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교섭] 보고 왔습니다

2023.01.28 11:15

Sonny 조회 수: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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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는 여러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먼저 영화가 다루는 한국인 피랍자 인질들이 그다지 동정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이죠. 선교가 금지된 위험한 지역에, 굳이 중국을 통해 경유해서 선교를 하러 갔다가 인질로 잡혀서 본인들의 위기를 초래한 사람들을 어느 누가 고운 눈으로 보겠습니까. 그런데 영화 [교섭]은 이 인질들에 대해 지극히 헌신적이고 인본주의적인 태도로만 접근합니다. 저는 영화의 이런 태도가 솔직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걸 꾹 누르고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영화 상에서도 피랍자들을 답답해하는 대사들은 몇번 나오긴 합니다. 그러나 그런 묘사들은 이 영화의 소재가 되는 현실을 알고는 있다는 알리바이처럼만 느껴집니다. 


이 영화는 샘물교회 피랍자들을 향한 짜증을 솔직하게 드러냈어야 했습니다. 그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현실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진상 민원인을 향해서도 공무원이 과연 생글생글 웃으면서 친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국민과 공무원의 관계가 있지만 그 전에 자신에게 지나치게 화를 내는 한 개인과 그걸 을의 입장에서 어쩌지 못하는 개인의 관계가 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후자가 훨씬 더 크게 작동합니다. 그러나 [교섭]은 국가와 국민의 관계만을 강조하며 이 모든 것을 사명감만으로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개인과 개인의 현실적인 관계가 소거되고, 남은 것은 국가, 국민이라는 너무나 크고 거창한 관계뿐이죠. 그런 점에서 [교섭]은 구시대적입니다. 마치 표창장을 받을 때 하는 지극히 관례적인 발언들을 영화로 풀어놓은 것 같습니다.


[교섭]의 또 다른 약점은 이 영화의 개봉시기입니다. 아마 문재인 정부 때 개봉했다면 그래도 여러가지로 연결이 되면서 다른 분위기에서 볼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이 영화는 윤석열 정부에 개봉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영웅적인 외교관이 국민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대통령 본인이 계속 외교참사를 일으키고 다닙니다. 저는 이 영화를 윤석열이 "UAE의 주적은 이란"이라는 발언을 한 지 얼마 후에 보았는데 영화에 몰입하기 너무 어렵더군요. [교섭]은 인간적 태도를 이야기하면서 한편으로는 국가기관을 향한 판타지를 풀어놓고 있는데 현 정부는 이 판타지와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그렇다면 이걸 조금은 정치적으로, 전 정부에 대한 그리움으로 볼 수 있을까요. 여기서 첫번째 약점이 몰입을 깨트립니다. 황정민이 분한 외교관이 너무나 헌신적이고 인정밖에 없기 때문에, 이 가상의 인물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크지 않습니다. 그 어떤 정부도 이 영화에 대입해 보기 어려울만큼 황정민은 영웅적입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이지만 저는 이 영화가 이런 영웅주의보다는 지극히 사무적이고 공무적인 태도를 더 강조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안되는' 일들이 자신의 이익과 체면 때문에 어거지로 되게끔 돌아가듯이요.


장르적으로도 [교섭]의 위치는 애매합니다. 현실에서 있었던 한국인 납치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영화는 종종 대중적 상업영화로서 국민들에게 모든 장르적 서비스를 다하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현빈의 멋진 액션도 나오는가 하면 영화 안에서 통역을 맡은 강기영의 카심이 속물적이고 자기보신만 생각하는 캐릭터로 웃겨줄려고 노력합니다. 그 순간마다 [교섭]이 다루고 있는 사건의 무거움이 흩어집니다. 때문에 영화가 스스로 오락영화의 한계 안에 머무르고 맙니다. 특히나 [모가디슈]와 비교해보면 이런 부분은 뼈아픈 패착입니다. 


안좋은 점만 계속 열거하려니 좀 그런데, 현빈이 연기한 대식 캐릭터도 굉장히 문제입니다. 일단 이 캐릭터가 왜 있어야하는지 이야기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교섭]이 취하는 게 열정과 명분 VS 냉소와 현실의 다른 태도를 가진 남자들이 충돌하는 남성듀오 액션물의 공식이어서 더 그렇습니다. 이 영화 속에서 대식이 인질들을 구하기 위해 하는 것은 무엇이죠? 가져온 정보는 가짜고, 실용적인 팁을 주는 것도 아니고, 현장에서 버럭버럭 소리만 지릅니다. 태도면에서도 열탕과 냉탕이 부딪혀야하는데 열탕과 열탕이 부딪히는 강강강의 구도만 만들어냅니다. [교섭]이 차라리 대식의 분량을 다 빼버렸다면 오히려 더 현실성은 살아났을지도 모릅니다.


현빈의 연기도 안좋습니다. 이 캐릭터를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건들건들한데 인정은 가득하고, 실용주의적인가 하면 생명이라는 원칙에 막무가내입니다. 그의 플래시백까지 종합해봐도 대식은 혈기를 주체 못하는 미숙한 사람에서 불과합니다. 그가 역할적으로 구분해서 보여줘야할 전문가의 면모가 전혀 안느껴집니다. 현빈이 원래 이렇게 발성이 안좋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이 캐릭터는 영화의 모든 장면에서 자신을 멋있게 돋보이게 하려는 생각만 하는 것 같을 정도입니다. 


영화의 찝찝한 부분은 엔딩에서 극대화됩니다. 재호와 대식은 인질들을 다 구출해내고 서로 웃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구해내지 못하고 죽은 인질 두 명과, 정작 자신들이 죽을 뻔했다는 그 위기감이 순식간에 휘발됩니다. 이 엔딩은 오로지 국가주의적으로 인질교섭을 보고 있을 때 가능합니다. 모든 고통과 상처가 싹 사라진다는 이 가짜승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마치 2점밖에 실점하지 않았다는 국대 감독같은 이 영화의 의기양양한 엔딩이 이 영화의 절박한 인본주의를 스스로 깨트리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한국영화는 왜 이렇게 차가워지질 못하는 것일까요.


@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캐서린 비글로우의 영화들을 다시 보았습니다. [제로다크서티]에서는 임무 완수 후 주인공이 환호하지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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