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05 15:19
Barbara, 2012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 니나 호스 주연.
통일 이전, 동독의 어느 해안가 동네가 배경입니다. 니나 호스가 연기하는 주인공 바바라는 베를린의 큰 병원 의사였어요. 그런데 출국희망을 했다가 좌천되어 이곳 병원으로 옮기게 되고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됩니다.
통제와 감시가 일상화된 동독을 떠나기 위해 서독 출신 애인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준비하고 도모하는 것이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내용이고 그러는 중에 이곳 시골 병원의 의사와 환자들과의 일상 접촉이 일어나는 스토리라고 할 수 있어요.
오랫동안 보고 싶어한 영화였는데 미루다가 이제 봤어요.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에 올렸습니다.
멜로 영화로서 새로 간 시골 병원에 의사로서 나무랄데 없는 소명의식과 품위를 지닌 동료를 만나게 된다는 점이나 역시 의지가지 없는 소녀 환자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 극의 극적인 장치라고 용납하고 감상하게 될 때, 영화의 긴장이 스민 침착한 분위기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영화가 좋은 영화로 느껴진 큰 이유는 일단 배우의 설득력 있는 외모와 성격 구현에 있습니다. 니나 호스가 과장하지 않는 비극의 주인공 같은 태도로, 영화 속 대사에는 새침하다, 무뚝뚝하다라고 표현되는(제가 보기엔 다수의 등장인물들이 우열을 가리기 어렵게 무뚝뚝했습니다만) 냉정함과 믿음직함을 소유한 캐릭터를 연기합니다. 감독의 힘이 크지만 그 주문을 뛰어넘는 분위기를 이 배우가 끌고 가고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또한 배경이 꽤 영화 분위기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바라는 언제나 주변의 감시하는 눈길을 살펴야 하는 처지인데 배경인 시골 마을은 조용함 속에 바닷가 특유의 바람이 숲과 들판을 일렁이게 하면서 긴장감을 불어 넣어요. 위의 사진처럼 자전거를 끌고 바람부는 숲과 들을 지나는 장면이 잦은데 긴장과 아름다움이 함께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시골 지역의 폐쇄성, 조용함이 깔린 가운데 그 속에서 허용된 것으로 인간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한 자락을 슬쩍 보여주면서 바바라의 결정이 뜬금없는 것이 아님을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저처럼 잘 구현된 희생의 스토리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으시다면 이 영화 기억해 두시면 좋을 것같다는 말로 짧은 추천 마무리합니다. 시리즈온에서 봤습니다.
넷플릭스에서 '이 세상의 한구석에'(2016)라는 일본 에니메이션을 봤습니다.
사전 정보는 전혀 없었고 그냥 우연히 클릭했는데 순한 맛이 괜찮아서 계속 보게 되었습니다. 히로시마 출신의 소녀가 결혼하여 43년부터 45년까지를 히로시마에 이웃한 쿠레에 살며 전쟁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멀리서 원폭 구름도 목격하고요. 전쟁통에 이래저래 참으로 고생 많이 하는 선량하고, 생활의 지혜는 넘치지만 단순하기 그지없는 인물들의 일상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영화 거의 막바지에 일왕의 방송을 듣고 울분을 토하는 주인공을 보며 놀랐습니다. 이전까지는 전쟁 피해자로만 그려진 일반 국민들의 일상과 순진함에 대해서, 실제로 그렇게 살았으니 그렇게 그렸으려니... 봐 줄만 했는데 이 부분에서 단순 감상자인 저는 저런 반응을 보이는 에니메이션이 별 문제 없이 국내 넷플에 올라와도 되나 싶었어요.
영화를 다 보고 검색했더니 감독이 원작 만화를 조금 줄였고 반전 메시지가 너무 노골적이라 여겨지는 부분을 모호하게 처리하긴 했으나 반전의 의미가 맞다는 인터뷰가 있더군요. 감독의 보충설명이야 어쨋든 아무 정보없이 본 저는 그 장면에서 주인공이 '(지금까지 참아온 보람없이) 물 건너온(한국이나 중국 등을 뜻하는 듯) 콩이나 쌀로 내가 이루어져 있으니 그 결과로 이렇게 폭력에 져야하는가'라고 대사를 하는데 미국의 폭격만이 폭력으로 정리하고 억울해 하는 게 의아하였습니다. 누가 일으킨 전쟁인가는 쏙 빼놓고 우리가 쓰는 폭력으로 이겨야 되고 남이 쓰는 폭력에는 지는 것이 불가인가 싶더라고요. '이렇게 폭력에 져야하는가'라는 대사를 두고 아군적군 다 포함한 '전쟁의 폭력'이란 말로 이해한다면 항복방송에 그렇게 절망적으로 울부짖는 것이 이해가 안 되더군요. 주인공이 대놓고 우는 건 이 장면이 처음이었거든요. 우익의 눈치도 보고 두루 해석의 여지를 두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가졌습니다.
저 장면을 보는 순간 의아함과 불쾌함이 있었어요. 원작과 에니메이션에 다 지식이 전무한 순진한 감상자인 제 느낌이 잘못된 것 같지가 않다는 생각도 있고. 게시판에 혹시 보신 분이 있으실까요. 제가 잘못 본 것인지.
부천영화제 비롯 상도 많이 받았다고 해서, 그래 뭐 너네들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 이런 너그러움인가 싶기도 하네요.
2023.01.05 17:13
2023.01.05 18:03
호텔에서 다른 여인과 마주치는 장면, 경찰의 아내도 포함해서 환자에 진심인 의사의 면모를 부각하는 것 등이 은근하게 바바라가 결단하는데 뒤를 받쳤지 않나 생각했어요. 티나지 않게 소소한 장면들이 이야기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피닉스'는 전에 봤는데 저도 참 좋았지만 정리하기가 녹녹치 않은 면이 있었습니다. 펫졸트 감독의 영화는 틈틈이 다 보고 싶어요.
'이 세상의 한구석에'가 디테일면에서도 전체적으로도 잘 만든 에니라는 것은 동의합니다. 에니메이션 많이 안 보긴 하지만 본 것 중에 손꼽을만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연민이 우선해서 불안한 면이 있고 위에 제가 언급한 장면이 원작은 그렇지 않다는데 감독의 연출에 애매함이 있었어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이 가능하게 의도했달까요. 영화 제목도 못 들어본 제가 보고 이건 불쾌하다고 느꼈으니 입장 따라 유리한 해석을 할 거 같네요.
2023.01.05 18:26
저는 니나호스를 홈랜드나 크리미널 같은 시리즈로 먼저 알았는데 엄청난 배우셨더라고요.
페촐트 감독님은 명성만 듣고 여전히 작품을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바바라로 시작을 해봐야겠어요. 추천 감사합니다.
2023.01.05 20:04
펫졸트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니나 호스는 정말 섬세한 연기가 잘 사는 것 같아요. 배우의 이미지나 연기를 개화시키는 서로 잘 맞는 감독이 있는가 봅니다.
2023.01.05 21:25
니나 호스님 참 멋지신데 제가 가장 인상깊게 본 건 '모스트 원티드 맨' 이라서 이런 류의 연기와는 전혀 다르겠군요. ㅋㅋ 영화 관심이 갑니다.
이미 레이디버드님께서 언급해주셨지만 글을 읽는 중에 바로 '반딧불의 묘'가 떠오르더군요. 그 영환 나쁜 쪽으로 생각한다면 참 교묘하기까지 한 영화였죠. 그 어린 애들을 갖고 이야기를 만들어 놓으니 이건 뭐 비난하기도 애매하고. ㅋㅋ
2023.01.05 22:34
전에도 비슷한 얘기를 몇번 했었는데 유럽배우들은 어지간해선 할리우드에서 진가를 제대로 발휘할 역할을 많이 따내지 못하더군요. 니나 호스도 미드 출연한 모습들을 보면 비슷한 케이스 같습니다. 언급하신 모스트 원티드 맨이 그나마 괜찮긴 했는데 솔직히 비중이 있으나 마나한 캐릭터라서 ㅠㅠ
2023.01.06 09:45
이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니나 호스를 추천드립니다. ㅎ
안타까움 면에서는 '반딧불의 묘'보다는 보기가 편합니다. 일단 가족 구성원 여럿이 함께 일상을 이어가는 얘기라서요. 그런데 이 작품만 보자면 피해자성 부각이란 기본 정서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에니 말고 원작 만화는 자국의 잘못에 대한 비판이 뚜렷하다고 하네요.
2023.01.05 22:41
2023.01.06 09:47
'보다가 졸아서 다시 봐야할 영화' 목록 만들어 두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하
극장에서 주로 보시니 얼른 보시란 말도 못하겠네요. 기회가 오겠죠.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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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덕분에 크리스티앙 페촐트 감독의 작품세계에 빠졌었죠. 덩달아 니나 호스라는 독일의 대단한 배우가 있었다는 것도 알게됐어요. 말씀대로 독일영화 답다고 해야할까 시골풍경과 을씨년스러운 건물들에 등장인물들까지 참 무뚝뚝한 톤이죠. 주인공 바바라가 힘든 처지에도 나름 강인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보다가 급작스러운 방문수색을 당할 때 제발 몸수색만은 하지 말아달라고 할 때의 안타까운 모습이 기억이 강하게 남아요. 중간에 애인과 머물던 호텔에서 자신과 비슷한 상황의 다른 여인을 만나던 장면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고요.
감독의 차기작 피닉스도 강력추천합니다. 남녀 주연배우가 그대로 출연하는데 전작과 여기서 인물간의 관계가 너무 대조적이라(아마도 의도했겠지만) 더 재미가 있더군요. 바바라 못지않게 독일의 뼈아픈 과거사를 다루기도 했어요.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저도 봤는데 일단 만듦새 자체는 참 훌륭합니다만 지적하신 그런 부분이 확실히 한국 관객의 입장에서는 많이 걸리죠. 저는 나름대로 그 장면을 자기가 순진한 전쟁의 피해자라고만 여겨왔던 주인공이 사실은 자국 역시 남의 나라를 수탈해왔다는 깨달음을 얻는 장면으로 감독이 의도했다고 이해해주긴 했습니다. '반딧불의 묘'같은 작품이랑 비교하면 그래도 상대적으로 일본인 창작자 치고는 애썼다 뭐 그런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여전히 말씀대로 의아함과 불쾌함을 크게 느낀다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연출인 것도 맞다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