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도시 브뤼주] 잡담

2024.06.29 17:48

thoma 조회 수:194

[죽음의 도시 브뤼주]

조르주 로덴바흐. 1892년 작. 

책 띠지에 적혀 있는 걸 보면 1920년에 만들어졌다는 오페라가 원작 소설보다 더 유명한가 봅니다. 저는 작가와 소설을 이번에 처음 접했고 오페라도 모릅니다. 검색해 보니 국내에 작품이 번역된 것이 처음인가 싶네요.  

혼자 브뤼주에 정착해 사는 위그라는 남자가 주인공입니다. 결혼 생활 십 년이 아내의 병사로 끝나고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브뤼주로 와서 오 년을 살았어요. 홀로 된 이후의 외로움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삶에 대한 의지없이 나날을 죽음과 유사한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저녁의 산책 길에 아내를 닮은 여자를 길에서 마주치고 그 여자에 집착한다는 짧은 내용의 소설입니다. 내용은 이게 답니다. 


위에 적은 줄거리는 기능이라는 느낌이 강했어요. 무엇을 위한 기능이냐면 브뤼주라는 도시를 소개하고 그 이미지를 강화시키기 위한 것. 이 오래 된 회색빛 건물들로 이루어진 도시는 운하로 연결되어 있고 그 위로 빗금처럼 비가 끊임없이 내리고 습한 대기는 여러 교회가 울리는 크고 작은 종 소리로 차곤 하는 공간으로, 흐리고 부옅고 죽음의 기운으로, 으스스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집안의 엷은 커튼 안쪽에서 종교적 완고함과 편협함으로 타인을 감시하고 판단하고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못하는 주인공 위그는 가장 죽음의 세계에 가까운 도시로 여기며 이곳을 편안하게 여깁니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에 절은 습관들, 아내를 닮은 여자에 대한 집착과 추문 같은 것은 도시를 묘사하고 도시가 주인공임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느꼈어요. 중세 건축물들 사이로 운하와 나무들을 낀 어둑어둑한 저녁의 산책로에서 느껴지는 스산한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적합한 사연을 가진 인물을 설정해서 도시와 서로 스며들듯 영향을 받게 한 것이었습니다. 

 

운하란 죽음과 관계 있는가. 이런 생각을 안 할 수 없네요.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 생각나잖아요. 위의 소설 속 인물은 현실감 없이 흐릿해서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주인공의 장악력에 비할 수는 없지만 만의 소설에도 죽음과 어떤 인물을 찾아다닌다는 설정이 함께 나오니까요. 영화 '킬러들의 도시'도 브뤼주가 배경이죠. 원제는 그냥 'In Bruges'이지만.

이 소설은 최초로 소설에 사진을 곁들였다고 합니다. 이 책에도 1892년 당시 초판본 사진 35컷이 실려 있습니다. 사진에 사람은 드물고 운하와 운하를 낀 건물들과 거리, 숲, 도시에서 유명한 교회가 주로 등장합니다. 사진은 흐릿하지만 옛날 책을 읽는 느낌을 배가하고 운치를 더하는 효과가 있어요. 


책을 읽고 원래 관심이 있던 도시라 브뤼주 위치를 검색해 보았어요. 그리고 나중에 자기 전에 유투브를 들어갔는데 유투브 귀신이 브뤼헤를 걸어다니며 구석구석 소개하는 영상을 띄우네요. 호오~하며 들어가 봤습니다. 브뤼헤는 책에 있던 사진 속의 브뤼주도 아니고(당연히) 책을 읽으며 제가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브뤼주가 아니었어요. 그냥 예쁜 관광도시였습니다. 저는 서양 관광객들이 여기 다 모였나 싶을 정도로 많은 서양 관광객들을 구경한 후에 끄고 잤습니다. 책 속의 운하와 다리, 교회가 관광객들이 찍는 사진의 배경으로 나왔으나 가보고 싶은 생각은 없어졌습니다. 심지어 책 속에 등장한 백조까지 지금도 여전히 운하 옆의 풀밭에 흩어져 잠들어 있더라고요. 아무 감흥이 없었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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