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16 13:35
종종 유튜브나 연애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이 질문은 볼 때마다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죠. 이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아가 봅시다. 어떤 남자가 자긴 여사친은 불가능하다고 말을 했다 칩시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모든 여자는 전부 다 연애 후보이거나 아무 관계도 맺지 않을 대상이라는 뜻인가요? 바꿔서 말하면 이 말은 자신은 어떤 "목적" 외에는 여성을 진지한 인간관계의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을 것이라는 배제의 논리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많은 차별의 논리가 그렇듯이 이 문장 역시 여성의 자리에 인종이나 고향이나 학력이나 다른 사회적 요건들을 넣어보면 금새 확인이 됩니다. 난 흑인이랑은 친구가 불가능하다고 믿어, 난 전라도 사람과는 친구 안해, 난 인서울 대학을 안나온 사람과는 친구관계가 안된다고 생각해... 어떤 대상에게 우정의 가능성을 아예 지우는 것이 왜 필요할까요?
누군가는 연애든 결혼이든 일처일부제에 충실하려는 도의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논리는 더 성립이 안됩니다. 결혼은 커녕 연애도 안하는 사람이 왜 굳이 이성에게 우정의 가능성을 차단할까요? 설령 자신의 "보수적" 관념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면 연애나 결혼의 조건이 성립한 이후에 "여사친"과의 관계를 단절해도 되죠. 별다른 핑계도 없는데 여성에게서 친구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은 여성을 성적물화한다는 발언으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여성을 우정의 대상이 아니라 성욕의 대상으로 볼 수 밖에 없을만큼 자기 통제가 안된다는 전제가 깔려있으니까요.
이 발언은 사회적으로 여성과 남성에게 다르게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현 사회는 기본적으로 남성 중심적인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이든, 기업의 임원이든, 대학의 교수이든, 한 사회에서 권력을 점하고 있는 대다수의 성별이 남성인 이상 이성과의 친구관계는 불가하다는 발언은 남성이 여성을 향해 말할 경우 굉장한 차별이 됩니다. 권력이 있는 계층이 권력이 없는 계층에게 친구의 자격을 박탈하는 문장이 되버리는데 이 문장은 어떤 식으로든 여성은 남성과 권력관계를 공유하기에 부적합한 사람이라는 판단을 무의식중에 내리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그냥 개개인의 관계에 대한 호불호가 아닌거죠.
이 질문에 의의가 있다면 그것은 대답이 아니라 이 질문을 성립하게 하는 배경 자체에 있을 것입니다. 여자와 친구를 하지 않아도, 남자들끼리만 우정을 나누고 관계를 맺고 진지하거나 일상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남성중심적 세계가 그만큼 공고하다는 뜻이죠. 영미권 대학에 유학을 가는 사람은 현지 백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지 그들과 친구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선택지를 굳이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건 취향 이전에 사회적 생존의 문제일테니까요. 그러니까 이 질문 자체는 어떤 성별과 진지한 교류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을 재고해봐야하는 질문이지, 진짜로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고민할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 저는 의도적으로 남자가 "여사친"과의 관계 성립을 고민하는 것만 썼는데 여자의 경우 "남사친"이 얼마나 다르게 다가올지는 아마 짐작 가능하실 겁니다.
2024.01.16 14:24
2024.01.16 15:14
네... 예능에서 이 질문이 너무 농담거리처럼 쓰이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서 들을 때마다 섬찟하게 되더군요...
2024.01.16 16:31
우정과 인맥은 좀 다른 거죠
2024.01.16 20:42
글쎄요 반대의 경우를 따지자면 살다보면 성별 무관 좋은 친구를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일부의 경우 아니고서야 굳이 남사친을 만들고자 하는 여성이 얼마나 될까 싶긴 합니다 물론 그조차 불균형한 현실의 반영이긴 하죠
2024.01.16 21:00
맞습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남사친"은 여자에게 조금 다르게 인식됩니다. 여자가 남사친을 굳이 안만든다는 것은 자신은 친구로만 지내고 싶은데 친구였던 남자가 고백을 한다거나 성적 긴장감으로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남사친이라는 관계를 포기한다는, 일종의 신변보호에 가까운거죠. 이건 헤테로의 욕망을 예시로 들면 더 명확해지는데, 여성은 게이 친구에 대한 판타지가 있지만 남성은 레즈 친구에 판타지가 없습니다.
2024.01.16 21:32
음 레즈 '친구'에 대한 판타지는 없고 대신 다른 판타지가 있긴 하죠 ^^ (소니님은 진지한 분이신 걸 알지만 이건 정말 농담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군요 전 심지어 듀게에서조차 제 성별과 성지향성을 드러냈다는 이유만으로 섹슈얼한 제안의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거든요 아주 예전 듀게가 활성화 되었던 시절 이야기긴 하지만ㅋㅋㅋㅋㅋ)
2024.01.16 23:36
2024.01.17 00:55
제목과는 관련 있지만 글의 주제와는 아주 동떨어진 뻘소리입니다만.
대략 30년 전에 '해리와 샐리가 만났을 때' 때문에 아주 인기 있는 떡밥이었죠. ㅋㅋ 전 잘 나가는 X세대(...)답게 '그게 왜 불가능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냥 오래오래 친하게 지낸 여성 친구들도 많았습니다만. 그게...
결혼하고 나니 다 사라지더라구요. ㅋㅋㅋ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아주 자연스럽게 그냥. 뭐 엄밀히 따져 보면 어차피 생활 무대 달라지면 동성 친구들도 멀어지는 게 보통인지라 이성의 경우엔 그보다 더하더라. 라는 상식적인(?) 얘깁니다만.
그래서 조규찬을 소환해 봅니다.
아마 제목이 Campus Friend 의 약자였을 거에요. 요즘 젊은이들은 뭔 뜻인지 짐작도 못할 듯... ㅋㅋㅋㅋㅋ
2024.01.17 09:13
ㅎㅎ 사실 이 논쟁도 좀 역사적이죠 당시 예전에는 이걸 로맨스로만 봤다는 차이가 있다고 할까...
한국에서 결혼 후에 이성 친구 관계를 유지한다는 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걸 쌍방이 이해하고 납득하는 부부의 수는 현저히 적을 것으로...
남성사회에서 호모소셜한 관계만 맺으며 살아도 지장이 없는 보편적 남성에게 이 질문이 가지는 의미와 여성에게 가지는 의미는 다를 수 밖에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