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글에서 덧글로 쓰다가 새로 글을 올립니다.

우리말 사전의 큰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어원 설명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입니다.

한자어는 그냥 옆에 한자만 써 놓아서 이게 대체 언제부터 쓰던 말인지 알 수가 없고

서양어 외래어의 경우는 출처를 밝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거 없이 그냥 영어에서 온 것처럼만 돼 있어서 왜 영어 발음과 다르냐는 의문을 갖게들 되기도 하죠.


여기에다 영어 학습은 느는 반면에 제2외국어 학습은 쪼그라들어서 마치 영어가 기준이 되는 언어인 듯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늘었습니다.

실생활에서도 그렇고 인터넷에서도 그렇고 이를테면 알레르기는 일본말, 알러지가 영어(맞는 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꽤 되죠.

다행히도 이 낱말은 사전에 독일어가 어원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어 사전을 찾아보고 나서야 좀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예컨대 라디오, 카메라, 비타민, 할로겐, 부탄 따위는 어원 설명 없이 사전에 로마자 표기만 있으니 '잘못된' 일본어 발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말 외래어에 일본어 영향이 큰 것도 사실이나 보기의 낱말들은 주로 라틴어나 그리스어 어근에서 유래해 흔히 독일어나 불어 등에서 만들어진 국제공통어휘입니다.

마니아 같은 말도 그리스어에 mania가 있고 이것이 여러 언어에서 접미사로 쓰이는데

일본어는 일단 홀소리가 ㅏㅔㅣㅗㅜ 다섯 개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단 이런 희랍-라틴어계 어휘의 a는 ㅏ로 취하는 것이 합리적이기도 하기에 그런 규칙이 나온 것이죠.


상대적으로 영어는 음운 변화가 커서 이런 라틴어-그리스어 계통 어휘들을 영어 발음에 따라서 한글로 표기하면 매우 괴상해집니다.

우라늄을 유레이니엄으로 쓴다고 생각해 보시죠.

이데올로기, 헤게모니를 영어에 가깝게 쓰자면 뭐가 좋을까요? 아이디알러지, 아이디올로지, 히제머니, 헤저모니?

물론 훌륭하신 대한화학회의 삽질 덕분에 앞으로 부탄은 뷰테인, 게르마늄은 저마늄, 티타늄은 타이타늄(그렇다고 타이테이니움/엄도 아니고!)으로 쓰게 되는 날이 오게 됐습니다.

바이타민 같은 경우는 관철시키려다 철회되기는 했는데 참 한심하긴 하지만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해요.


단순히 영어가 아니라 유럽 언어 전체의 역사가 함께 녹아 있는 어휘들인데 한국은 이걸 독일과 일본을 거쳐 받아들인 다음

나중에 미국을 거쳐 무비판적으로 수입하다 보니 나름의 기준을 세워 놨음에도 이렇게 시나브로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언어라는 것이 늘 바뀌게 마련이므로 중립적으로만 본다면 원래부터 옳은 것은 없기에 사람들이 많이 쓴다면 그게 맞는 말이 되겠죠.

다른 언어들도 영어의 영향이 많아 독일어도 Champion 같은 낱말이 원래는 불어처럼 샹피옹이었다가 최근은 챔피언으로 발음하는 사람이 많긴 합니다.

하지만 별 비판 없이 다른 언어를 기준으로 삼아 표준어 낱말 자체를 바꾸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을 뿐더러 불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국제적인 의사 소통이 꼭 영어 발음만 따라야 잘 되는 게 아님에도 화학자들은 귀차니즘에다가 한국말을 내던지고 말았죠.

게다가 어차피  '비-닐-마-니-아'든 '바-이-닐-매-니-아'든  한국어 음운 규칙에 따른 한국 사람 발음은 영어 화자가 듣기에 영어의 억양과 강세가 없다면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영어 학습이 널리 퍼지긴 했어도 이런 근본적인 이해가 없으니 꾸준히 어린쥐 어른쥐 타령이 나오고 화학용어의 영어화가 진행된 것이죠.

한국어의 외래어도 한국어의 특징이고 개성이므로 주체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왜 한국어 표준말은 거부하면서 굳이 영어를 표준으로 두고 따라야 할까요?


서로 차용이나 접촉 관계가 있는 언어라면 어원과 생김새는 비슷한데 발음이나 뜻이 다른 낱말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이 물론 때로는 의사 소통에 장애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장애물은 아니고 오히려 소통의 발판이 되기도 하는 것이죠.

그저 낱말 몇 개를 영어(미국어) 발음에 더 가깝게 쓴다고 해서 영어권 화자와 더 잘 통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다른 언어권 화자와는 더 안 통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에서 러시아인이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쓰면서 호비(취미)라는 말을 했더니 한국인이 바로 못 알아듣고 좀 있다가 '하비!' 하면서 알아듣는 장면이 있었는데

아예 처음부터 그냥 영어로만 했다면 맥락상 알아들었을지도 모르고 한국에서 영어 표준 발음이 영국 기준이었다면 더 빨리 알아들었겠죠.

언어와 문화 사이의 대화와 교류는 그냥 발음을 잘하는 것보다는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과 의지가 더 중요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8658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7202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7377
109400 야구팬이라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기사 [5] Nemo 2010.07.24 3741
109399 영어의 벽 [9] DH 2010.08.04 3741
109398 방금 한국 환타지 소설 읽고 충격 먹었어요 [11] 사과식초 2014.11.20 3740
109397 현장21보고... [12] 메피스토 2013.06.26 3740
109396 [듀나인] 가족 스파팬션 추천 [8] 영화처럼 2013.01.09 3740
109395 싸이 콘서트 인터넷으로 보려고 켰는데 [7] 달빛처럼 2012.10.04 3740
109394 [유튜브] 외국인이 들리는 대로 부른 "강남 스타일" [5] espiritu 2012.09.02 3740
109393 밑에 글에 힘입어! 엔딩 씬이 황홀했던 영화 떠오르시나요? [54] canny 2013.04.05 3740
» 국어 사전 어원 설명 미비의 부작용 및 영어 학습 확산의 폐해 [31] 쿠융훽 2010.10.28 3740
109391 박대기 기자가 말합니다. [8] 01410 2010.12.08 3740
109390 PMS 증후군은 해결방법이 없겠죠? [8] 산호초2010 2010.09.24 3740
109389 안젤리나 졸리와 뱀 [12] magnolia 2010.08.14 3740
109388 무한도전 레슬링 특집의 아쉬운점 [7] 디나 2010.08.07 3740
109387 오늘 전국 노래자랑 보신 분? [2] 자몽잠옷 2010.06.20 3740
109386 이드라마 그중 제일 재밌는거 같은 [3] 가끔영화 2010.06.07 3740
109385 사람이 아직 다 안온다는 느낌에 [3] 가끔영화 2010.06.05 3740
109384 문재인의 문제. [36] 바스터블 2016.11.28 3739
109383 주화입마한 이재명 - 적은 혼노지에 있다... [30] 도야지 2016.11.21 3739
109382 손여은 , 정유미 닮지 않았나요? [8] 이안 2014.03.07 3739
109381 글자수, 원고지 계산기 [4] 완수 2013.10.28 373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