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8 23:09
- iptv로 봤구요. 스포일러는 없도록 할게요.
- 영화가 1981년에 나왔으니 그 시절이 배경이겠죠. 당시 31세였던 배우 김영애씨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당시 나이 48세였던 윤일봉씨가 남편이니 애초에 나이 차이가 많은 부부라는 설정이었던 것 같구요. 남편의 직업은 곤충학을 연구하는 나비 전문가 겸 대학 교수. 상당히 부자에요. 집이 아주 으리으리하거든요. 암튼 김영애씨는 참말로 존재감이 없어서 이 영화의 진짜 귀신 같은 느낌의 어린 딸래미 하나를 키우는 전업 주부로 살고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일주일, 보름씩 집을 비우고 나비 잡으러 다니던 남편이 어느 날 귀한 걸 발견했다며 동료들을 불러다 자기가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는데, 거기에 난데 없이 무당 형상의 목각 인형의 사진이 들어 있지 뭡니까. 그걸 우연히 목격한 김영애씨는 뭔가 불길한 기운을 느끼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나비 여행을 다녀온 남편 놈이 무슨 길 잃은 강아지 주워오듯 어디서 무당 딸을 주워와 버렸습니다. 그래도 뭐 남편이 가정부로 쓰자니까 금방 기분이 좋아지긴 합니다만, 아니 이 19세 처녀가 벗겨 놓고 보니(...) 너무나 섹시한 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요놈이 신주단지 모시듯 끌어안고 있던 보따리를 풀어보니 아까 사진으로 본 바로 그 목각 인형이 툭 튀어나오고.
백치미가 좔좔 흐르는 그 처자는 말을 잘 듣는 듯 하면서 뭔가 거슬리는 행동들을 하고, 며칠 지나면서 보니 왠지 남편이 이 처자에게 끌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슬슬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괴상한 일들이 집에 일어나기 시작을 하죠.
- 제목에도 적었듯이 뭐 전설의 레전드죠. 탑골 골방 할매 할배들에게 '여곡성'과 함께 어린 시절 멋모르고 접했다가 트라우마를 남긴 추억담을 제공한다는 중요한 역할을 해낸 말 그대로 '추억의 영화'. 다만 어려서 테레비로 볼 땐 몰랐죠. 이게 19금 야한 영화이기도 했다는 걸. ㅋㅋㅋ
- 일단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화질이었습니다? ㅋㅋ 되게 깨끗하고 보기 좋아요. iptv에 있는 이 시절 영화들은 대체로 너덜너덜한 필름을 고문해서 억지로 얻어낸 영상이라는 느낌인데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가 않더라구요. 엔드 크레딧을 보면서 수수께끼가 풀렸습니다. 한국 영상 자료원에서 괜찮은 상태의 필름을 찾아서 4K로 리마스터 했다나봐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ㅠㅜ
- 배우들도 눈에 띕니다.
우선 김영애씨 젊은 시절의 미모가 눈길을 끌죠. 연기도 좋습니다. 자주 튀어나오는 난감한 문어체 대사들과 그 시절 영화 특유의 억양들에도 불구하고 구리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거든요. 사실 예뻐서 다 덮고 본 걸지도 주인공의 삶을 파탄에 빠트리는 백치미 팜므 파탈 '미옥'역을 맡은 이기선씨도 괜찮습니다. 김영애씨만큼 대놓고 '배우다!!!'라는 느낌의 미모는 아니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의외로 현대적인 느낌의 마스크에 어리고 뽀송뽀송하면서도 당돌한 느낌이 잘 살아나더라구요. 이 둘이 붙어서 적대하는 장면들을 보면 의외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vs
그리고 우리의 남편님하는... 제일 난감한 건 내용상 자꾸 이 양반의 노출씬이 나온다는 겁니다. 너무나도 80년대 느낌으로 친근한 몸매라 그게 좀 민망한 느낌이. ㅋㅋㅋ 하지만 그 외엔 괜찮았어요. 왕짜증 80년대식 꼰대 남편 같은 이미지인데 애초에 이 분 캐릭터의 역할이 그거라서요. 맡은 역할에 어울리면 된 거죠 뭐. 특히 초반에 친구들 불러 놓고 사진 보며 노는 장면이 압권이었습니다. 다 같이 옛날 옛적 꼰대 같은 대사들을 치고 그 시절 할배스런 농담을 하면서 껄껄거리는데 거의 극사실주의 느낌! (쿨럭;;)
- 좀 쌩뚱맞지만, 김영애의 생활, 그리고 남편과의 관계 같은 걸 보면서 괴상한 재미를 느꼈습니다.
이게 굉장히 옛날 영화, 옛날 드라마스러운 관계거든요. 남편은 하늘, 아내는 땅! 같은 소릴 다들 당연한 상식처럼 하고 다니던 시절의 부부 관계 말이죠.
아내는 남편의 몸종처럼 행동하고 생활하는 게 당연하고, 남편은 거들먹거리면서 아내를 알차게 부려먹으면서 가끔 생색내듯 잘 해주며 좋은 남편 행세하던. 그리고 남편 출근 후에 그 아내는 친구 불러다 집에서 맥심 냉동 커피 가루에 프림 타서 당시 기준 예쁜 잔에 담아 호호호 거리며 수다 떠는 게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상이었던 뭐 그런 모습.
그걸 2020년에 보고 있자니 되게 신기하더라구요. 그랬구나. 그 시절엔 정말 저러고 사는 게 바람직한 삶이었지... 뭐 이런 생각을 내내 하면서 봤습니다.
- 어쨌든 이게 호러 영화니까 호러 이야기를 해야죠.
일단 스토리 측면에서는 좀 놀랐습니다. 결국 그러니까 이게 당대를 살던 억압된 주부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그 주부들이 두려워할 현실적 악몽을 그린 이야기란 말이죠. 기껏 집에서 죽어라고 수발 들며 모셔놨더니 이 남편 놈이 어디 가서 어린 여자애랑 바람 피우고 다니고 본인은 찬밥되는 그런 전개요. 그리고 그 남편과의 관계가 본인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 없이 거기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깝깝함. 이런 내용을 김영애의 관점에서 현실과 환상을 모호하게 오가며 보여주는데, 뭐 그 심리 묘사의 퀄리티는 둘째치고 이렇게 분명한 주제를 담은 호러 영화가 그 시절에 나왔다는 게 놀라웠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영화적' 측면에서 보자면 그냥 그 시절 영화입니다. 촌스럽고 어색한 대사, 촌스럽고 어색한 카메라, 촌스럽고 어색한 음악 사용과 촌스럽고 어색한 편집. 특히 그 만화경 효과는 왜 그리 자주 나오던지 참. ㅋㅋㅋㅋㅋ 아니 뭐 81년 한국을 기준으로 한다면 만듦새가 떨어지는 영화는 아니에요. 하지만 시대를 초월한 레전드 같은 게 되기엔 되게 기술적으로 평범한 영화였다는 거죠. 그리고 덤으로 초중반 전개가 되게 느리고 자극이 적어요. 진짜 '호러' 같은 장면들은 대부분 영화 끝나기 10여분 전에 우루루 쏟아지고 맙니다.
음... 근데 그래도 꽤 괜찮은 구석들이 있었습니다. 일단 그 목각 인형이 참 촌스럽고 유치한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기괴하고 불쾌한 느낌을 주는 게 있어요. 또 두 여자들이 합이 잘 맞아서 긴장감도 조금은 살구요. 막판에 쏟아지는 호러 장면들은 절반 정도는 단순한 깜짝 쇼이지만 또 어떤 장면들은 꽤 보기 좋더란 말이죠. 그리고 그 유명한 마지막 장면은 지금 봐도 임팩트가 상당합니다. 김영애씨 비주얼을 되게 잘 살렸다고 해야 하나... 뭐 그런 느낌.
그래서 결국 상당히 재밌게 봤네요.
- 종합하자면 이렇습니다.
지금와서 보기에 무서운 영화는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괜찮은 텍스트이기도 하고. 또 은근히 재미가 있어요. 호러 보다는 심리 스릴러 같은 느낌이랄까.
어렸을 때만 보고 못 보신 분, 아예 못 보셨는데 호러나 스릴러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한국 영화 박물관'에 방문한 기분으로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아주 만족했어요. 어릴 땐 이런 영화인 줄 전혀 모르고 봤었거든요. ㅋㅋ
+ '샤이닝'이 떠오르는 장면이 한 번 나와요. 감독이 호러 팬이셨나... ㅋㅋ
++ 보다보면 배우들 몸이 어딘가에 부딪히면서 카메라가 출렁~ 하고 흔들리는 장면이 짧게 지나갑니다. 다시 찍기 어려운 장면도 아니었는데 아무도 눈치를 못 챈 걸까요.
+++ 이것저것 검색하다 보니 남편역 배우분... 의 따님도 배우이신데 그 남편이 엄태웅이더군요(...) 배우 본인은 1934년생이신데 아직 살아계십니다. 감독은 이미 돌아가셨고 다들 아시다시피 김영애씨도... 명복을 빕니다.
++++ 한 번 적었다가 등록 직전에 날려 먹고 처음부터 다시 쓴 글입니다. 원래 적으려던 내용중 상당 부분을 까먹은 것 같지만 다시 다 떠올리기도 귀찮네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마무리.
2020.09.18 23:37
2020.09.19 01:06
그냥 이거 말곤 취미 생활의 선택 옵션이란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몸부림을 치고 있을 뿐입니다. ㅋㅋ
19금이지만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뭐 평범한 넷플릭스 19금 드라마에 비해서도 아주 얌전해요. 흥행은 무리일 듯. 하하;
2020.09.19 00:03
2020.09.19 01:08
아니 어째서 어릴 때 처음 본 영화가 이런 영화가 될 수 있는 거죠. ㅋㅋㅋ 전 얌전하게 이티였는데요.
네, 여곡성은 사실 지금 보면 그냥 코미디 같은 느낌인데. 이 영화는 귀신이 안 나오는 장면들에도 다 멀쩡한 내용이 있고 드라마가 있어서 세월이 흘러 호러 효과가 약해져도 여전히 재밌는 구석이 많은 것 같아요. 알맹이가 있는 스토리의 힘인 듯.
2020.09.19 00:31
저놈의 목각인형 좀 트라우마 비슷하게 남아있어요. 이기선씨 그립네요. 더불어 80년대 여러 집에 "시골에서 올라왔다는 정체모를 언니인지 누나인지 친척도 아닌" 사람들이 많이 얹혀살던 사회상도 생각하게 됩니다.
2020.09.19 01:09
영화를 보면서 그 인형이 나올 때마다 '진짜진짜 세상 무서운 영화'라고 호들갑 떨던 친구들 생각이 났어요. ㅋㅋ
맞네요. 그러고보니 그 시절엔 그런 일도 많았고 드라마 같은 데도 그런 설정의 캐릭터들이 자주 나왔죠. '상경'한 청춘들.
2020.09.19 09:40
김영애씨를 좋아해서 젊었을 때 찍었다는 이 영화도 찾아보고 싶었어요. 로이배티님 감상을 읽으니 정말 보고 싶은데요. 이기선씨도 아주 어렸을 떄 기억이지만
TV에서 봤던 기억이 있어요.
2020.09.20 02:00
의외로 이기선씨를 기억하는 분들이 꽤 있더군요. 일찍 은퇴해서 아쉽다는 분들도 많고. 심지어 옛날 출연작들 속 모습들을 움짤로 만들어 모아 놓은 블로그도 보고 깜짝 놀랐네요. ㅋㅋ
혹시 iptv 이용하시면 vod에 있나 확인해보세요. 저의 경우엔 무료라서 부담 없이 봤습니다.
2020.09.19 13:52
겁 많아서 못 봤지만 이름은 너무나 익숙합니다 ㅋㅋㅋ 여곡성, 얼굴 없는 여자와 함께.
어렸을 때 참 예쁘다고 생각했던 배우 중 하나가 이기선인데 지금 보니 기억보다도 예쁘네요. 그때 제 취향이 약간 청승과;여서 지금 보면 촌스럽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근데 제가 이걸 안 본 것이 맞긴 맞는지 ,왜 줄거리를 다 아는 걸까요 ;;
2020.09.20 02:01
워낙 전설의 레전드여서 그런 게 아닐까요. 저도 그런 영화들 꽤 있어요. 분명히 못 본 게 맞는데 다 본 사람과 본 척하며 대화해도 아무도 눈치 못 챌. ㅋㅋㅋㅋ
2020.09.20 01:33
2020.09.20 02:02
아... 전혀 몰랐습니다. 제가 본의 아니게 윤혜진씨에게 실례될만한 말을 적어놨군요. ㅠㅜ 윤일봉씨를 검색했는데 제가 본 글에 그냥 딸도 배우인데 엄태웅 아내다. 이렇게만 적혀 있었어요. 좀 더 자세히 찾아볼 걸 그랬습니다.
2020.09.22 17:57
실례까지야 할까요, 배우의 딸이 발레리나니 어차피 예술가는 일맥상통이죠 ㅎ
은퇴하고 육아와 살림과 의류사업(?)만 하는데도 아직 현역 발레리나보더 더 좋은 프로포션인 것은 매우 놀랍습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로이배티님 정도는 되어야 취미란에 영화감상/드라마감상을 기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시대상에 대한 고찰과 더불어서 19금 야한 영화이기도 하다는 평에 혹합니다. 365일 때처럼 영업에 대성공하실 것만 같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