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디네' 봤습니다.

2023.02.12 15:05

thoma 조회 수:519

Undine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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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부분은 내용 요약이고 뒷 부분은 내용 바탕으로 이런저런 잡담들인데, 스포일러가 싫으시면 피하시길 바랍니다.

  

운디네는 역사학자인데 박물관에서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가이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헤어지자는 애인을 '그러면 너는 죽게 돼, 알잖아'라며 카페에서 기다리라고 합니다. 일을 하고 와서 보니 애인은 가버리고 산업잠수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방금 박물관에서 운디네의 설명을 아주 인상 깊게 들었다는 크리스토프와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그때 커다란 수조가 깨어지는 사고로 물을 뒤집어 쓰며 함께 넘어지고 두 사람은 급격히 끌리며 사귀게 됩니다. 

크리스토프가 일하는 베를린 외곽의 댐옆 호수에서 물밑을 탐험하며 데이트하던 날 알 수 없는 이유로 잠수기구가 벗겨지고 기절한 운디네의 심장을 크리스토프가 응급처치로 되살립니다. 그 직전에는 물 속에서 순간적으로 모습이 안 보인 운디네를 찾다가 호수의 터줏대감처럼 전설처럼 전해지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메기와 운디네가 더불어 헤엄치는 장면도 목격하게 되고요. 

크리스토프는 잠수사로, 운디네는 도시해설사로 일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특히 운디네의 일인 베를린이라는 도시 발전 과정과 건축물들에 대한 설명 부분이 조금 길다 싶으리 만큼의 분량으로 그대로 나오는 장면이 두 번 정도 있습니다. 

크리스토프가 일하다 다리가 끼어 뇌사하자 운디네는 전 애인을 죽이고 호수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살아나서 운디네의 흔적을 온통 찾아다니나 찾을 수 없고요. 시간이 흘러 새로운 연인과 아이까지 곧 생기게 된 크리스토프는 사고 후 다시 잠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물 아래에서 운디네의 모습을 봅니다. 크리스토프는 운디네와 함께하고 싶어했던 것 같지만 새 연인이 기다리는 물 밖으로 나오게 되고 떠나는 그의 모습을 시선으로 처리된 운디네가 지켜 봅니다. 


정리하는 마음으로 줄거리를 써 보았습니다. 

빠진 내용은 잠수사 모형인형 부분입니다. 둘이 처음 만나던 곳의, 박살나기 직전에 운디네를 부르는 먼 목소리가 들려왔던 수조에 들어있었던 인형인데, 나중에 크리스토프가 운디네에게 선물하고, 인형다리가 부러져 붙이기도 하고, 운디네가 물에 들어갈 때 가져갔다가 훗날 크리스토프가 물에 들어오자 손에 들려 되돌려 보내는 모형인형입니다. 나름 감독이 영화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초현실적인 내용이 현실 세계 속에 섞여 전개되는데 그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는 세계입니다. 아니 의문은 갖지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상태의 세계입니다. 현실 세계란 이런 초현실적인 이야기들이 지탱함으로써 겉으로 드러나고 눈에 보이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설화나 신화라는 배경이 현실 역사의 뒷배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사람이 그런 이야기에 영향을 받으니 역사가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할 듯하네요. 제가 아는 게 없어서 책이나 예를 들지는 못하지만요. 

책이라 하니 잊기 전에 언급하자면 이 영화는 오스트리아 작가인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단편 '운디네 가다'라는 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면이 있다고 합니다. 검색해 보니 바하만이라는 작가의 단편집 '삼십세'가 나온지 꽤 되었는데 절판되지 않았어요. 그만큼 안 팔려서 재고가 남아 있다는 뜻인가 싶네요. 저도 오래 전에 작가의 명성만 듣고 살까말까하다가 안 샀고 잊고 있던 책입니다. 

원래의 물의 요정 이야기에서 운디네는 배신당하고 인간이 되지 못하자 상대를 죽이고 물로 사라집니다. 이 영화는 당하고 복수하고 퇴각하는 구조를 그대로 따르지 않으려 합니다. 결국은 신화의 공식에 따라 과거 애인을 죽이지만 그것은 크리스토프를 살리기 위한 응징이고 선택이며 운디네 자신과 크리스토프의 영원한 이별을 감수한 것입니다. 일방적인 배반으로 인해 인간이 되기를 실패해서 거기에 일대일 대응하는 일방적인 복수라는 닫혀 있는 틀을 벗어나 있었어요. 운디네는 자발적으로 물 속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크리스토프는 살아 났고, 가족을 이룰 것이고, 잠수사로 도시의 수문을 관리할 것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자 이해가 충분히 되진 않지만 참 좋았다는 느낌이 가득한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에 물의 요정 설화와 베를린이라는 현실 도시의 역사가 함께 다루어진다는 것을 소개에서 읽고 잘 이해될까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둘 다 저에게는 낯설고 구체적인 도시라는 점도 좀 진입장벽이 있을 것 같아서요. 할 수 없고, 세상만사 그렇듯이 보이는 정도로 보고 깜냥껏 이해해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나마 시간을 들여 복기하며 써 보면 조금 더 보이는 구석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베를린'은 원래 슬라브어로 습지의 건조한 곳, 습지 자체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습지에 건설된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역사와 이곳에 긴 세월 살아온 물의 요정 '운디네'의 이야기를 결부시킨 내용이고 어쩌면 이제는 요정은 물 속에 물러나 보이지 않지만 비슷한 역할을 산업 잠수사가 하게 되었다는 의미일까, 라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크리스찬 펫졸트가 베를린을 많이 사랑하나 보다 싶고요. 


내용 이해에 급급하다 보니 영상미나 음악의 조화 같은 중요한 부분을 건너뛰었네요. 사실 이런 부분 땜에 저는 어떤 영화를 사랑하게 되는데 말입니다. 베를린 도심과 박물관, 기차, 호수와 물 아래 모습들로 이루어진 화면은 동일한 피아노 곡(바흐 곡이라고)을 배경으로 화려하지 않은 단순함 속에서 신비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저 이런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감상의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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