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11 10:14
제가 미국에 막 와서 공부할 무렵이었습니다. 그때 한 번 급우끼리 맥주 마시는 조촐한 파티에 간 적이 있었어요. 불고기를 만들어 갔지요. 정말 국적을 가리지 않고 모두들 제가 만들어온 음식을 좋아하더군요. 나중엔 불고기가 모자라 불고기 양념에 밥을 볶아주었는데, 그것도 남기지 않고 다 먹더군요. 불고기를 볶으면서 한 친구로부터 질문을 받았어요. 처음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어리둥절 했습니다.
"사써 만드러써?"
이게 무슨 소리지? 다시 말해보라고 하니까 다시 "사써? 만드러써?"라고 말합니다.
이 친구는 저보다 나이가 어렸어요. 저는 저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 제게 반말을 쓴다는 상황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을 뿐더러, 늘 영어만 쓰던 재미교포가 갑자기 한국말로 말을 걸 거라고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불고기를 만들지 않고 사간다는 것도 생각 못한 것이구요. 그래서 "만들었어" 라고 답변을 했지만, 그때 느낀 묘한 충격은 지금도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서로 소닭보듯 하던 이 재미교포 친구가 제게 최초로 한국말을 건넨 계기는 한국 '음식'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아니 이 자식이 왜 나에게 반말을 쓰지? 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어리숙한 한국말이 이 재미교포 친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친근한 표현이었다는 것. 이 친구는 평소에 한국말을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이 친구 발음에는 미국 억양이 남아있어서, 만일 평소에도 한국말을 썼다면 한국인들에게 놀림 받기에 충분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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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을 마친 후 여러가지 이유로 미국에서 살게 되고 미국에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자식이 세살이 되자 언어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제 자식은 한국어와 영어 사이에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데이케어에서 영어를 가르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통보해왔습니다. 그 이후로 제 자식은 영어를 주 언어로 쓰게 되었고 지금도 영어를 더 편해합니다.
저 자신은 한국인으로서의 제 정체성을 뚜렷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한 번도 내 정체성이 위협받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자식은 그걸 느낍니다. 너는 중국에서 태어났니? 아니면 한국에서 태어났니? 하는 질문을 늘상 받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태어났어, 라는 답변을 제 자식의 급우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백인 미국인이 아닌, 한국계 미국인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나? 그것이 제가 고민하는 점입니다. 일주일에 두번씩 한국어를 가르쳐도 한국어에 대해 어려워합니다. 한국어를 잘못 발음할 때 웃지 않으려고 저는 노력합니다. 재미교포 2세들이 한국어쓰기를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들었거든요. 자기의 잘못된 억양을 남들이 흉내내거나 놀리는 것. 그 와중에서도 제 자식은 미국 학교에서 미국의 지리, 역사, 정치, 규범, 더 나아서는 자기가 사는 주 (state)의 상징을 배우면서 자기 정체성을 쌓아갑니다. 제가 한국 문화 하나를 가르칠 때마다 미국 문화와 비교하며 질문을 합니다. 문화 충돌을 보게 되죠. 그래서 예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질문을 매주 저 자신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내가 너에게 꼭 가르쳐야할 한국적인 정체성, 한국적 가치는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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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서 한국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제가 이렇게 고민할 진데, 미국인 입양부모들의 고민은 더합니다. 미네소타에는 Korean Culture Immersion Camp라는 것이 있다고 하더군요. 한국어와 함께 한국 문화에 빠져들어 체험하는 여름캠프입니다. 이 캠프는 대기자 명단이 매우 길고 한 명이 빠져나와야 다른 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매우 인기있는 캠프라고 합니다. 제가 만난 입양부모는 거의 하룻동안 운전해서 이 캠프에 갑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한국에서 입양했기 때문이죠. 한복도 삽니다. 도대체 어린이 한복을 왜 사야 하느냐고, 처음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금새 못입게 될 건데... 호구 잡히는 꼴 아니냐고요. 그런데도 이 사람들은 삽니다. 내년에는 못입히게 되어도 이 입양부모들은 일년에 두 번 입히기 위해서 한복을 사더군요. 저보다 더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느꼈습니다. 입양한 자녀에게 너는 어디서 왔다는 걸 가르쳐 주기 위해서 매주 시간을 내서 한국어 교실을 오는 사람들. 매년 오랫동안 운전해서 여름 캠프를 가는 입양부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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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L에서 "지금 만나러 갑니다"라는 비디오를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이 비디오에서 입양된 아들은 엉성한 한국어로 부모에게 말을 건네고, 태권도를 보여줍니다. 한국어를 읽을 수 있고 태권도를 시작했다는 것 만으로도 입양인은 자기 뿌리를 찾아보려고 굉장히 노력한 것입니다. 사회의 주류로서 정체성을 위협받은 적 없는 사람들은, 아마도 미국 사회에서 살면서 저만큼 가냘픈 모국 문화의 끈을 붙잡는다는 게 얼마나 시간과 돈과 고민이 드는 일인지 모르겠지요. 매주, 매달, 매년 시간과 돈을 할애하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배워보겠다고, 미국사회에서 성공하는 데에는 거의 쓸모가 없는 공부를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요.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 자기 정체성을 뺏기고 자기땅에서 이방인이 되어 괴로워하는 게 뭔지 모르겠지요. 그러니 저렇게 입양인을 조롱할 수 있겠지요.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57108646
2014.03.11 10:20
2014.03.11 10:23
2014.03.11 10:24
잘 읽었습니다 2
2014.03.11 10:25
제가 경험한 대부분의 한국인 부모들은 2세들에게 물려 줄 한국문화 정체성 같은 거 별로 관심 없어 보이더군요.
오히려 외국아이를 입양한 현지인들이 그런 부분에 훨씬 적극적이고 열심이었습니다.
사실 자신의 문화에 대해 가장 자부심이 없어 보이는 민족이 한국인들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2014.03.11 10:29
개인적인 의견 입니다만 자신의 문화를 모르는것만큼 슬픈것은 없는것 같습니다. 슬퍼하는것을 보기도 했구요. 어차피 외형에서 오는 선입견을 벗어나기란 너무나도 힘드니까요.
2014.03.11 11:24
2014.03.11 10:33
경주에 갔을 때 한국인 남매를 입양한 프랑스인 부모를 만난 적이 있었죠. 각각 세살, 한 살 때 그들에게 왔다고 하는데, 한국을 보여주기 위해 경주를 중심으로 이주간의 여행을 계획했더라고요. 렌터카로 움직이며.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SUV 차량의 뒤편을 천막처럼 세우고 나란히 웃던 그 남매가 생각이 나요. 저도 아이가 있는데. 전 그 아이에게 한국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 것인가. 많은 생각이 들었죠..
겨자님도 힘내세요
2014.03.11 11:00
아이들이 몇살 쯤 되보이던가요? 저도 경주를 보여주고 싶은데, 몇 살 정도에 데려가야 적당할지 궁금하네요.
2014.03.11 11:06
작은 애가 일고여덟살 같았고 큰 애는 열살이라 그랬어요. 작은 애는 여자애, 큰 애는 남자애.
2014.03.11 11:29
그렇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교때 수학여행을 경주로 간 것도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2014.03.11 10:43
중학교 교과서에 말씀하신 내용들과 비슷한 글이 실려 있어요. 한국 아이를 입양한 미국/캐나다 부모들이 그 동네로 이민간 한국인들보다 한국 문화 교육에 열성이라는 거요. 그냥 흔한 서양 대조 한국인 갈구기(...)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꽤 일반적인 현상인가 보네요.
암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14.03.11 10:46
2014.03.11 10:50
아시안 문화가 왜 디폴트값이에요? 궁금해서
2014.03.11 11:45
2014.03.11 10:48
한국 아이를 입양한 부모들의 노력이 굉장히 감동적이네요..
2014.03.11 11:00
물론 부모의 욕심은 있지만.
미국에서 나고 자라면 모국이 미국인건 어쩔수 없지요. 단적인 예로 올림픽하면 미국 응원하더라구요. 한국가면 불편하고 이상한 나라고.
근데 또 나이들면 결국 한국으로 돌아오더라구요. 꼭 몸이 한국으로 오지 않아도 내 뿌리는 한국이라는걸 느끼고 찾게되는거 같습니다. (2세까지는요. 3세는 어떤지 잘 모르겠네요)
한국말에 욕심이 있으시면 어릴때 한국을 자주 가는게 좋은거같아요. 방학때 한달정도라도 갔다오면 정말 잘 하는데 안그럼 거의 못하게 되는게 보통이더군요.
2014.03.11 11:23
한국에 자주 가려고 노력은 합니다. 그러나 서울은 이미 제가 기억하던 공간이 아닙니다. 저 조차도 길을 잃기 쉬운 복잡한 도시지요. 어린이를 데려가서 뭘 보여줘야할런지 감이 안잡힙니다. 그래서 경주나 부산, 제주도가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14.03.11 11:50
2014.03.11 12:00
뭘보여준다기보다 가족들 친지들 만나고 같이 놀고하는게 제일 큰 것같아요.
2014.03.11 12:09
늘 궁금했던게, 우리나라에 사는 외국인 자녀들은 그 나라 말도 우리나라 말도 잘 하더라구요.
그런데 재외교포 2세들은 우리 말이 서툴러요. 교육환경의 차이일까요?
2014.03.11 12:50
집밖에서 사용하는 언어(그 나라 공용어)와 집안에서 사용하는 언어(민족어?)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민오신 부모님들이 고집스럽게 집안에서는 민족어만 사용하도록 시켜야 하는데, 자식 힘들까봐 집밖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하도록 내버려두는 경우가 많거든요. 언어 빨리 배우라고. 그럼 아이가 어른이 돼서도 부모님 하시는 간단한 말씀을 알아듣는 정도의 수동적인 능력밖에 남지 않게 돼요. 우리나라에 사는 외국인 자녀들이 그나라 말도 우리나라 말도 잘하는 경우는 결국 자국문화에 대한 자부심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근데 이쪽도 약간 확신하게 힘든 게, 우리가 그 나라 말을 몰라서 잘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완벽하게 균형잡힌 이중언어자로 자라기가 힘듭니다. 둘 중 하나가 주언어가 되는 걸 막으려면 추가적인 노력을 해야 하는데, 한국어 좀 어눌하다고 알아채는 사람도 없고, 그 노력을 다른 데 쓰는 게 더 이롭다 보니 자연스럽게 손을 놓게 되는 경우가 많겠죠.)
2014.03.11 12:17
미국에서 나고 자라고 있다면 당연히 미국인이겠지만 부모가 같은 국적을 지닌 이민자라면 당연히 정체성에 대해서 많은 고민이 될 듯 합니다. 부모가 다른 국적인 경우라면 더 복잡하겠지요.
입양의 경우에는 오히려 그런 정체성 문제는 없을 테니 부모가 적극적으로 나설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사실 이민자들의 경우 사는 곳의 언어와 문화를 익힌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지 않아요.
그나저나 그 SNL코리아라는 곳은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답니까. 기사들을 흩어보니까 '풍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 같던데요.
2014.03.11 12:26
저희 가족은 절반 이상이 전부 이민을 갔기 때문에, 캐나다 벤쿠버에 모여있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그쪽에 계셔서 명절마다 주말마다 식구끼리 모이기도 해요.
그런데도 어린 사촌 동생들은 한국어를 잘 못하더라고요.(벌써 대학 갔겠네요.)
문뜩 그 동생들은 자신을 캐나다인이라 생각할까 한국인이라 생각할까 궁금해 지는 글입니다.
사실 문화 뿐만 아니라 동양의 기본은 뿌리를 중시하는 부분이 클텐데. 아이들에게 두 가지를 다 알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크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찾지 않을까요?
2014.03.11 13:11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단락 계속 곱씹게 되네요.
저도 해외 살면서 2세 많이 보는데, 여기서 아예 태어난 경우는 케이님 말씀처럼 수동적인 능력만 남아있는 경우가 흔하더군요. 부모는 영어로 질문하고 아이는 한국어로 대답하고. 5세에서 10세 사이에 온 경우는 한국말을 곧잘 하지만 한국어로 고등교육을 받은 적은 없어서 생활대화 수준에 그치고 어휘 수준이 단순한 사람들이 많구요. 초등 고학년 내지 중학교 저학년에 온 경우에는 바이링구얼이라는 개념에 그나마 근접한 그룹. 고등학교 때 온 사람들은 한국어가 낫고. 양언어를 자신의 교육수준에 걸맞게 고급으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어요. 네살 때부터 해외에서만 생활한 여자분을 아는데 한국어로 된 책도 많이 읽고 워낙 스마트한 사람이라 그런지 한국말을 놀라울 정도로 잘 구사하는데,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아요. 대부분 자신이 속한 사회의 언어에 추가 확 기울고.. 단 문화적으로는 이 나라 사람과도 출신국 사람과도 조금씩 다른 제3의 정체성을 갖고, 그런 정체성을 공유하는 서구 사회 아시안들과 가장 친밀하게 지내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2014.03.11 15:29
엉? 부모가 한국어 질문-아이가 영어 대답이 아니고요??
2014.03.11 13:25
입양부모들이 자식을 한국에 데려오는 건 아이에게 뭘 가르쳐주기 위해서라기 보다 아이게게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는 게 주목적인 것 같습니다. 부모나 이웃사람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건 --그것도 나만! 다르게 생겼다는 건 --자라나면서 큰 스트레스나 불안요소가 될 수 있으니까요. 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원래 고향은 저기라는 걸 알려줄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인간에겐 소속감이 중요하니까요.
2014.03.11 13:36
백인문화권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 아이들이 겪는 정체성 혼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는 난 이곳(뉴질랜드)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데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학교에 들어가니 끊임없이 급우들이 하는 질문이 "where are you from?" 이더랍니다. 처음엔 아이도 뉴질랜드라고 난 여기서 태어났다고 줄창 외치다가 어느선에선 포기하고 " I'm from Korea" 라고 인정하고 말았다고 .... 그 이후 적극적으로 한국문화를 찾아보고 배우려 노력해서 나름 균형잡힌?한국인 2세로 자라나고 있다고 아이 아빠가 웃으며 말씀하시는데 좀 씁쓸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여기사람은 될 수 없는건가..하는 느낌?
2014.03.11 14:24
하일, 이다도시, 이한우? 이참? 씨가 한국 국적을 가진지 오래되었음에도 여전히 외국인인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국적과는 또 다른 벽..?
2014.03.11 14:36
저 세 분은 귀화인이니 그 나라에서 태어난 이민 2세대와는 경우가 다르겠죠. 무엇보다 미국같이 이민자의 나라, 다인종의 국가에서조차 아시아인을 이방인 취급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외국에 그리 오래 계셨으면서 먼 글을 이렇게 잘쓰시나요 와닿는 글귀가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