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 잠실 실내 체육관
일자 : 2010. 08.14 19:00

공연시작시간 : 19:05
공연종료시간 : 21:00 (1시간 55분 공연)

 

 어쩌면 세기말이 90년대를 청소년으로 음악을 듣던 사람들에겐 일종의 축복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신의 상처를 분노로 표출하는 너바나를,  자신의 유약함을 냉소적으로 파괴하는 NIN을,  주저리주저리 자신을 루저라 선언하는 벡을,  청승맞은 러브송을 불러대는 라디오헤드를. 이어폰과 워크맨이 톱니같던 일상의 유일한 위안이었던 시절의 노래로 그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우울함이 공감을 얻었던 마지막 시기였을지 모를 그 시절에 스매싱 펌킨즈는 오늘을 노래하며 자신을 할퀴는 우울이 아닌 낭만을 담지한 우수를 들려줍니다. 90년대의 가장 위대한 밴드를 단 하나 꼽는다면 망설일 수 밖에 없지만 90년대의 모든 것을 담아낸 밴드라고 한다면 전 단연코 스매싱 펌긴즈를 가장 먼저 손에 꼽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21세기에 다시 유령이 아닌 살아서 돌아온 스매싱 펌킨즈에 대해서 먼저 우려를 보낼 수 밖에 없기도 합니다. 그것도 빌리코건 혼자만 살아온 스매싱 펌킨즈라면 말입니다. 90년대에도 스매싱 펌킨즈는 빌리코건의 독재 아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그것을 거부하는 이하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의 개성이 미묘하게 알력을 형성하며 독특한 충돌 에너지를 형성해 내었습니다. 하지만 Zwan과 Zeitgeist의 빌리코건은 더이상 자신에게 저항하는 멤버가 없기에 오히려 유순하고 작게 느껴집니다. 90년대의 호박들보다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으로 돌아왔지만 Zeitgeist는 90년대의 멜랑꼴리한 우수가 담아내었던 에너지를 재현하지 못합니다. 우울과 몽상을 노래하는 것이 더 이상 멜랑꼴리하지도 이지적이지도 않은 시기에서 그들의 내한은 반가웠지만 이것이 낡은 추억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2000년의 전설이 되었던 내한공연을 놓쳐다는 아쉬움과 더불어 대형 페스티벌 내한공연의 홍수였던 7-8월에서 단독공연을 하게 된 그들이 예상보다 부진했던 티켓판매를 보면서 제대로 공연이 진행될 수 있을지 걱정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아침부터 세찬 비가 내려와 점심약속을 취소하고 표를 미리 예매하지 않았기에 공연을 갈지 안갈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도 오후들어 하늘은 잿빛 구름 사이로 간간히 햇살을 내비쳐 마치 90년대의 심상처럼 표정을 그려냅니다.  이어폰으로 가장 좋아했던 그들의 음악을 회고하며 느지막하게 공연장에 도착했건만 역시나 한사로운 사람들을 보면서 공연장의 열기가 제대로 구현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져 봅니다. 현장구매 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탠딩 1000번대 초반표를 받을 수 있었는데 티켓판매량은 3000장이 조금 미달된 수준으로 잠실실내체육관의 수용인원에 비해서는 매우 적은 편이라 2층을 전부 검은천으로 가리고 무대와 사운드 콘솔을 상당히 앞당겨 객석의 크기를 상당히 줄여놓았는데 펌킨즈의 초라해진 위상을 확인할 수 있어 다소간의 안타까움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무대는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았는데 생각보다 큰 무대 좌우에 커다란 바람개비를 장식으로 걸어 놓고 30개의 오렌지색 경기장 조명을 활용한 판넬을 곳곳 배치한 채 사이키델릭 조명이 눈에 띄었는데 아릿한 서정성과 노도같은 사운드를 들려주는 스매싱 펌킨즈의 음악색깔을 잘 표현한 무대라고 생각되어 약간의 설렘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7시에 엑세스 기획사 특유의 과거 공연 클립이 시작되면서 분위기를 달구기 시작합니다. 보통 이런 클립 영상은 음향조절시간에 몇차례 반복되는지라 공연이 딜레이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공연 클립이 끝나자 마자 공연장의 불이 꺼지면서 공연장이 환호로 가득차기 시작합니다. 이번 투어의 셋리스트가 일정하지 않아서 첫 곡을 어떤 곡으로 시작할지 궁금해졌는데 매우 아련한 기타 아르페지오가 서두로 들려오면서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 스매싱 히트곡으로 알려진 TODAY로 시작합니다. 빌리코건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애상적이지도 냉소적이지도 않았지만 뚜렷하게 멋진 멜로디를 하나씩 짚어내며 자신의 카리스마를 드러냅니다. 관객의 수에 비해서 예상외로 큰 환호와 반대로 노래의 유명세에 비해서 싱어롱은 적은 편이었는데 이에 대한 의아함도 잠시 그들의 헤비넘버들인 Astra과 Ava Adore가 이어지면서 공연장을 기타의 노이즈로 가득 메웁니다. 빌리코건은 리드싱어이자 리드기타를 담당하여 처음부터 이빨로 기타연주하기등 과감한 무대매너를 선보이는데 마치 그의 모습은 연륜이 느껴지는 고참밴드의 프론트라기 보다 열정을 주체 못하는 신진밴드의 리더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공연은 크게 3곡에서 4곡 정도를 한번에 연주해 내고 잠깐의 기타 교체 시간을 가진 것을 제외하고는 매우 부드럽고 신속하게 셋리스트를 진행해 나갔습니다. 불행히도 무대 중앙 뒷편의 조명들에서 문제가 발생되어 중앙 오른쪽 뒷편의 주조명 한개와 사이키델릭 조명들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는데 공연의 큰 요소는 아니었지만 언제나 완벽함을 추구했던 빌리코건의 무대답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시종 신경이 쓰이기도 했습니다. 주조명 한개는 공연 중반 이후에 복구가 되었지만 사이키델릭 조명은 끝내 작동이 되지 않아서 노도같은 사운드로 공연장을 번쩍이는 트랜스 상태를 연출할 때 일종의 흠으로 남기도 했습니다.

 

하드니스한 넘버들로 채워진 첫 번째 파트가 끝나고 두 번째 파트는 나긋한 발리드 넘버들인 A Song for a Son 와 Eye가 이어집니다. 차분한 곡들인데다 정규앨범에 수록된 곡들이 아니라서 사람들은 차분히 무대만을 응시한 채 호박이 아니 코건이 표상하는 우울함을 감상합니다. 하지만 이 두 곡이 끝나자마자 World is vampire 의 선언으로 시작되는 세상에서 가장 냉소적인 하드록 넘버 중 하나인 Bullet With Butterfly로 분위기를 한껏 달구어놓고 선동적이면서 가장 자의식이 강하게 표출되는 United States가 이어집니다. 굉장히 인상적인 연주 및 에너지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Revolution!을 외칠 때 청중과의 공명을 통해서 더 큰 에너지를 창출하는 것에는 다소간의 미진함이 있어서 아쉬움이 남기도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관객의 호응이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곡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한 듯 싱어롱 타이밍에 객석의 반응이 미적지끈한 편이었는데 나 역시도 거의 가사를 망각하고 있었으니 30대가 가장 많은 관객이었다는 감안한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세번째 파트는 의외의 어코스틱한 파트로 빌리코건 혼자서 어코스틱 기타를 들고 나와서 어코스틱 버전으로 편곡한 Perfect와 With Every Light를 들려 줍니다. 가장 일렉트로니카한 사운드의 접근을 시도했던 Adore와 Mashina의 앨범에서 가장 서정적이고 따스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이율배반적인 느낌에 재미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빌리코건은 여기서 2000년대의 공연 당시의 추억을 회고하는 멘트를 많이 했는데 그 때의 열정을 가진 청중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욱 더 사랑스러움과 감사의 인사를 건냅니다. 그리고 본 공연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으로 기억될 넘버 Disarm이 이어지는데 빌리코건의 어코스틱 기타의 스트로크와 더불어 마치 바이올린처럼 튜닝된 제프의 기타 협연이 돋보였는데 전반적으로 공연장의 사운드가 어지롭고 명징하지 못했던 순간이 많았기에 이 순간만큼은 가장 멋진 소리를 들려주었던 감성적인 무대였습니다.

 

 이 다음 세곡은 그야말로 저의 가슴이 벅차 오를 수 밖에 없었는데 제 인생의 러브송 중 하나인 Stand Inside Your Love가 들려주고 바로 시끌시끌한 그루브함이 가득한 Tarantula가 분위기를 한껏 달구어놓고 바로 Zero가 시작되면서 그런지한 사운드의 물결이 이어집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열광했던 파트이기도 했지만 가장 아쉬움이 남기도 했던 파트였는데 명징함과 그런지한 기타 사운드의 표현력을 동시에 표현해야 하는 난해함이 있었지만 공연장의 사운드는 지극히 볼륨업만 된 채 너저분한 사운드로 명확하게 사운드의 포인트를 잡아내지 못해서 응집된 사운드의 힘을 느끼는 것에 아쉬움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zero의 철컥거리는 기타리프의 힘이 분산된 것은 아쉬움이 크게 남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냉소대신에 희망을 노래하는 조금은 낯설은 그들의 넘버 Owata가 시작됩니다. beautiful night를 말하는 긍정의 후렴구가 맴돈 후에 본 공연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드럼파트가 빛을 발하는  Cherub Rock가 공연장을 후끈 달아오르게 합니다. 물론 본 공연을 마무리 짓는 것은 낭만과 우울을 동시에 표현하는 펌킨즈의 양가적인 재기가 발현된 곡들인  That's the Way와  Tonight, Tonight가 선택됨은 당연지사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조금은 긴 애탄 앵콜 요청 시간이  지나가면 아무렇지 않은 듯 호박들은 다시 등장하여 freak를 차분하게 들려주고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낼 1979가 아닌 탐미적이고 자의식 가득한 그들의 Gossamer가 조금은 의아한 느낌으로 매우 긴 시간 동안 연주됩니다. 싸이키델릭한 측면과 솔로잉이 지나치게 긴 편이라 앵콜의 마무리로는 조금 늘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성실하게 기타의 노이즈를 조립하고 긴 여운으로 마무리 짓는 모습을 보면서 빌리코건은 인기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음악이 좋아서 무대에 서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실감하게 됩니다. 기타의 노이즈가 끊임 없이 이어지는 와중에 관객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인사를 나누는 빌리코건의 모습은 음악사의 위대함 대신에 무대 위의 행복을 선택한 뮤지션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스매싱 펌킨즈의 공연을 보고 왔다고 하니 혹자는 한물간 밴드 뭣하러 봐요 라고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몰론 가장 완벽하고 최고의 공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공연은 아닙니다.  약간의 조명 사고의 더불어 사운드는 게인만 올라간 채 정돈이 되지 않는 느낌이라서 섬세한 사운드를 재현해내는 것에는 모자람이 있기도 했습니다. 키보드 파트를 제외한 밴드 중심의 세션구성은 앨범으로 기억하고 있던 스매싱 펌킨즈의 풍성한 사운드를 완전하게 재현해 내지도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지산 이후의 공연이었기에 관객이 만들어낸 열정의 사운드가 부재했던 것은 그들의 거대한 아우라를 기억하고 있던 저로서는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무대위에서 자신의 카리스마를 제어하며 발산하는 빌리코건이 아닌 맘껏 뛰어 노는 빌리코건을 보고 조금은 기뻤습니다. 최고의 무대가 아니라도 감사와 행복을 전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다소나마 나도 답례의 말을 남기고 싶기도 했습니다. 최고의 순간으로 남은 과거의 기억에 안주하기 보다 현재의 자신의 무대에 충실한 그의 모습이 아름답고 만족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어릴적 상상보다 초라하게 어른이 되어 버린 자신이지만 과거의 낭만을 회고할 수 있는 여유와 무대위에 남겨진 기타처럼 아직 남겨야 할 오늘의 순간이 있음을 잠깐이나마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한동안 제 이어폰에는  Stand Inside Your Love의 소리가 맴돌고 있을 것 같아요. 이것이 새삼스럽게 되찾은 저의 낭만의 편린이기도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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