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6 09:05
- 오래 전 영화인 건 아는데 이게 벌써 21년 묵었다구요? ㄷㄷㄷ 암튼 2001년작이에요. 런닝타임은 1시간 46분. 스포일러는 없구요.
(델토로도 아직 뉴비 때라 그랬는지 흥행이 고팠나봐요. 저 미남은 주인공이 전혀 아닌데요... ㅋㅋ)
- 스페인 내전 시절입니다. 배경은 마을로부터 완전 멀리 떨어져 황야에 혼자 떡하니 서 있는 남자 학교 겸 고아원인데, 내전에서 한참 밀리고 있는 파 쪽 사람들이 만든 시설인지라 운영자들은 아주 바짝 긴장하고 살고 있네요. 이곳에 뉴비로 들어오는 10살 소년 카를로스가 주인공이구요. 기숙 학교 영화 공식에 따라 기존 아이들의 폭력을 동반한 텃세를 어떻게든 이겨내고 친구들을 만드는 이야기... 로 흘러가는 가운데 이 곳엔 '탄식하는 자'로 불리는 어린 아이 유령이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니구요, 최근에 실종된 아이가 하나 있구요, 몇 명 되지도 않는 시설 관리자들은 자기들끼리 치정과 탐욕과 짝사랑 등등으로 참말로 복잡하게 얽혀 있구요. 과연 이 살벌한 상황에서 우리 카를로스와 친구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
(첫인상이 참 좋은 학교네요.)
- 네 '피노키오' 때문에 봤습니다. 그것도 재밌게 봤지만 아무래도 전체 관람가이다 보니 같은 양반이 만든 닮은 이야기의 살벌한 버전을 다시 보고 싶더라구요. 제 취향이 워낙 그렇다 보니. ㅋㅋㅋ 예전에 본 영화지만 본지 10년이 후울쩍 넘어서 다시 본다는 느낌도 안 들었구요.
불행히도 메이저 OTT 들에선 서비스를 안 하고. 보름 뒤에 망해 없어질 '시즌'에만 구독자 무료 컨텐츠로 제공 중입니다. 그러니 뭐 이거 못 보신 분들에겐 어떻게 보시라고 추천해드릴 수도 없고 애매하네요. 망할 서비스 보름만 이용하시라 그럴 수도 없고. 아니 지금 가입이 되기나 할까요(...)
(자상하고 인자하며 신념 있으신 선생님들이 성심 성의껏 아이들을 돌봐 주시구요. 이건 진짜임)
-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어린 남자애들만 나오는 기숙 학교 호러인 거죠. 거기에 스페인 내전 상황이 들어가는 식인데.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서로 아주 밀접하게 맞물려서 그냥 하나의 이야기로 존재합니다. 그러니 간단한 수준이라도 세계사 지식이 좀 있으면 훨씬 이해를 잘 하며 보실 수 있겠죠. 모르고 봐도 상관은 없지만 알고 봐야 훨씬 좋을 겁니다. 대놓고 '저는 뭔가의 상징입니다!!' 라고 외치는 캐릭터들과 관계들이 줄줄이 나오니까요.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런 똑똑한 분야는 제 나와바리가 아니니 과감하게 패스 하구요. ㅋㅋㅋ
(꽃미남 소사 아저씨는 늘 아이들과 친구처럼 잘 놀아주시구요.)
(착하고 예쁜 도우미 누나랑 낭만적으로 썸도 타구요?)
- 지금 와서 다시 보니... 처음 볼 때보다 훨씬 더 좋네요? ㅋㅋ 그간 더 늙어서 그런가. 캐릭터들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더욱 격렬하게 정이 가요. 그래서 거의 대파국 분위기인 결말부에서 느껴지는 복잡 다단한 감정도 더 강렬해지더라구요.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굉장히 강렬한 멜로드라마입니다. 그것도 거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멜로 드라마랄까. 서로서로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서 그 관계 하나하나가 다 강렬한 감정으로 엮여 있어요. 뉴비 카를로스와 박힌 돌 대장 하이메와의 관계, 그리고 이 둘 각자가 산티와 맺는 관계. 카르멘 선생과 의사쌤, 카르멘 선생과 콘치타, 콘치타와 하킨토... 등등. 한국 드라마 홈페이지처럼 등장 인물들 관계도를 그린다면 정말 복잡해질 겁니다. ㅋㅋ
근데 이런 관계와 감정들이 길지 않은 런닝타임 속에 빼곡하게 박혀서 뭐 하나 쳐지는 것 없이 다 잘 살아나는 게 감탄스럽습니다. 장면과 대화들 하나하나가 버릴 것이 없이 다 의미가 있어요. 이런 걸 직접 썼다니 델토로 아저씨는 훌륭하기도 하지요.
(숨바꼭질 잘 하는 인기 짱 친구도 있어서)
(학교 아이들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 다시 보니 가장 인상적이고 강렬한 양반은 의사 선생님입니다. 하긴 그럴만 해요. 이루지 못할 짝사랑을 20년째 품고서 그 곁을 지키고, 그러면서 자신이 맡고 있는 학생들에게까지 '내가 반드시 끝까지 너희들 곁에 있으마'라고 약속하는. 그리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켜내는 노년 간지남 아니십니까. ㅋㅋㅋ 클라이막스 부분의 깜짝 등장 장면도, 엔딩씬의 모습도 정말 간지 그 자체!! 거의 만화책에 나오는 허풍 잔뜩 들어간 열혈 간지 히어로급 캐릭터인데 그게 참 슬프면서도 은근히 폼나게 잘 절제해서 연출되어 있고 배우님 연기도 좋아서 그냥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캐릭터 얘기만 해도 A4 몇 페이지는 필요할 정도로 그냥 주요 캐릭터들이 다 좋아요. 카를로스, 하이메, 카르멘, 콘치타에다가 심지어 시종일관 찌질하고 불쾌한 빌런인 하킨토 조차도 다 강렬함을 품고서 자기 역할을 다 합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매우 델토로식으로 아름다운 '탄식하는 자' 유령이 크게 한 몫 해주고요. 제가 살면서 본 '슬픈 유령'들 중에 대략 순위권. 거의 탑급으로 쳐줘야 할 정도로 아름답고 서정적인 유령이었네요.
(그러니까 한 번 보시죠!! 시즌의 장벽을 넘어!!!!!)
- 워낙 유명한 영화라서 뭐 더 길게 적을 것도 없겠고.
오랜만에 다시 봐도 여전히 아름답고 강렬한, 그러면서 짠하고도 감동적인 여운을 남기는 훌륭한 영화였습니다.
혹시 델토로식 비주얼이나 잔혹함을 안 좋아하는 분들이라도 이 영화는 볼만해요. 기괴한 이미지나 고어 같은 거 거의 없고 호러 요소는 분명히 있지만 결국엔 낭만적으로 감동적인 드라마거든요. '판의 미로' 보다도 훨씬 안 호러 안 기괴 무비라서 별로 취향 탈 것도 없다는 거.
이 영화는 '판의 미로' 때문에 델토로 영화 얘기를 할 때 좀 후순위로 밀리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냥 그것도 아주 좋고 이것도 아주 좋으니 동급으로 같이 언급해주지 않을래? 라는 맘이 드는 두 시간이었어요. 볼 곳이 시즌(혹은 iptv... 에는 있으려나요.) 밖에 없는 게 안타까운데. '피노키오' 반응이 이렇게 좋으니 혹시 조만간 넷플릭스가 올려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해 보네요. 하는 김에 '크로노스'랑 '미믹'도 좀! 부탁한다!!!
+ 그래서 '악마의 등뼈'는 뭐냐면 진짜로 악마가 나오는 게 아니라
태아 척추 기형의 일종이라네요. 그리고 우연인지 의도인지
델토로의 조국, 스페인 말고 멕시코에 있는 지역 이름이기도 하답니다. 대충 저렇게 생긴 모습을 보고 어떤 창의력 대장이 악마의 등뼈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인가 보죠.
2022.12.16 09:22
2022.12.16 09:33
내전으로 멕시코로 피난 와서 정착한 스페인 사람들의 자식들과 기독교 계열 학교를 함께 다녔다나봐요. 그 시절에 보고 듣고 경험한 게 인생에 강렬하게 남았던 모양이고 그걸 싹 다 쏟아낸 게 이 '악마의 등뼈'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판의 미로'는 소재는 거의 같지만 주인공도 여자애고 학교도 안 나오고 그러네요.
아 '굿바이 칠드런' 좋았는데요. 본지 너무 오래돼서 '좋았다' 말곤 기억에 없네요. ㅋㅋㅋ 이것도 한 번 찾아볼까봐요.
2022.12.16 09:27
스페인 내전을 비롯한 그 지역 역사는 물론이고, 스페인어를 알아서 문학, 특히 시를 이해한다면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합니다. '판의 미로'가 비슷한 역사적인 맥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동화 형식으로 어필하는데 비해서, '악마의 등뼈'는 타지역 사람들에게 내가 많은 걸 놓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해서 언급이 덜 되는 것 같아요.
2022.12.16 09:39
영화 보고 나서 뒤늦게 인터넷 검색하며 스페인 내전 역사를 공부하고 있어요. ㅋㅋㅋ 의사쌤이 읊어주는 시가 감동적이었는데, 생각해보면 그것도 배경 지식이 있으면 더 감동적일 수 있었겠네요. 역시 학생 때 공부를 열심히 해야....(?)
그렇네요. '악마의 등뼈'가 실제 그 시절 역사를 다루면서 환타지를 첨가한 느낌이라면 '판의 미로'는 그냥 잔혹 동화 느낌이었죠. 후자가 더 쉽게 다가오는 게 당연하긴 하겠어요.
2022.12.16 13:23
2022.12.16 13:52
아 역시 이제 문 닫을 상황이라... ㅠㅜ 그럼 이제 사실상 OTT에선 멸종된 셈이네요. 넷플릭스가 구입해주길 바라는 수밖에요.
미믹은 아무래도 좀 고용 감독 같은 입장에서 만든 영화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드는 작품이었죠. 감독 개성이 덜 드러나는 전형적인 장르물이었으니.
소년기숙사 배경으로 좋아하는 영화 루이 말의 '굿바이 칠드런' 생각이 납니다. '악마의 등뼈'도 언젠간 봐야겠어요. 표현 방식은 아-주 거리가 멀겠지만요.
그런데 델토로 감독은 스페인을 무척 사랑하시나 봅니다? 내전 시기 스페인이 당시에도 세계적 주목을 받았던 모양인데 이야기거리, 생각거리가 많은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