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차나 한 잔 마실까 싶어서 찬장에서 다기 세트를 꺼내다

그대로 손에 쥐고 잠시 바라보았네요.

예전에 쓴 낙서가 생각났어요.

 

올해의 마지막 날인데 참 심심하네요.

이렇게 심심한데도 잠은 오니

목욕탕 갔다 온 얘기는 나중에 해야겠어요.

 

 

*

 


조용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어쩐지 조금 피곤했고 어쩐지 조금 배가 고팠다.
머리맡의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심한 피로에 젖어 저녁도 먹지 않고 쓰러지듯 잠들었던 것을 기억했다.
이불 속은 따뜻했고 나는 그대로 조금 더 누워 있었다.
피로는 때때로 달콤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밤 라면을 끓여 먹기 위해 주방에서 그릇을 달그락거리고 있을 때는
항상 사소한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세상의 규범에 조금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싱크대 서랍에는 신라면이 없었다.
사천짜장과 너구리의 포장을 번갈아 가며 한참 동안 들여다본 다음
너구리를 꺼내고 서랍을 닫았다.
도대체 이 라면의 이름을 지은 놈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끓는 물에 라면을 넣은 뒤
거실의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너구리를 끓일 때는 그냥 다른 일을 한참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났을 때 불을 끄고 먹으면 된다고 한다.


쉬지 않고 리모컨의 채널 스위치를 눌렀다.
은행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페이지를 마구 넘기는 잡지처럼 영상과 소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리모컨을 누르는 것뿐.
나는 문득 우주 공간에서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인공 위성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속에 작은 방을 만들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매일같이 유리창으로 지구를 바라보며.


단지 바라보기만 하며.


나는 움직이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었다.
펄펄 끓고 있는 라면에 달걀을 하나 깨서 넣고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주었다.
노른자는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김치와 라면을 작은 상에 올리고 텔레비전 앞으로 들고 갔다.
채널을 부지런히 돌리다가 문득 리모컨을 누르던 손을 딱 멈췄다.
'외출'이라는 타이틀이 막 나타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허진호의 영화였다.
역시 채널을 열심히 돌린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은 지 제법 오래된 것 같다.
설명하기 까다로운 문제다.
아무튼 언젠가 나는 오랜 고민 끝에 더 이상 영화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아예 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고 영화와 거리를 좀 두기로 했다고나 할까.
영화가 싫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그 뒤부터는 그저 이렇게 우연히 한 번씩 보게 되는 영화가 고작이었다.


지금은 마지막으로 영화관에서 본 영화가 무엇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프랑소와 오종의 8명의 여인들?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비키퍼?
이 영화를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 때만 한 번씩 영화관을 찾았다.
정말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면 파리에 여행을 갔을 때
비 내리는 샹젤리제 거리의 어느 영화관에서 프랑스어 자막과 함께 보았던 올드보이인지도 모른다.


외출은 그다지 보고 싶은 영화가 아니었다.
이전에 허진호가 만든 두 편의 영화는 모두 좋아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외출은 별로 느낌이 오는 영화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채널을 마구 돌리다 만나면 한 번쯤은 보고 싶은 영화였다.


라면을 다 먹은 뒤에도 영화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그냥 담배나 피러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정말 '8월의 크리스마스'나 '봄날은 간다'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배우들도 문제가 많았지만
좀 더 괜찮은 배우들이 연기를 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감정이 전해지지 않는 영화였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나는 홍상수가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적어도 재미는 있었을 것이다.
이 얘기는 홍상수의 영화에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를 보는 중간 중간 나는 봄날은 간다를 생각했다.
그 영화는 단 한 번 봤을 뿐인데도 영상들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영화가 끝난 뒤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멀리 어둠에 묻힌 산이 있었다.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주차장 천장의 등이 꺼지면 한 번씩 몸을 움직여 다시 등을 켰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는
이 센서등이 켜졌다가 꺼지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정확히 어떤 문장이었는지 이제는 잊어 버렸지만
읽으면서 아주 인상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책에서는 시간제한등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센서등 아래서 담배를 피울 때면 가끔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이 생각났다.


서울 극장에서 봄날은 간다를 봤던 날짜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10월 4일.
그날은 내 생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입었던 옷은 기억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가 만났을 때마다 그녀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다 기억하고 있는데
유독 그날만은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옷은
눈이 내린 어느 날 함께 창덕궁에 갔을 때 입었던 옷이다.
그녀는 파란색 체크무늬 외투를 입고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사진으로 남지 않았더라도 나는 그녀의 옷을 기억했을 것이다.
다른 경우에는 분명 그러했으니까.
그녀를 만난 횟수는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인데 그런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스운 일이다.
그녀와 보낸 시간은 모두 오래도록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영화를 보고 나와 우리는 국세청 건물 꼭대기에 있는 탑클라우드에서 칵테일을 마셨다.
내려다보이는 도심의 빌딩에 차츰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도로는 빨간 미등을 켠 차들로 가득했다.
나는 기대도 않고 봤는데 영화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그녀가 보자고 해서 표를 끊은 영화였다.
그녀는 내게 8월의 크리스마스를 안 봤느냐고 물었다.
이름만 들어 봤다고 하자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허진호라는 이름을 기억했다.
나는 두 영화 중에서 어떤 영화가 더 좋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별로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곧장 8월의 크리스마스라고 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다음에 꼭 그 영화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중에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는 동안
나는 문득문득 그녀의 얼굴, 그녀가 했던 말, 함께 내려다보았던 거리의 불빛을 떠올렸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뒤에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게 두 영화 중에서 어떤 영화가 더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봄날은 간다를 봤을 때의 기억을 좋아한다고.


헤어질 때 지하철 플랫폼에서 그녀는 내게 포장된 작은 상자를 건넸다.
그 상자 속에 들어 있던 생일 선물은 아직까지도 잘 간직하고 있다.


해마다 겨울이 오면 나는 그 선물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도자기로 만든 다기 세트였다.
뜨거운 물을 끓이고, 물이 식기를 기다리고, 찻잎을 넣어 우려내는 동안
나는 늘 지하철 플랫폼에서 헤어진 그녀를 생각했다.
문이 닫히고 유리창 안쪽에서 손을 흔들던 그녀의 모습을.
나는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2년 동안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남자 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짧은 만남 이후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다.
아마 이것은 영원한 이별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한동안 끊었던 담배를 지난 가을부터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마지막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뒤
머리 위의 등이 꺼졌을 때 나는 더 이상 등을 켜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꼼짝도 않고 서서
어둠 속을 한참 바라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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