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0 20:11
- 1997년 개봉이구요. 런닝타임은 1시간 44분. 스포일러는 없을 겁니다.
(그 시절 '방화' 포스터 포스가 풀풀 풍기는 사진. 근데 '확률 1%'는 대체 어떻게 계산해서 나온 것일지. ㅋㅋㅋ)
- 정말정말 부끄러울 정도로 어색한 립씽크로 한 젊은 처자가 오페라를 부르고 있어요. 곧 데뷔를 앞둔 프리마돈나인 듯 합니다. 여기가 러시아인데 한국인 젊은이 프리마돈나... 에다가 '데뷔'라니 정말 대단한 실력이신가 보죠. 그래서 하유미 기자가 출동해서 인터뷰도 하고 그러... 는 와중에 갑자기 악당들이 나타나 하유미를 납치해갑니다. 그리고 소리 지르는 하유미를 진정시킨답시고 주먹으로 퍽! 퍽! 치니 죽었네요. 하유미 퇴장!
다음엔 어두컴컴해서 어딘지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호올로 러시안 룰렛 놀이를 하는 박상원씨가 보입니다. 당연히 살겠죠. 그러고 울고 뭐 그러더니 나가서 술을 마십니다. 그리고 술을 마십니다. 어색한 러시아어로 뭐뭐 말하고 암튼 술을 마십니다. 계속 술을 마십니다. 한참 후에야 러시아인 친구들이 나와서 뭐라 설명하는 걸 보니 전설의 용병이었는데 전쟁의 트라우마로 알콜 중독이 되었다... 뭐 이런 건가 봐요. 그러다 자상한 동료가 다가와서 '야 이러고 살지 말고 이 일이나 해봐' 라면서 도입부에서 안 죽은 프리마돈나님 보디 가드 일을 권유합니다.
...뭐 더 설명하긴 귀찮고 암튼 그렇게 박상원이 저 여자분 경호하다 사랑에 빠지고, 그러면서 러시아 마피아들이랑 쌈박질 하는 내용이에요.
(러시아를 지배하는 고독한 액션 히어로 박상원!!!)
- 일단 '제작비 25억의 대작'으로서 이 영화에 대해서 한 마디로 평가하자면, '신비한TV 서프라이즈' 팀에게 2억 5천도 아니고 2천 5백 정도 쥐어주면 거의 똑같은 때깔로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뭐 이런 느낌입니다. 뭐 클라이막스에 헬리콥터가 등장한다는 걸 생각하면 좀 부족할지도? 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뭐 그것도 서프라이즈팀이라면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았을까 싶구요. 그 외의 모든 면에서 이 영화의 경쟁 상대는 다른 한국 영화들이 아닌 서프라이즈입니다.
(당시 홍보 자료를 보면 'AK-47소총이 나온다!'라는 게 있습니다. 당시 한국 액션 영화들의 현실이 팍팍 와닿더군요.)
- 뭐 해외 로케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더군다나 1997년이라는 시절에 거의 해 본 적도 없던 러시아 올 로케(솔직히 정말 '올'인지는 상당히 의심스럽습니다만)로 만든 영화라는 걸 생각하면 아주 살짝 양해를 해줄 것도 없지 않겠지만. 그냥 러시아에 안 갔으면 됐을 텐데? 라는 생각이 아주 많이 들어요. 왜냐면 이 영화가 러시아의 독특한 풍광 같은 걸 정말 1도 활용하지 못하거든요.
거의 대부분의 장면이 실내에서 벌어지는데, 술집은 그냥 20세기 한국 호프집 같고 호텔은 그냥 한국 모텔 같고 마피아들 소굴은 그냥 한국 어딘가의 창고 같고 마피아들 회식 장소는 그냥 한국 중국집 같아요. 러시아 양식의 건물들이 몇 번 나오긴 하는데 걍 인서트로 짧게 들어가는 풍경 장면으로만 스쳐가구요. 그냥 몇 번 별로 안 중요하게 나오는 길거리 장면 정도만 러시아 느낌. 일단 길에 러시아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이 많거든요. ㅋㅋㅋㅋ
(그러니까 이런 게 러시안지 아닌지 알게 뭡니까.)
- 배우들의 연기도 참으로 장엄한 볼거리입니다. 러시아인 배우들의 연기야 말할 것도 없지만, 주연 박상원이나 조연 송재호 같은 양반들의 연기도 완전히 바닥을 쳐요. 원래 그런 분들이 아니라는 걸 감안해볼 때 아마도 각본과 연기 지도의 문제였겠... 죠. 더군다나 박상원은 본인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느낌이 팍팍 들게 어색한 러시아어를 구사하기까지 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뭣보다 큰 문제는 박상원씨 그 자체에요. 이런 컨셉의 영화, 이런 똥폼 액션 히어로 역에 어울릴만한 배우는 아니었다는 게 보는 내내 참으로 절절하게 와닿습니다. 지이이인짜 안 어울리거든요. ㅋㅋㅋ 가뜩이나 서프라이즈 이하급의 완성도를 안고 가는 영화에 미스캐스팅까지 걸리니 진정 구원받을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 분들은 러시아어로 연기했으니 자기들이 얼마나 바보 같은 대사를 읊고 있는지 다들 아셨을 텐데요.)
- 다 보고 나서 정보를 찾아보니 그 시절에 꽤 화제작이었던 드라마 '폴리스'의 연출자님이 감독한 영화더라구요. 사실 그 드라마는 꽤 히트했죠. 그 시절 기준 아주 드문 소재였고, 그러다보니 액션 연출 같은 부분도 호평이긴 했는데 지금 보면 어떨지 모르겠... 지만 이 영화 상태를 보면 알 것 같습니다. 잘 했을 리가 없어요. 이 영화의 상태는 해외 로케 경험 같은 걸로는 쉴드가 안 될 수준. 문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니까요.
각본은 이런 식입니다. 하유미를 실수로 죽인 악당이 보스에게 전화를 해요. "보스 어떻게 할까요? 야, 시체는 눈에 안 띄게 버리래!" 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 대사의 앞문장과 뒷문장 사이에 인터벌이 없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액션은 이래요. 그러니까 박상원이 총을 난사하며 적들에게 달려가면 적들이 막 쓰러지겠죠. 이건 그럴 수 있는데, 이 때 박상원의 총구는 늘 선풍기 회전모드처럼 좌우를 왔다리 갔다리 하는 가운데 그나마도 둥글게 둥글게 돌아요. 무슨 전쟁 놀이하는 국민학생 느낌. 끼얏호~ 나는 람보다~~
미장센... 같은 건 따질 틈이 없습니다. 뭔 내용인지 알아볼 수는 있게 찍어줘서 고마워요. 라는 마음으로 보셔야 해요.
디테일이야 뭐 거의 미친 수준이죠. 러시아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러시아 용병 박상원님께선 싸울 때마다 늘 한국 군복을 챙겨 입으세요. 으허허.
그리고 또... 뭐 그만하구요.
(워낙 망작이라 짤도 없어서 이게 여주인공 맡으신 분이 나온 거의 유일한 짤이네요. 포스터 제외하구요.)
- 그래서 이 영화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제겐 일단 강제규 감독을 재평가하게 된 영화라는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ㅋㅋ 이 영화로부터 딱 2년 후에 '쉬리'가 나와요. 정말 믿을 수 없는 기적인 거죠. 제작비 차이도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이 영화가 25억이라고 주장하는데 쉬리의 순제작비가 23억, 마케팅비 포함해서 30억이거든요.
'러시아 올로케 대형 액션 영화!!!'라는 떡밥으로 눈 먼 투자자들 낚아서 이렇게 티비 특집극으로도 못 쓸 퀄리티의 영화를 만들어 극장에 걸던 시절에 '쉬리'가 준비되고 있었다니. 당시 한국 영화판이 얼마나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는지 참으로 가슴 깊이 와닿더라... 뭐 이런 얘깁니다. ㅋㅋㅋ
(움직이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 또 한 가지 아주 훌륭한 가치가 있긴 하네요. 뭐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웃깁니다. 그냥 못만든 게 아니라 정말 상식을 훌쩍 넘어서는 수준으로 못만들었기 때문에 저처럼 가끔 일부러 이런 영화들 찾아보는 분들에겐 상당히 좋은 영화 되겠습니다.
(심심하면 예고편이나 한 번 보시구요.)
- 암튼 마무리하겠습니다.
요즘 나오는 한국 액션 영화들이 영 성에 안 차고, 그래서 '이 땅에 멋진 악숀 무비는 불가능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드시는 분들은 반드시 이 영화를 보세요.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온 마음을 감사함으로 충만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영화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전 왓챠에 별 다섯개 평점을 남겨 주었죠. (글은 안 적었습니다. 한 번도 적은 적 없어요. ㅋㅋ)
혹은 '일부러 망작 찾아보는 게 대체 무슨 재미야?'같은 게 궁금한 분들이 있으시다면 한 번 틀어보세요. 물론 재밌게 보시긴 힘드시겠습니다만, 저 같은 사람들의 즐거움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단서가 될 수 있는 영화가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들어요. ㅋㅋ 정말 이건 액션 영화 버전 '하피'급이라서요.
뭐 그러합니다.
+ 이 영화의 감독, 남녀 주연 배우 모두의 마지막 영화입니다. 박상원은 뭐 하나 더 나오긴 했는데 특별출연이었구요. 감독은 드라마 연출로 돌아가서 2007년까지 활동하셨네요. 그리고 여주인공 김지혜씨는 보아하니 이 영화가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인 모양입니다. ㅠㅜ
++ 또 한 가지 웃기는 거. 당시 이 영화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면 '러시아 배우들의 화끈한 베드씬이 관객의 흥미를 끈다' 같은 내용이 적혀 있는데요. 안 나옵니다. 액션들도 다 얌전해서 수위 높은 폭력 같은 것도 없어요. 근데 등급은 연소자 관람불가이니 왜 그럴까... 했는데. 결말 직전에 정말 진짜 쌩뚱맞고도 완벽하도록 무의미한 여주인공의 상체 & 뒷모습 노출씬이 아주 짧게 몇 초 나와요. 네. 뭐 그런 시절이었죠.
2022.10.20 20:34
2022.10.20 20:43
옛날 영화 vod 치고 화질은 꽤 선명하고 좋은데요, 조명도 그렇고 여러모로 영화가 아니라 당시 티비 드라마 퀄의 비주얼을 보여주긴 합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나 허접한 연기들은 'TV출신'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영역이어서요. ㅋㅋ
2022.10.20 22:35
코리아 커넥션, 제5의 사나이, 위대한 헌터 GJ, 용병 이반...을 거쳐서 <쉬리>가 나온 것이군요. 용병 이반은 명절 밤 1시 이후 하는 걸 Tv로 봤는데요, 여튼 브라운관 시절 본 방화들은 일단 밤만 되면 화면이 어두워서 그게 문제였어요
2022.10.21 08:32
위대한 헌터GJ는 또 뭐지? 하고 봤더니 어렴풋이 기억이 떠오르네요. ㅋㅋㅋ 감독이 무려 이두용씨였군요. 허허허. 역시 탑골 상식은 수영님이 짱!!!
맞아요 화면이 늘 좀 그랬죠. 소리도 구리구리했으니 자막이라도 좀...
2022.10.20 22:53
2022.10.21 08:51
맞아요. 이야기가 워낙 흐릿하고 개판이라 볼 땐 몰랐는데 다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애초에 이현세 원작으로 뜬 감독이기도 하고, 그런 대본소 만화들 스토리를 어설프게 흉내낸 느낌이더라구요.
네, 강제규는 정말 능력자였던 것입니다. 그동안 남몰래 무시해서 죄송했습니다 강감독님... ㅠㅜ
2022.10.20 23:38
2022.10.21 08:52
뭔가 이런 제목이 간지가 난다고 생각했던 거겠죠. 또 그 시절에 이렇게 제작비 많이 안 드는 잘 살지 않는 외국 로케이션으로 생색을 내는 게 살짝 유행이기도 했구요.
박상원씨 그 시절에 꽤 좋아했지만 뭐 연기폭이 아주 좁은 배우인 건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같아요. 그래도 자기 특기랑 맞는 캐릭터들은 잘 하셨으니 된 걸로!!
2022.10.21 01:22
아니 이런 물건이 있었단 말인가요? 전혀 몰랐는데 나름 한국 씨네필로서 부끄럽습니다. 배티님 글 보고 은행나무 침대를 봤다가 꽂혀서 쉬리까지 달렸는데 저는 지금 다시보면 굉장히 부끄러운 부분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생각보다 나이를 잘 먹었더라구요. 다른 것보다 전작 은행나무 침대는 정말 대사도 뻣뻣하고 장면과 장면 이어붙이는 것도 너무 어설펐는데 어떻게 이렇게 다음 작품에서 일취월장했는지 존경스러울 정도였어요.
2022.10.21 08:59
아 그게 이게 딱히 씨네필들이 관심을 갖거나 기억할만한 영화가 전혀 아니니까요. ㅋㅋㅋ 차라리 '광시곡'이나 '천사몽' 같은 건 워낙 화려하게 망해서 존재감이라도 있지만 이 영화는 그런 존재감 한 번 가져본 적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리고 사실 씨네필(?)들에겐 박하게 평가를 받았지만 '태극기 휘날리며'도 기술적 완성도나 기본적인 만듦새 같은 걸로 따지면 '쉬리'보다 훨씬 발전한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나름 꾸준히 발전하는 감독이셨던 것!! ㅋㅋ
2022.10.21 09:14
2022.10.21 10:02
2022.10.21 09:20
이게 97년이라니 ㅎㅎ 박상원씨에게 장총찬 이미지가 남아있던 80말90초 정도에 나온 영화인줄 알았어요.
2022.10.21 10:03
2022.10.21 10:19
쓰신분도 좀 저질...
2022.10.21 09:27
같은 해에 ' 인샬라' 가 나왔었는데 그 영화도 올 로케인가 아무튼 해외에서 찍었다고 홍보했었죠. 전 둘 다 못 봤습니다.
드라마도 해외 가서 찍고 오는 시대에 그런 홍보를 떠올리니까 좀 짠합니다. 이게 다 라떼가 천 삽 뜨고 허리 펴면서 산...아닙니다.
박상원의 셀링 포인트는 저게 아닌데 저 무렵 필모를 뒤져봐도 저기 저렇게 캐스팅된 이유를 모르겠네요.
제가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여기서도 박상원이 그러나(?) 해서 보는 걸 겁니다. 실은 제가 이 분을 은근히 좋아합니다. ㅋㅋㅋㅋ
찾아보니까 여주인공은 출연작이 이 영화 하나네요. 포스터 보고 얼핏 최지우인 줄 알았는데 아래 컷에선 김보연 같기도 하고요.
2022.10.21 10:06
영화는 못봤고 영화잡지에서 '감독이 TV 출신이라 극장용 영화란걸 이해못한 것 같다'라고 쓴 평론가 글을 읽은 기억만 나요.