세계의 에스파 아바타들이 A.I.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현실세계로 뛰쳐나오게 되어 난장판을 만드는 중이다. 이 역시도 기존의 세계관이 파괴되는 동시에,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라는 이분법적 구 세계관이 합쳐지는 과정으로도 해석가능하다. 이는 노래 가사를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이들은 계속 질문한다. 날 닮은 너, 너 누구야라는 가사가 A.I.의 질문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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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자의 의미로 해석했을 경우 에스파의 세계관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계승이자 진화로 이어진다. 그동안 설정상으로만 존재하고 아무에게도 인식받지 못했던 가상의 존재들이 현실로 뛰쳐나온 셈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실세계의 버그 현상이다. 게임을 하다 보면 종종 이동이 불가능한 필드에서 혼자 떠있거나 빙글빙글 도는 캐릭터들처럼, 에스파 역시 현실에서 버그를 일으키는 셈이다. 이 해석을 밀어붙일 경우 우리는 현실의 에스파조차도 다르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정말 에스파 본인이 맞을까? 이들이 인공지능으로 학습을 완료한 가상 세계의 아바타들이라면? 그렇다면 진짜 에스파는 어디에 있을까? 혹은 이미 가상세계의 아바타와 현실의 에스파가 합쳐진 건 아닐까? 에스파가 무대 위에서 갑자기 붕 떠오르거나 파괴적인 힘을 휘두르는 건 아닐까? (뮤비 속 닝닝의 컨셉은 불을 지르는 캐릭터인데 하필이면 에스파의 슈퍼노바 컴백 무대 때 정말로 무대에 불이 났다)


에스파의 슈퍼노바는 현실의 에스파에게서 디지털 세계의 가상자아들을 찾아보게 하는 하나의 질문이다. 에스파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에스파는 더 이상 사이버 전사로 이세계를 소개하지 않는다. 멋있고, 훌륭하고, 옳은 포지션에서 벗어나 이들은 훨씬 더 복잡하고 신기한 존재가 되었다. 에스파는 그들 자신이 직접 현실의 버그가 되어 디지털 세계와의 접점을 암시한다. 그 안에서 에스파는 말릴 수 없는 존재로 10대와 20대의 일탈을 더 큰 단위로 실천해준다. 에스파가 드디어 원더랜드로 향하는 쇠동굴을 찾아낸 것은 아닐까. 네 명의 앨리스는 훨씬 더 요란하게 세상을 누비고 있다. 제일 매력적인 건 이세계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이존재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게 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을 왜 두려워하는가. 우리 자신이 인공지능의 학습 결과일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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