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8월 10일 목요일 쾌청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 버렸습니다.
지 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 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내복을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壽衣(수의)를 생각해 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壽衣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 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거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 1950년 8월 포항 전투 당시 어느 학도병의 수첩에서....


이 수첩의 주인은 아쉽게도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전투종결 후 현장을 수습하러 갔던 어느 여군 정훈요원의 손에 의해 이 수첩이 발견되었을 때는 시신은 이미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고, 수첩도 피범벅이 되어 글을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는 이야기만 그 여군의 비통한 수기에서 전해 내려올 뿐이다.

- 맨 위의 그림은 정형모 화백의 <1950년 8월 11일 포항여중 전투>입니다. 포항여중에서 전몰한 71명의 학도병을 추모하기위해 그려진 것이죠.
- 위의 글은 대학 동아리 선배의 홈페이지를 만들면서 받았던 글입니다. (당시는 블로그 시스템도 없었고 HTML로 직접 짰었죠. 그리고 그 며칠 후 서해교전이 일어납니다.) 지금은 하이텔 계정이 날아가서 홈페이지가 남아있지 않지만, 제 옛 홈페이지에 봉인된 채 조용히 잠들어 있던 선배의 다이어리를 굳이 꺼낸 것은 오늘 현충일을 맞아 다시 그분들의 넋을 기리고 아로새기기 위함일 것입니다. (후략)


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 5~6년 전에 블로그에 올렸던 글입니다. 포항여중 전투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이 영화를 보거나 영화평만 듣고 혹여 오해할까봐 글을 다시 꺼내봅니다.

저 글 쓴 선배의 까마득한 중학교 선배(아마도 호호백발 할배겠죠) 한 분이 저 전투에 참가했었다고 하더군요. 딱히 그런 인연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저 수기와 그 배경이 되는 포항여중 전투는 충분히 극화될 만한 가치가 있는 역사적 순간일 것입니다. 저 학도병의 수기를 읽고 어떤 생각이 드셨을런지, 학도병이 느끼던 감정이 무엇이었을런지, 가슴에서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감정이 저 시대 저 사건의 배경을 영상으로 옮길 때 담아야 할 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건 아마 사람마다 비슷할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걸 쌈마이 반공영화로 만들어 놔서 망쳐놨단 얘기를 들으니까, 좀 짜증이 나려고 하는군요. 이동진 기자가 저렇게 평할 정도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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