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12 00:15
- 2021년작입니다. 런닝타임은 94분. 장르는 그냥 드라마에요. 스포일러 없구요.
(지금 보니 포스터부터 이미 셋이 아닌 두 사람 이야기라는 게 노골적으로 나와 있었군요. 영화를 보기 전엔 이걸 못봐서. ㅋㅋ)
- 여고생 셋이 모여 매우 진지한 폼으로 '3행시 클럽'의 해체를 선언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유는 별 거 없고 곧 수능이라서요. 당연히 이 셋은 아주 절친이었지만 수능과 대입을 기점으로 인생이 확 갈려요. 한 명은 하버드(!), 다른 한 명은 대구대학교, 다른 한 명은 그냥 진학을 포기하고 고향 청주에서 아무 알바 자리나 하나 구해서 세월을 보내죠.
그렇게 뿔뿔이 흩어져서 서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다 보니 당연히 셋의 우정에는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먼저 하버드생이 떨어져 나가고. 나머지 둘의 사이에도 뭔가 쎄-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방학을 맞아 잠시 서울에서 혼자 지내던 대구대생 김민영씨가 '청주 나달 테니스 클럽' 알바생 정희를 집으로 초대하면서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과연 이 둘은 우정을 회복할 것인지, 아님 아예 쐐기를 박고 씁쓸 엔딩을 맞을 것인지...
(삼행시 클럽의 위엄. 역시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보니 이것도 영화 속 캐릭터들을 확실히 반영했구나 싶어 신기합니다.)
- 일단 이게 참으로 인디 영화입니다. 칭찬도 아니고 비판도 아니고 그냥 그래요. 정말로 '나는 한국 인디 영화를 보고 있다!'는 기분이 계속 드는 영화였거든요.
그러니까 먼저 기술적으로도 살짝 모자라죠. 화면 때깔도 종종 한계를 드러내구요. 카메라도 아주 가아끔은 아마추어 영화들 보는 기분이 들게 하구요. 또 2021년 영화임에도 주인공들 사는 모습은 어딘가 20세기 분위기로 구질구질한 느낌이 들어요. 배경이든 소재든 간에.
하지만 뭣보다 '한국 인디다!' 라는 느낌이 드는 건 그 정서와 유머 감각입니다. 뭔가 굉장히 본인 체험에서 우러나온 듯한 일상 디테일이나 소품 같은 것들이 자꾸 나오구요. 마가 뜨는 듯 뻘~ 한 유머 감각도 그렇구요. 마지막으로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올라오는 주인공 캐릭터들에 대한 격한 몰입과 애정어린 시선 덕에 종국에는 앞서 말한 투박한 부분들이 마치 '진정성'의 표현 같은 느낌으로 승화된다는 부분이 그래요. 아니 이걸 뭐라고 깔끔하게 설명을 못 하겠는데요. 암튼 그런 게 있습니다? ㅋㅋㅋ
(방구석과 어질러진 물건들 디테일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다 보면 역시나 '한국 인디야...' 라는 생각이. ㅋㅋ)
- 세 친구로 시작하지만 결국 민영과 정희 두 사람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이고 그 중에서도 완전한 단독 주인공은 정희에요. 네, 성적표의 '김민영' 말고 정희가 주인공입니다. 셋 중에서 가장 깝깝한 인생을 사는 인물이죠. 뭐가 어찌됐든 하버드까지 들어간 수산나의 인생은 적어도 졸업 후에는 탄탄대로일 확률이 크겠고. 비록 대구에 없는 대구 대학교라지만 멀쩡한 대학을 들어가서 다니고 있는 민영 역시 구체적인 미래를 그리며 나름 열심히 살고 있는데 반해 우리 정희씨는 정말 곁에서 지켜보기 난감한 인물입니다. 어떻게 봐도 미래 같은 건 그릴 수 없는 곳을 제 발로 찾아가서 알바를 하고. 자기 미래에 대해서도 딱히 목표도 비전도 없어요. 그림 그리기를 잘 한다지만 그걸로 뭘 하겠다는 계획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니 별 무쓸모구요. 그러면서 계속해서 막연하게 로맨틱한 망상만 하고 있으니 그 가족이든 절친이든 복장 터질만 합니다. 그런데 현실엔 정말로 이런 친구들이 종종 있죠. 그래서 그 대책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희의 캐릭터에는 구체적인 리얼리티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희 캐릭터를 강렬하게 만드는 건 그런 리얼리티 보다도 이야기 속에서 정희가 차지하고 있는 포지션입니다. 그러니까 얘는 결국 떠나간 친구들과의 우정이 영원하리라 믿으며 원래 있던 그 곳에서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기다리는 인물이거든요. 짝사랑이고, 그게 또 이미 새드 엔딩이 확정된 상황인데 본인은 그걸 전혀 몰라요. 그러니 이걸 지켜보는 심정이 애절하겠습니까 안 애절하겠습니까. 민영의 집에 가겠다고 바리바리 괴상한 추억 아이템들을 캐리어에 담고 있는 이 양반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푹푹 쉬게 되는 게 저만의 경우는 아니었을 겁니다.
(딱 인물 관계가 보이지 않습니까. 정말 보는 내내 안쓰러워 죽겠던 우리 정희씨.)
- 제목에서 '고양이를 부탁해'를 소환한 이유는,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소재가 많이 비슷하죠. 따스한 우정을 나누던 10대 시절을 끝내고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아가면서 각자의 인생길과 함께 갈라져 나가는 여성들의 우정을 그린 이야기이고 그걸 다루는 태도도 비슷합니다. 얘랑 쟤랑 걔가 모두 서로 다른 길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그냥 멀어지든, 부딪히며 나쁘게 멀어지든 하지만 결국 멀어지게 되는데. 그게 참 아프고 슬프지만 사실 나쁜 것도 아니고 그 중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거죠.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게 인생인 거구요. 그리고 카메라는 그 과정에서 고통을 받는 인물들을 무덤덤한 척하면서 사실 애정을 듬뿍 담은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대체 '청주 나달 테니스 클럽'에 그렇게 영혼을 바쳐서 뭐 할 건데...;)
다만 이 영화의 경우엔 이야기가 '고양이를 부탁해'처럼 드라마틱하지 않습니다. 김민영은 '고양이를...'의 혜주만큼 야멸차지도, 그만큼 단단하지도 않아요. 정희가 아무리 현실 감각이 없다 하들 '고양이를...'의 태희에 비할 바는 아니구요. 또 '고양이를..'의 지영만큼 격하게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는 인물도 없어요.
그만큼 이 영화 쪽이 더 현실적인 느낌이고. 그래서 이야기의 마무리도 훨씬 더 소소합니다. 그런데 그게 먹혀요. 그렇게 소소해진만큼 이야기는 더 보편성을 획득하고, 그래서 마지막의 그 덤덤한 작별과 마무리가 마음에 더 큰 울림을 줍니다. 굳이 이 두 영화를 비교할 필요는 없겠지만, 제겐 이 영화 쪽이 더 취향이었네요.
(그래도 제목이 김민영이니 김민영씨 크게 나온 짤도 하나 던져 보구요.)
- 사실 이렇게 뭔 소린지도 모를 이상한 문장들을 늘어 놓으며 길게 얘기할만한 영화는 아닙니다.
중복을 무시하고 간단히 마무리하자면 '서로 달라지는 인생길에 찢어지고 갈라지는 고교 시절 친구들의 상실과 성장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야기'구요.
전반적으로 소소하고 무덤덤한 스토리 텔링 전략을 통해 마지막에 더 찡한 느낌을 주는 데 성공한, 착하고 좋은 영화입니다.
단점을 찾자면 꽤 있어요. 도입부는 정리가 덜 되어서 좀 산만한 느낌이고, 또 앞서 말했듯이 기술적으로, 경제적으로 부족한 티가 어렵잖게 눈에 띄기도 하구요. 하지만 클라이막스 즈음에 가면 그야말로 화면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것 같은 '진심' 때문에 그걸 다 덮고 호감을 갖게 되는 영화입니다.
살면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일을 겪어 본 사람들이라면 아마 대부분 공감하며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거에요. 사알짝 추천해 봅니다.
(그 시절 금방 가죠. 다시 안 돌아오죠. 하지만 그게 삶이고 결국 다들 그러면서 큰다는 거.)
+ 가끔은 인디 영화 속에서 이렇게 현실 감각 없는 캐릭터들이 자주 나오고 사랑 받는 게 다 감독들의 본인 경험담이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합니다. ㅋㅋ
++ 정희 역의 김주아씨의 비주얼이 제겐 또 괴상한 관람 포인트였습니다. 처음에 딱 나올 때는 '아 정말 현실적으로 고운 외모네' 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째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예뻐지더니 마지막엔 그냥 연예인 같아요. 왜죠. ㅋㅋㅋ 구글 검색하면 나오는 제대로 꾸민 사진들을 보니 뭐, 그냥 연예인 맞네요. '지금 우리 학교는' 에도 나오셨었군요.
그리고 이제 보니 올해로 스물 되셨네요? 그럼 고2 때 스무살 연기를 하신 거군요. 대단한 차이는 아니지만 좀 드문 경우 같아서 신기합니다. 하하.
+++ 극중에서 나오는 '대구대는 대구에 있지도 않아' 라는 대사 때문에 검색을 해봤네요. 정말로 대구에 없군요. ㅋㅋ 그 바로 옆에 붙은 경산시에 있습니다.
2023.01.12 00:50
2023.01.12 08:11
사실은 그저 지니티비 영화 요금제에 무료로 올라온 한국 인디 영화들을 몰아서 보고 있을 뿐입니... ㅋㅋㅋ 이 두 편 말고도 작년, 재작년 작품들이 두엇 더 올라와 있으니 이어서 달리게 될 확률은 높네요.
말씀대로 도입부는 코미디가 강할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실제로는 애틋함이 대부분을 이루는 영화더라구요. 근데 그 감정을 잘 살려내서 좋았어요.
정희, 민영이는 물론이고 그 '테니스의 왕자'님까지도, 나오는 젊은이들 하나하나 다 긍정적, 애정어린 시선으로 다루는 게 좋더라구요. 특히나 그 왕자님은 그냥 개그용 찌질이로 묘사하기 딱 좋은 캐릭터인데도 전혀 안 그랬죠. 정희가 테니스장에 남겨두고 간 물건들을 그 왕자님이 사용하는 장면이 좋았어요.
정희가 남겨두는 성적표는 참 따뜻하면서도 은근 되게 엄격했죠. 덕담 무드인 건 맞는데, 그러면서도 할 말 다 하더라구요. ㅋㅋㅋㅋㅋ 그래서 더 맘에 들었습니다.
2023.01.12 07:50
2023.01.12 08:13
제가 글을 너무 중언부언하면서 헷갈리게 적었나 봅니다. 상당히 재밌게 봤다고 칭찬하는 글이었는데요.... ㅋㅋㅋㅋ 그리고 정희야 당연히 사랑스럽죠. 하지만 그건 깝깝함과는 별개입니다(...)
2023.01.12 08:24
평소보다 영화에 대해 할 말이 없어서 정리해버리는 느낌이 이번 리뷰에서는 들어서요.
글 쓰신 거 보면 복장 터진다, 한숨 나온다 이런 강한 표현들을 쓰셔서 정희를 별로 안좋아하신다고 느꼈어요ㅋㅋ [고양이를 부탁해]에서도 이요원 캐릭터를 제일 좋아하신다고 하셨는데 진취적이면서 빠릿빠릿한 캐릭터를 좋아하시나봅니다.
2023.01.12 08:58
좋게 봤어도 할 얘기는 많지 않은 영화가 있고 재미 없게 봤어도 할 얘기는 많은 영화가 있고 그렇거든요. 제 글 많이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진짜 맘에 안 드는 영화를 보면 오히려 구구절절 까느라고 평소보다 글이 길어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덧붙여서 저는 소감 글 적을 때 늘 솔직하게 씁니다. '고양이를 부탁해보다 더 취향에 맞았고 찡하게 잘 만든 영화다' 라고 적었으면 정말로 저는 그냥 그렇게 본 거에요.
아뇨 진취 빠릿빠릿 주인공은 전혀 제 취향이 아닙니다. 호러/스릴러의 주인공은 빠릿빠릿한 게 좋지만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혜주가 가장 맘에 들었던 건 그냥 그 중에서 팬시함이 가장 덜 묻은 현실적인 캐릭터였고 또 마치 현실에서 실제로 아는 사람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잘 만들어진 캐릭터여서였죠. 솔직히 말해서 혜주 외의 다른 캐릭터들은 다 환타지에 가깝다고 봤습니다. '고양이를 부탁해'가 그냥 낭만적 청춘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 발 붙이고 있는, 진짜 당시 그 또래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로 평가받을 수 있는 건 혜주 때문이에요.
그리고 정희는 그냥 대놓고 귀엽고 대놓고 편들어주고 싶어지는 캐릭터잖아요. 그래서 복장도 터지고 한숨도 나오는 겁니다. 아예 비호감이었으면 현실의 인물도 아닌 걸 제가 왜 한숨을 쉬며... ㅋㅋㅋㅋ
2023.01.12 09:58
혜주 외의 다른 캐릭터들이 다 환타지에 가깝다고 보셨나요? 이건 좀 동감하긴 어렵네요... 태희를 제외하면 다들 엄청나게 리얼한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궁금한 건 정희를 왜 한숨을 쉬면서, 그러니까 답답해하면서 보시는걸까 하는 거였어요. 저는 정말로 부러워하면서 봤거든요. 그래서 저는 로이배티님이 정희를 별로 안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로이배티님이 정희를 사랑스러워하지만 복장터져하면서 봤다는데 더 캐물을 생각은 없습니다ㅋ
2023.01.12 10:31
2023.01.12 09:21
곧 볼 생각이라 본문은 안 읽었으나 댓글은 읽었습니다. 영화 안 봤으면서도 다 설득력 있게 다가오네요. 인물들이 더 궁금해지네요.
저는 '고양이를 부탁해'도 안 봤어요. 막상 보면 괜찮은 영화일 터인데 아마 팬시하네,란 선입견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이 영화는 보고 싶습니다.
2023.01.12 10:33
2023.01.12 12:11
2023.01.12 17:12
네 검색해보니 나오던데 제가 그 영화를 안 봐서요. ㅋㅋ 이걸 좋게 보고 나니 호기심이 생기... 긴 하는데 아마 안 볼 것 같아요.
그렇게 대구와 경북은 상호보완적 관계인 거로군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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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 DJUNA | 2013.01.31 | 363171 |
갑자기 작년 국내 독립영화들에 꽂히셨군요? 연달아서 ㅎㅎ 밑에 언급했던 다양한 장르로 좋은 작품들이 나왔다에 포함되는 작품입니다.
저는 사전정보 전혀 모르고 입소문이 좋았다는 것만 듣고 봐서인지 오프닝씬만 보고 무슨 여고생들의 삼행시 버젼 '족구왕' 같은 느낌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본편이 제대로 시작하자마자 완전히 빗나가더군요. 같은 옷을 입고 대학진학이라는 같은 목표로 달려갈 때는 너무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뭐를 하던 서로 통하는 것 같던 친구들이 어떻게 그렇게 또 순식간에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 있는지 너무 잘 그려낸 것 같습니다. 감상 당시에는 떠오르지 않았는데 글을 읽고보니 확실히 고양이를 부탁해를 연상시키는 부분들이 많네요.
정희 캐릭터 정말 걸작이죠. 한심하다 생각하면서도 자꾸 마음가고 신경쓰이고 나중에는 그래도 제발 힘내서 잘 성장해서 살아가기를 응원하게 됐습니다. 뭔가 로맨틱하게 연결을 시키지 않을까 싶었던 수능시험장에서 마주쳤던 그 친구가 '왕자'로 나타나는 순간 뿜었구요 ㅋㅋ 그냥 그 알바하는 테니스장 관련씬들이 다 좋았던 것 같아요. 이런 나른하면서도 묘하게 웃기는 분위기를 일본 청춘영화 못지않게 잘 만들어냈습니다.
영화 중반까지는 다소 까칠하고 아무리 성적이 중요해도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게했던 민영이가 어떻게 나름 열심히 살고 있었는지를 정희가 뒤늦게 알아가면서 그 '성적표'를 써주는 시퀀스가 가장 맘에 와닿았어요. 그러고나서 엔딩도 너무 감상적이지는 않으면서 현실적으로 잘 마무리한 것 같고 작년 한국영화의 나름 주목할만한 성취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정희를 연기한 김주아 배우는 얼굴이 웬지 낯이 익다 싶었는데 몇년 전에 호평받았던 독립영화 '보희와 녹양'에서 여주인공을 연기했었더군요. 이 작품도 여름을 배경으로 약간 비슷한 감성을 공유하는 성장영화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